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

손에 손잡자, 연대의 방패로 진군하자

박찬운 교수 2016. 7. 9. 06:01

손에 손잡자, 연대의 방패를 앞 세우고 진군하자

 

나는 지난 2-3년간 이 공간을 통해 줄기차게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해 왔다.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이 말은 내 개인의 바람이면서, 이 사회에 대한 충심어린 호소다.

 

자유는 내 의지에 따른 선택을 존중하자는 것이고, 독립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며, 진실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살진 않는 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고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 첫 번째는 뭐니뭐니해도 표현의 자유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하면서 말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이 보장 안 되면, 그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이것 없이는 우린 다른 자유도 누릴 수 없다.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인권을 확인할 때, 그 첫 번째 자리에 표현의 자유를 올려놓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사회는 70-80년대 숨 막히는 권위주의 체제를 경험했다. 민주화 운동은 그것을 깨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는 멀고도 멀기에, 그것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멈출 수 없다. 그중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과거에 비해 신장되었지만 언제나 부족하며 때론 후퇴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가로 막는 가장 위험한 상황은 종북논쟁으로 조장되는 결과이다. 이명박 정권부터 종북이란 카드는 상대의 표현의 자유를 꺾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진보적인 인사의 말과 글이 영향력이 있을 때, 그것을 원천적으로 꺾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을 종북인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말과 글은 그 종북이란 블랙홀에 빠져버려 삽시간에 실종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실상이 그렇다.

 

이 종북이란 무기는 누구라도 그것에 의해 공격을 당하면 효과가 나타나는 괴력을 지녔다. 종북의 창을 맞으면, 그 때부터 그는 신중모드로 바뀌어,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자기검열에 들어가고, 그것을 하다보면 의지가 꺾여, 더 이상 말하기도 글을 쓰기도 어려워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근 나도 그 창을 맞고 있다. 북한 해외식당 집단탈북 여종업원에 대한 민변의 인신보호구제신청을 옹호하면서, 그 신청의 불가피성을 말하자, 대뜸 내게 종북이란 표현으로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내게 직접 메일을 보내 자중을 요구한다. 나는 그런 사람의 정체를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내게 종북이란 창을 던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이렇게 되니 나도 움치려 들고, 자기검열의 단계에 들어간다.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고, 쓴 글도 다시 보고 고치게 된다. ‘혹시나 이번엔 내 말의, 내 글의 어느 부분을 종북이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의식의 저편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민변의 인신구제신청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어느 판사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법대로 하자니 종북판사가 될 것 같고, 안 하자니 법관으로서의 양심이 두렵고.... 과연 그는 어떤 길을 걸을까?

 

이 평온한 주말 새벽, 나는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가 이것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종북논쟁에서 우리가 당장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종북이란 창을 연대라는 방패로 막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을 또 다시 전체주의 국가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민주공화국이 아닌가.

 

 (2016.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