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프랑스 문학사에서 로맹가리(1914-1980)만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드물 것이다. 유대계로 태어나 홀어머니 미나와 두 개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나는 모스크바의 무명 여배우로 어떤 남자를 열렬히 사랑해 아들을 낳았지만 남자는 모자를 버렸다.
20세기 초 아무 배경 없는 가난한 여인과 사생아 앞에 놓인 삶이란 안보아도 비디오. 그렇지만 이들 모자는 그저 가난과 각박한 삶으로 인생을 끝내지 않는다. 미나와 로맹가리는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당시는 러시아 도시)와 바르샤바를 거쳐 꿈에 그리던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다.
미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아들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들은 언젠가는 최고의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니나는 유럽을 떠돌면서도 프랑스를 사랑했고 프랑스인이 되길 원했다. 니나의 꿈은 아들을 프랑스의 위인으로 키우는 것. 그래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미나는 고기 한 점을 먹지 않으면서 아들은 배고픔을 모르게 했고 미래의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 온갖 교육을 다 시킨다. 음악, 그림, 춤추기 심지어 사격술까지.
세월은 흘러 로맹가리 나이 44세. 그는 이제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문학가가 되어 필명을 날릴 때 갑자기 중병이 찾아온다. 그 아픔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는다.
마치 2차 대전 중 포화 속에서도 밤을 세워 글을 쓰던 젊은 날의 로맹가리의 모습이다. 그 때도 로맹가리는 어머니와 굳은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글을 썼다. 유서가 될지도 모를 글이지만...15년 후 다시 그런 마음으로 쓰는 이 글, 어머니를 회상하며 젊은 시절 로맹가리의 삶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소설 <새벽의 약속>은 이렇게 써졌다.
며칠 전 넷플릭스 최근작 ‘새벽의 약속’(2017년 개봉, 감독 에릭 바르비에, 미나 역 샤를로트 갱스부르, 로맹가리역 피에르 니네이)을 발견하고 바로 찜을 해 두었다가 엊저녁부터 보기 시작했다. 30여 분을 남겨 두고 오늘 아침 출근을 했다가 저녁에 돌아와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로맹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지나칠 정도의 자식 사랑에 약간 반감도 가졌으리라.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랑이 미나의 자식 사랑과 비교될 수 있을까.
서양 어머니는 동양 어머니와는 뭔가 다를 것 같다는 편견은 여지없이 틀렸다. 어머니의 사랑은 동과 서가 차이가 없고, 또 어떤 경우는 서양의 어머니가 맹모를 능가한다. 로맹가리 어머니 미나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 아들의 성공적인 장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 미나는 아들이 장교가 되어 프랑스 영웅이 되고,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며, 톨스토이나 빅트로 위고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문호가 될 것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 소망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홀몸으로 옷을 만들어 팔고 사고무친한 곳에 와서 호텔업을 하면서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도 이 소망의 불을 꺼트리지 않았다.
영화의 한 대목을 보자. 빌뉴스에서 모자를 만들어 팔던 시절 주변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흘러 온 이 가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공연하게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이것을 참지 못한 미나는 동네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이렇게 소리친다. <새벽의 약속>(심민화 옮김) 그 부분을 찾아서 옮겨본다.
"더럽고 냄새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50쪽)
어쩜 극성맞은 어머니의 바람이라 생각하고 일찌감치 어머니의 품을 떠 낫을 법한 로맹가리의 삶도 위대하다.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특징인지 아들은 일찍부터 철이 들고 어머니를 이해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 싶은 순간은 순간순간 찾아왔지만 어느 때부턴 어머니의 소원과 자신의 소원을 일치시켰다. 어머니를 위해 산다는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가 된 것이다.
어머니를 결코 슬프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꿈을 실현해 그 영광을 어머니에게 바치리라.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프랑스의 영웅이 될 것이고 대문호가 될 거야.’ 로맹가리는 이를 간다.
영화가 아닌 소설<새벽의 약속>을 읽을 때 초반부에서 만난 대목이 있다. 그가 어머니의 꿈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지, 어머니란 존재는 마치 자기를 지키는 부적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화에선 이 말까진 소개하지 않지만, 로맹가리에게 미나가 어떤 존재인지, 이 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인생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은밀하고 희망적인 논리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신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 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46쪽)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부분이다. 전쟁이 끝나고 로맹가리는 어머니를 찾아 니스로 돌아온다. 자신을 반기면서 안아줄 어머니를 찾았으나 없다. 어머니는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신 것. 이럴 수가! 전쟁 중에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펜을 놓지 않았는데....
그의 최초 출세작 <유럽의 교육>은 피가 튀기는 전장 한 가운데서 탄생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편지를 보내 아들이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격려했고, 아들은 그 편지를 읽으며 고통을 참아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은 프랑스 공군 영웅이 되었고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로맹가리는 전쟁 이후 니나의 소원이었던 프랑스 외교관이 되어 세계를 누볐다. 프랑스 최고 문학상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받는 영예를 안았다. 한 번은 로맹가리로 또 한 번은 그의 또 다른 필명 에밀 아자르로. 어머니와 그 새벽에(여기서 새벽은 어린 시절이라고 보면 됨)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미나는 이 중 어느 하나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의 눈시울 붉히게 하는 것은 전쟁 중에 로맹가리가 받은 편지가 놀랍게도 니나 사후에 친구가 대신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보낼 250여 통의 편지를 써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아들에게 몰고 올 슬픔과 좌절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어머니!
다만, 이 영화를 볼 때 조금 불편한 점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피우는 담배. 지금도 프랑스에 가면 유독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많지만 20세기 전반의 프랑스는 흡연자의 천국. 침상에서 여인을 바라볼 때도, 병상에 누워 아픔을 이길 때도, 아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릴 때도, 한 손에선 담배연기가 타오르고 있다. 프랑스에서 담배는 그저 기호품이라고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프랑스인에게 담배는 어쩜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남녀노소가 자유 프랑스를 위해 몸을 던졌듯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담배 연기에 몸을 던진다. 금연자의 눈으론 참으로 괴기한 모습이지만 이 영화에서만은 참기로 했다. 로맹가리의 어머니 미나의 삶에서 사랑하는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를 볼 수 있으니.
영화를 보고나서 소설 <새벽의 약속>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몇 년 전 우리 집에서 돌아다니던 책인데...그 때 주목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바로 로맹가리 책 두 권을 주문했다. <새벽의 약속>과 또 하나의 소설....(그것은 후일 말하겠다) 이 리뷰는 영화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 <새벽의 약속>을 읽으면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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