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많은 영화를 본다. 이제까지 본 영화의 수가 헤아릴 수 없다. 아쉬운 것은 기억력이 날로 떨어져 며칠 전 본 영화도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 이런 이유로 내게 특별한 감동을 준 영화는 관람이 끝나면 바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기록을 남기면 후일 그 영화를 기억해 낼 수 있다. 기억력이 떨어졌다 해도 아직 그 정도 능력은 있기 때문이다. 이 글도 그런 일환에서 쓰는 것이다.
날리우드(Nollywood)라는 말이 있다. 나이지리아 영화 산업을 일컫는 말이다. 넷플릭스에 날리우드 작품이 몇 작품이 있지만 아직껏 거기까지 섭렵하진 못했다. 오늘 드디어 날리우드 작품 하나를 보았다. <나는 고발한다>(Citation, 2020). 다소 긴 시간(2시간 30분)이었지만 관람 내내 가슴 뭉클했다. 뭔가 정리해 놓지 않으면 안 될 영화다.
나이지리아는 적도 바로 위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하는 나라로 인구는 대한민국의 3배(1억 7천만), 면적은 10배(92만 평방킬로미터)가 되는 아프리카 자이언트다. 나는 이십 수 년 전부터 나이지리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이지리아에서 온 콜라(Kola)라고 부른 친구와 각별한 사이가 되어, 지금까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엠네스티 런던 본부에서 선임 법무관으로 근무하는 데, 2016년 반년 간 런던에서 연구학기를 보낼 때, 그가 근무하는 사무실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이 친구로부터 나이지리아의 풍부한 문화와 복잡한 정치 사회 사정(250 여 부족과 다양한 언어, 독재정권, 빈부격차 등등)을 들었고, 언젠가 꼭 그 곳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런 약속을 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기회를 갖질 못하고 있다. 그 날이 언제 올지....
각설하고, 오늘 본 <나는 고발한다>에 주목하자. 이 영화는 한 여대생(모레미)이 국제적으로 저명한 교수(은디아리)로부터 성희롱(나아가 성폭력)을 당하고 그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는 영화이지만 넷플릭스는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어, 그 실화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으로 이 실화의 당사자가 누구이며,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출처를 알리지 않은 정책을 취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으리라.
이러니 영화가 실화의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옮겼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실화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영화화했다면 사실관계의 상당부분도 픽션화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나이지리아의 어느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에 대해, 학생이 고발하고 그 시정을 위해 분투의 과정 끝에 마침내 승리했다는 내용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실화일 것이다.
어쩜 이 영화는 단일한 사건이 아닌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이런 유의 사건 몇 개를 모아서 영화화했을 수도 있다. 교수가 학생에 대한 지도권한을 이용해 성관계를 시도하고, 이에 대해 해당 학생이 그 교수를 고발했다는 실화는 하나가 아닌 복수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것은 다음 몇 가지다.
하나는 대학 내 성희롱 문제의 보편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성희롱(sexual harassment)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서구사회의 앵글을 통해 최근 우리사회에서 폭로되는 사회적 문제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에서도 그것이 예외가 아니라는 것, 이 문제는 동서와 남북에서 공히 일어나는, 글로벌한 사태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두 번째는 대학 내의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그 해결과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권력자인 교수를 향해, 더욱 교수가 국제적 명성까지 있어 대학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면, 피해자가 교수를 고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이 영화는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셋째,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해결의 가능성도 제시했다. 피해자 숨기지 않고 말해야 한다는 것(speak up!),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지원 단체와 동료들의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stand with you!),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진실을 가려내는 학교 내의 인권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well-organized human rights institution for victims). 이 세 가지를 갖추게 되면 대학 내에서 성희롱은 줄일 수 있고 종국적으론 추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영화는 보여 주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대학을 넘어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넷째, 위에서 본 대학 내에서의 인권기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나이지리아 대학의 문제 해결방법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보여준 성희롱 사건 처리 절차가 나이지리아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보장은 없으나 적어도 그 해결방안이 현재 시행되는 절차와 유사한 것은 분명할 것이다. 영화 속에선 이 고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위원회가 조직된다. 위원장과 위원 교수는 대학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수들이고 학생 대표도 위원으로 참여한다. 위원화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심의 과정의 한 에피소드가 증명한다.
가해 교수가 심리 중 학생 위원의 공격적 질문에 발끈한다. 자신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18 개의 국제학회의 회원으로 있는 저명한 교수이니 질문에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면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위원장이 이렇게 말 한다. “나는 20개가 넘는 국제학회의 회원이며 노벨 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은디아리 교수, 자리에 앉으세요!”
이 위원회는 며칠에 걸쳐 당사자의 주장과 관련 증인의 증언을 매우 세밀하게 청취한다. 이 청문 절차는 엄격한 권위 하에 상호 존중을 기초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가 위원회의 승인 없이 관련 증인을 접촉하는 것은 금지되고, 당사자에겐 변호사가 입회해 법률적 조언을 적시에 제공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발표되는 위원회의 결정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결과는 모레노의 승리. 은디아리 교수의 성희롱은 인정되고 학교와의 계약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선 검찰에 고발한다는 것.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로서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우리 사회가 성희롱 사건을 이렇게 다루고 있는가, 우리 대학에서 이런 문제를 위엄 있는 절차를 만들어 진상을 확인하고 그에 걸 맞는 실효적 결정을 하고 있는가? 내가 교수지만 심히 부족함을 느낀다.
최근 법률적 근거에 따라 만들어진 각 대학의 인권센터 업무에 이런 절차가 도입 되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인권전문가들에게 성희롱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대안을 준비해야 할 지를 고민케 한다.
덧.
영화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여기저기에서 보여준다. 나이지리아의 최대 도시 라고스와 세네갈의 수도 다카의 이모저모, 대학 캠퍼스, 수업방식, 학생들의 여가활동 등등.... 영화가 주는 귀한 정보다.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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