삶의 여정/단상

7호선 단상

박찬운 교수 2017. 8. 23. 15:46

7호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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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니 전철을 타면 꼭 앉고 싶다. 그래서 전동차에 들어서면 빨리 일어서 내릴 것 같은 승객 앞에 선다. 나도 경험상 어떤 이가 곧 내릴 지 대충 아는지라 그리하는데.... 문제는 요즘 그 확률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반타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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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이 사람이다 싶어, 옆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완벽한 위치를 선점하지만, 그녀는 다음 역에서, 그 다음 역에서도 일어서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음 인연을 찾아 자리를 이동한다. 저 사람은 분명히 다음 역에서 내릴거야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 조짐도 분명하지 않은가.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는 저 폼은 하차준비의 예비동작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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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 방금 전 나를 포기케 한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고 내 옆에 서있던 남자가 잽싸게 그 자리를 앉는 게 아닌가. 운 좋은 사나이에게 잠시 질투를 느낀다. 이제 희망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인뿐. 이것마저 예측에서 어긋나면 오늘은 정말 운수 없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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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으로 앞의 여인을 애절하게 바라본다. 이 여인이 내 맘을 조금이라도 알까? 찰나!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든다. 아뿔싸! 콤팩트! 그녀는 내 앞에서 나를 흘깃 올려다보며 연지곤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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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사람은 자고로 지조가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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