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인가-‘힐빌리의 노래‘를 보고-

박찬운 교수 2021. 5. 8. 05:44

 

'힐빌리의 노래'(2020)

 

 

나이 들어 젊은 후배들 앞에서 자신의 옛날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저렇지 않았어. 요즘 애들 너무 의지가 약해...” 이런 식의 이야기는 조금도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꼰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점을 나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과거의 나를 소환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순간순간 일어난다. 이것이 내 본능인지 내 인간성의 한계인지....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긴 매우 어렵다는데, 내게도 그것은 정확히 적용되는 것 같다.

미국은 풍요의 나라이지만 그게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미국인 중에도 스테이크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들이 많다. 옛날 고깃국에 쌀밥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는 한국인과 다를 바가 없다. 요즘 미국 청소년들 중 특히 미시건, 오하이오 주 등 과거 미국 제조업의 메카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많다. 24시간 굴뚝에서 연기를 뿜던 공장은 멈추었고 번화하던 거리를 지나던 수많은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졌다. 여기에서 자라나는 많은 청소년들이 희망 없이 하루하루 술과 마약으로 소일한다. 자신만 조용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거리를 헤매며 범죄에 빠지기 일쑤다. 바로 이들과 부모들이 국내 산업을 보호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트럼프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중북부 쇠락한 공업지대(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층이다. 이름하여 힐빌리(hillbilly).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어려운 가정에서 예일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된 J.D 밴스의 자서전 '힐빌리 엘레지'(2016)를 영화화 한 것이다.

 

2020년 개봉된 영화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는 힐빌리의 성공 스토리다. 가난한 오하이오의 소년 J.D 밴스(게이브리얼 배소)가 예일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또 세상 어디에도 있는 보편적 이야기다. 그러니 영화로선 자칫 진부할 수 있고, 메시지 또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굳은 의지를 갖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꼰대스런 이야기일 수 있다.

자고로 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선 보편적 주제를 뛰어넘어 그 영화만의 독특한 재미를 선사해야 하는데,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크게 호감파와 비호감파 둘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개봉 반년이 넘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안 들린다. 영화 전문 사이트의 평점도 매우 박하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할머니로 나온 글렌 클로스가 2021년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후보로 나와 ‘미나리’의 윤여정과 경쟁한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J.D.에게 할머니가 없었다면 비행소년에서 범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내게 이 영화에 대해 묻는다면 평가는 박할 수 없다. 관람 내내 내 눈물샘을 자극했으니.... 감독 론 하워드가 만만한 감독인가? 그는 이미 20년 전 ‘뷰티플 마인드’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쥔 할리웃의 거장이다. ‘다빈치 코드’를 비롯해 톰 행크스가 열연한 몇 개의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진부한 성공 스토리를 그리려 했겠는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단하는 게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 높은 평점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단지 눈물 나는 성공스토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의 방점은 한 인생의 ‘성공’ 보다는 한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가족애’다. 그것은 미국식으로 그려졌지만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보편적 감성이었다. 


‘힐빌리의 노래’는 현재 신시내티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J.D 밴스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이다.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영화를 보기 전엔 그 실화의 스토리를 잠시 찾아보는 게 좋다. 어떻게 그런 어려움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 ‘아니 저것을 진짜 극복했다는 것이야’ 이런 감탄사가 연신 나오면서,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흐른다. ‘힐빌리의 노래‘가 그런 영화다.

 

J.D의 어머니(에이미 애담스), 고교 시절 전교 2등을 한 똑똑한 여자였지만 인생이 꼬였다. 여러 남자를 전전하면서 약물중독자가 되어 가족을 어렵게 만든다.

 

주인공 J.D 밴스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이미 아담스)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 자란다. 간호사인 어머니는 인생이 꼬였는지 정상적인 엄마 노릇을 못한다. 약물에 중독되어 시시각각 다정한 엄마에서 광폭한 엄마로 변하며 아들을 때린다.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로 전전하면서 아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새 남자도 거기서 만난 새 아들도 약쟁이다. 이러니 J.D도 점점 불량소년이 되어간다.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손자를 데려와 돌본다. 할머니(글랜 클로스)는 질곡의 삶을 벗어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손자의 등을 강하게 떠민다. 우여곡절 끝에 J.D는 맘을 잡고 할머니의 바람을 쫓는 소년이 된다. 쉴새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는다. 드디어 J.D는 힐빌리의 기대주가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J.D의 여름 인턴쉽 면접과정에서 일어난다. 로스쿨을 다니면서 대형 로펌에서 여름 인턴쉽을 하는 것은 법률가로선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J.D는 어렵게어느 로펌의 최종 면접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누나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어머니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꼭 와달라는 것이다. 면접이 코앞인데 어떻게 그 먼 곳으로 간다는 말인가. J.D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머니, 가족, 자신의 미래.... 나 같으면 어떻게 할까? 냉정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면접이 있으니 못 간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J.D는 차를 몬다. 오하이오 미들타운까지 10시간도 넘는 길이다. 비행기 탈 돈이 있으면 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그에겐 그 돈이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남매의 사랑은 깊다. J.D와 누나 린제이(헤일리 베넷)

 

그 먼 길을 달려와 어머니를 만나 안정을 시키고 이제 다시 면접 장소인 워싱턴 디시를 향해 차를 몬다. 과연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까. 희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 여자 친구 우샤(프리다 핀토)와 통화를 한다. 우샤는 한 밤중 일어나 J.D의 졸음운전을 막기 위해 전화를 끊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J.D는 면접장소에 무사히 도착한다. 영화는 끝나고 자막이 오른다. 어머니는 약물에서 손을 뗐고, J.D와 우샤는 결혼해 고향 신시내티에 정착해 변호사 생활을 한다고.


이 영화를 보다보면 J.D가 가족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신을 학대하는 어머니에게서도 사랑을 발견하고 할머니와 누나에게서 그것을 확인한다. 가난하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사랑의 끈은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이 사랑은 변할 수 없으며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라면 그 사랑, 가족 간의 강한 연대를 발견할 것이라 믿는다.(2021.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