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예술

한 예술품 애호가가 이루어 낸 아시아 최고의 서양미술관-일본 국립서양미술관 60주년을 맞이하여-

박찬운 교수 2019. 11. 16. 06:06

일본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을 만들게 한 마스카타 컬렉션의 주인공 마스카타 고지로

 

역시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 때, 나는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90년대 초 변호사 수가 많지 않던 시절, 나는 한국 변호사 중 일본에 꽤나 알려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일본어를 좀 배우고 난 뒤,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좌충우돌, 일본 각처의 변호사회를 다니며 얻어낸 결과였다. 당시 내 주된 관심사는 인권 관련 일이었다.

이제 막 30세에 접어든 한국 변호사가 일본 변호사회를 찾아, 20년 이상 선배격인 일본 변호사들을 만나, 매우 당돌하게 묻고 자료를 달라고 했다. 그런 덕에 일본 변호사나 법학교수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때때로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로 인해 적잖은 글을 3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발표할 수 있었다. 그랬던 일들이 어느새 20년이 훨씬 넘은 과거사가 되었다.

27년 전 처음으로 도쿄에 갔을 때 묵은 곳이 우에노 공원 근처의 작은 호텔이었다. 처음 해외여행인지라 무척 긴장하고 흥분했지만 아침 산책길에 만난 우에노 공원의 한적함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때부터 한 10여 년 간은 의례 일본에 가면 우에노 근처에서 묵었다. 시간이 빌 때면 공원을 산책하곤 했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들른 곳이 국립서양미술관이다. 공원 내의 어느 곳에 이르니 마당 한 가운데에 눈에 익은 조각품이 있었다.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등등... 그것을 보는 순간 호기심에 이끌려 미술관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더욱 무료입장!

이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미술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 없었던지라, 그저 돈 많은 일본이니까 이런 유럽 회화 미술관을 가지고 있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이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몇 년을 흘러 보낸 뒤 이 국립서양미술관이 내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요즘엔 이 말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내겐 여전히 명언인 것은,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모르고 있을 때는 그 어떤 명화라 할지라도 부지불식간에 스쳐지나 가지만 알고 있을 때는 그것이 내 눈에 들어오고 말을 걸어온다. 이 일본 국립서양미술관도 그렇다. 오랫동안 내 눈에서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하더니 언젠가부터 내 눈에 들어왔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해달라고 애절하게 말하는 것 같다. 지난 20년 나는 조금씩 서양미술을 공부했고, 결국 내 미술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로 열매를 맺은 게, 이런 인식의 변화에 큰 이유일 것이다.

우에노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을 내게 설명해 준 분은 고 최영도 변호사님이시다. 그 분은 나의 미술과 여행에 관한 스승님이신데, 언젠가 도쿄에 있는 이 미술관의 내력을 설명해 주셨다. 어떻게 해서 일본에, 유럽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유럽회화 미술관이 있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소상히 설명해 주신 것이다. 이 설명은 이제 최 변호사님께서 쓰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2)에 수록되어 있으니 누구나 접할 수 있다.

국립서양미술관의 내력

이 미술관의 내력을 이렇다. 이 미술관의 출발점은 마스카타 컬렉션이다. 곧 마스카타라는 사람이 모아 놓은 미술품이 이 미술관을 만들 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마스카타 코지로(1866-1950). 그는 메이지 시대 총리를 지낸 마스카타 마사요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미국 유학을 마친 뒤, 아버지의 비서관을 지내고, 1896년 코베의 카와사키 조선소의 초대 사장이 된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마스카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평소 서양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언젠가 일본 국내에 미술관을 만들어 일본 국민들에게 서양미술을 보여주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그의 수집대상은 광범위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고전주의 미술품은 물론이고 전시기를 망라한 그림을 모았다. 그 중엔 당시로서는 거의 종이 값에 불과한 수준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비싼 그림을 몇 개 사면서 그런 그림들을 슬쩍 끼워서 사거나 푼돈 수준으로 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은 그림 수가 수 천 점. 거기에다 로댕 등의 조각품까지 손을 댔다.

그러나 마스카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사업도 세계 대공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카와사키 조선소에 경영위기가 따라오자, 그는 국내에 들여왔던 그림을 경매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 런던에 보관해 두었던 그림은 불의의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의 미술관 건립은 이제 무산위기에 온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엔 미술관 건립의 꿈이 완전히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 백 점의 회화와 조각품이 파리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마스카타의 미술품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대국 자산으로 분류되어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국유화된다. 그리고 마스카타는 1950년 숨을 거둔다.

그것으로 끝일까? 만일 그렇다면 오늘 날 이 미술관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 전후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이루어진 후 프랑스와 일본은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양국의 우의의 증표로서 프랑스 정부는 이 마스카타 컬렉션을 일본에 돌려주기로 한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일본에 서양미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관람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었다. 여기에 당대의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등장한다. 그가 그의 일본인 제자들과 함께 이 미술관 건립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이렇게 해서 완성된 미술관 건물이 현재 국립서양미술관 구관임, 59년 미술관 건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확장해 현재는 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음).

이렇게 해서 1959년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은 문을 연다. 한 일본인 수집가가 유럽을 종횡무진하면서 수집했던 그 미술품이 드디어 일본에 상륙한 것이다. 이 때 약 350 여 점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예술 독지가들은 이 컬렉션을 기초로 지난 60년 간 또 다른 수집목록을 더하기 시작한다. 회화와 조각, 소묘와 판화 그리고 공예 등의 분야 약 6천 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최고, 아시아 최고, 아니 세계 유수의 서양미술관이 일본에서 탄생했다.

최근 국립서양미술관은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독립법인으로 운영방법으로 바꾼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이제 이 미술관의 무료 관람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아직은 큰 부담이 없다. 상설전시를 보는데 단돈 5백 엔이면 되니 말이다.

작품 감상

이제부터 이 미술관의 소장품 중 내 눈에 들어온 작품 몇 점을 소개해 보겠다. 내가 찍은 사진에 간단히 설명을 다는 방식으로 소개할 테니, 그저 미술관을 슬쩍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감상해 주기 바란다.

일본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

 

로댕의 <칼레의 시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지옥의 문>

 

부르델의 <활 쏘는 헤라클레스>

 

로댕의 <청동시대>

 

엘 그레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루벤스의 <잠 든 두 아기>

 

쿠르베의 <잠자는 나부> 이 그림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이 그림에서 천을 치우면 <세상의 기원>이 될 듯

 

쿠르베의 <파도>

 

르노아르의 <할렘의 여인들>

 

모네의 <아이리스> 모네의 방에서 만나는 이 그림을 포함해 몇 점의 수련 작품은 유럽 어디에 가서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좋다.

 

모네의 <수련>

 

모네의 <수련>

 

모네의 방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도 한 점이 있다. 이 그림은 고흐가 1889년 생레미 요양소에 있을 때 장미가 피어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역시 고흐 옆에는 빠질 수 없는 인물 폴 고갱의 작품도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상설관의 마지막 부분은 20세기관이다. 이곳에서 미로(맨위), 피카소(중간), 잭슨 폴락(맨 아래)의 그림을 각각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