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역사

아들이 쓴 어머니의 자서전(子敍傳)<나, 조계진>을 읽고

박찬운 교수 2025. 7. 18. 14:45

아들이 쓴 어머니의 자서전(子敍傳)

<나, 조계진>을 읽고

 

 
지난달(2025년 6월) 한 권의 한국 현대사 관련 책이 출판사 한울을 통해서 나왔다. <나, 조계진>이란 책이다. 이 책은 광복회의 이종찬 회장이 쓴 그의 어머니 조계진 여사의 회고록이다. 이름하여 아들이 쓴 어머니의 자서전(子敍傳)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이종찬 회장은 독립투사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 집안 이야기는 개인의 역사를 넘어 그 자체로 우리 한국 현대사의 압축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 더욱 자식이 쓴 어머니의 회고록이라니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책이다. 과연 이 책은 어떤 내용으로 500여 쪽의 지면을 채웠을까?
 

명문가의 후예는 삶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이 글을 쓰기 전에 가문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솔직히 어느 자리에서도 가문 운운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나의 인권 감수성을 건드린다.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몇 대조 조상을 따지는가.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가풍을 따지는가. 나는 나대로, 나의 자유의지대로 사는거다. 아마 이런 생각은 내가 워낙 한미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감정은 비단 나만이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5200만 인구 대부분이 아마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지 않을까. 우리나라만큼 평등의식을 갖고 사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나라에서 과거가 현재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어느 가문 이야기와 관련된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 전형을 보고 존경심이 우러나와서일까. 아니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좀 색다른 시각으로 쓴 새로운 역사책에 대한 흥미 때문일까? 또 아니면 이 집안 사람들과의 이러저러한 사적 인연 때문일까?(나는 우당의 또 다른 손자인 이종걸 전 국회의원과도 과거 민변에서 같이 활동을 했고, 이종찬 회장의 아들인 이철우 교수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이 모든 게 원인이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이 가문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겐 빛나는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 막연하나마 측은지심까지 들 때도 많다. 어떻게 저렇게 평생 남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까? 혹시 그들은 숨막히는 삶을 살고 있지나 않을까? 명문가의 후예는 삶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같은 자유로운 삶이 행복하지 않은가? ㅎㅎ)

 

삼한갑족의 정수 우당가

우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도 있을 테니 잠깐 이 집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우당 이회영(1867-1932)의 가문은 가히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명망가 집안이다. 그는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고종 때 이조판사, 우찬성 등을 역임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다가, 국권이 일본에 의해 침탈되자 여섯 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그의 형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되었으나, 그 재산을 모두 헐값에 처분하고 형제들과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가들의 돈줄이 되었고, 그의 동생 성재 이시영은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집안의 역사도 구한말 어느 명문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독립운동사에 불과하다.

이 집안의 또 다른 내력이 이 집안을 명문가 이상의 가문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 말하는 이 책의 주인공 조계진 여사와 관련되어 있다. 조 여사는 우당의 아들 규학(책에선 자주 주명이란 이름으로 나옴)과 결혼했는데, 여사의 집안이 참으로 흥미롭다. 조 여사의 외조부가 역사책에 나오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이다. 따라서 고종 명성황후는 자연스레 조 여사의 외숙부와 외숙모이고, 명성황후 사후 상궁에서 고종의 비가 된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동갑나기 외사촌이다. 여사의 아버지는 고종 때 판서를 지낸 풍양 조씨 일문의 조정구 대감이다.

이런 정도만 들어도 이종찬 회장의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만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20세기 초반 그의 가문은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의 중심이 되어 조선 땅을 호령했을 것이다. 그런 가문이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6형제가 식솔 전체를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갔다. 그리고 35년 뒤 마침내 조국이 해방되자 6형제 중 단 한 사람 성재 이시영만이 몇몇 가족과 함께 고국 땅을 다시 밟는다. 드라마틱한 가문이 아닌가? 이런 가문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종찬 광복회 회장

 

회고록이 말하고자 하는 것

조계진 여사, 1897년에 태어나 100세를 살다 1996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조 여사는 한 세기를 살면서 구한말 조선의 상황, 일제강점기에서의 독립운동, 해방과 군정 그리고 한국전쟁을 몸으로 경험했다. 이 역사의 격동기에서도 그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고, 이국땅에서 자식을 낳아 키웠다.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우당을 비롯한 혁명가 집안 사람들의 독립운동을 열심히 내조했다. 이런 삶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조계진 여사의 회고록이지만 저자는 그의 아들 이종찬 회장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쓴 회고록이니 책의 내용이 모두 조 여사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조 여사가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들 이종찬 회장의 의지와 염원이 담긴 책이다. 그는 어머니의 회고록을 왜 쓰려고 했을까? 그 궁금증은 책 말미의 후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에 나오는 ‘나’는 조 여사이지만 오히려 이종찬 회장의 말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독립운동사는 거창한 투쟁의 역사만 서술했을 뿐, 그 틈바구니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소녀 시대의 꿈을 상실했고, 처절한 환경에서 가정을 지키는 가운데 투사들을 내조했으며, 2세들을 다음 세대의 주역으로 번듯하게 길러내느라 희생한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에 너무 소흘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내놓고 싶었다.”
(후기)

어쩜 이것이 살아 있는 역사일지 모른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국권을 잃었는지 그것을 아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다. 남자들이 말을 타고 총칼을 휘두르던 만주벌판의 이야기만이 독립운동사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남정네에겐 처가 있고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의 삶도 독립운동의 한 과정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해 평가돼야, 독립운동사의 제대로 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종찬 회장은 바로 그런 삶의 역사를 세상과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당의 두번째 부인 이은숙 여사가 쓴 <서간도시종기>. 나는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긴 리뷰를 작성한 바 있다.

 

<서간도시종기>와 <나, 조계진>

이 책 외에도 우당 가문의 여성이 쓴 책이 또 한 권 있다. 우당 선생의 두 번째 부인 이은숙 여사가 쓴 <서간도시종기>다. 우당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1910년 망명 직전 재혼한다. 바로 그 상대가 이은숙 여사(1889-1979)로 우당과는 나이 차가 스무살이 넘는다. 서간도시종기는 이 여사의 회고록으로 여사는 이 글을 통해 우당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기록한다.

우당은 혁명가였고 망명객이었기 때문에 어떤 메모나 일기도 남기지 않았다. 언제 잡혀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역사는 날이 가면 잊게 마련이다. 이 여사는 생전 그것을 초조해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당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이 가문의 역사를 후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우당을 잘 아는 이들이 필을 들지 않으니 조바심에 결국 여사가 필을 들었다. 문인이 아닌데다 옛글을 익힌 여인이었으니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이 여사가 글을 완성한 것은 1966년 3월 17일, 우당이 살아 있다면 100살이 되는 날이었다. 책은 1975년에 나왔지만 그 책을 일반인이 읽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은숙 여사의 문장이 한문 투의 조선조 규방규수들이 사용하는 언문체(한글)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2017년 7월 새롭게 단장을 하고 일조각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제를 붙이고 글 내용 전체에 주석을 붙인 새 판이다. 이 작업은 한경구(서울대)·한홍구(성공회대) 두 형제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두 교수 집안과 우당 가문과의 특별한 관계가 작용한 것 같다. 두 형제 교수의 아버지는 출판사 일조각을 세운 한만년 씨고,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언론이었던 월봉 한기악 선생이다. 월봉은 젊은 시절 우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북경 시절엔 생사고락을 같이 동지이기도 했다.

나는 수년 전 <서간도시종기>를 읽어보고 우당의 가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시간을 내 글을 써 블로그에 올렸다. 관심 있는 독자는 이 글과 함께 그 글도 읽어보면 우당 선생 가문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서간도시종기>는 우당 선생의 부인이 직접 쓴 우당 가문의 이야기다. 반면 <나, 조계진>은 우당의 며느리-다만 시어머니인 이은숙 여사와의 나이 차는 8살에 불과함-의 회고록이고, 실 저자가 이종찬 회장이기 때문에 회고의 내용은 <서간도시종기>에 비해 훨씬 넓다. 우당 가문을 포함해 조 여사의 친정인 조정구 대감과 친정 오빠(조남승, 조남직 등) 그리고 고종 황제를 비롯해 왕가 이야기, 북경과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지사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떻게 보면 <나, 조계진>은 이종찬 회장이 친가와 외가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독립운동사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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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문을 넘어 모든 이의 역사가 된 가문 이야기  -서간도 시종기를 읽고-

한 가문을 넘어 모든 이의 역사가 된 가문 이야기-를 읽고-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내가 워낙 한미한 집안출신이라 그런지, 가문, 집안, 문벌...이런 유의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한다. 나는 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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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강한 조선의 여인, 혁명가문의 며느리가 되다

조계진 여사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책의 주요 부분인 조 여사의 성장기와 결혼 그리고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조 여사의 살아 생전의 말이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삶을 옆에서 보고 느낀 총체적 소감일 것이다.

“나의 삶은 20세기 들어 일제의 침탈과 그에 따른 우리 민족의 좌절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 나라가 역사의 변곡점에서 기울어가는 풍경과 그 과정에서 국민이 허덕이는 모습을 내가 속한 친정과 시가의 배경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다만 혁명가문과 결혼함으로써 내가 개인적으로 원하던 ‘작은 가정’을 이루는 일은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그뿐인가. 낯선 이국땅에서 대륙의 모진 바람과 함께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격동의 시간에 나는 자식을 잃고 삶을 포기할 만큼 절망하기도 했다.”(후기)

이 집안 자손들이 빼어난 것은 조 여사의 피를 이어받은 덕일 것이다. 이 책 이곳저곳에 여장부 조 여사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 많다. 특히 조 여사는 백수를 누릴 만큼 건강하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었다. 조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 기관 중의 하나인 경성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1917년 졸업, 현 경기여고 전신) 출신으로,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꽤 잘한 모양이다. 아마도 그에 대해서 자손들에게 두고두고 자랑을 했던 것 같은데, 책에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나는 키는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건강에는 자신 있었다. 2학년 때 조금 아파서 며칠 결석한 것 외에는 사실상 개근으로 졸업했다. 학과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모든 과목이 재미있었다. 소학교 때는 처음에 산술이 조금 어려웠지만 첫 고비를 넘기자 그것도 별문제가 없었다. 성적은 10점 만점에 9~10점이었다.... 졸업할 때 본과 33명 중에 내가 2등이었다.”(214)

재미있는 것은 위의 이야기가 그저 구전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백프로 자료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책 속에 사진으로 나오는 경기여고에서 발급한 당시 성적표(올 3월 발급)가 증거다. 조 여사의 말도 재미있지만 경기여고가 백 년 전의 자료를 잘 보관하고 있는 것도 대단히 흥미롭다. 전쟁 중에도 학적부 등을 잘 보관했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명문고의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조 여사는 명문가의 고명딸로 인생을 시작했지만 그의 꿈을 사실 소박한 것이었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아 알콩달콩한 작은 가정을 꾸리는 것. 1917년 경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해 장안 명문가의 아들 이규학(우당의 아들)을 만나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혼례식을 치를 때만 해도 그런 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조 여사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드디어 1917년의 동짓달 어느 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하늘은 높았고 날씨도 유난히 맑았다. 거북한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과 낭자, 족두리로 단장한 내가 대청마루에서 마주 서서 예식을 올렸다. 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동석하셨다.”(230)
“내가 고명딸이라 오빠들이 정성껏 준비한 선물들, 그리고 덕수궁과 창덕궁, 운현궁에서 각각 보낸 패물과 필목 등 선물들이 마차 몇 대 분량이어서 짐꾼들이 이를 나르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렸다.”(233)

그러나 신혼의 꿈은 너무나 짧았다. 불과 1년 수 개월의 신혼의 단꿈을 꾼 이후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 이후 30년 이상 조 여사는 자기를 버린 채 소소한 행복마저 경험하지 못하는 실로 신산한 삶을 살아간다. 조 여사는 가족의 행복을 맛보면서 살아본 것아 백년 삶에서 마지막 20여 년이었다고 고백한다. 늦게나마 막내 아들 이종찬 회장 내외의 효도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아들이 조 여사의 이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다행히 막내아들이 어려서부터 좋아한 여학생이 있어 서로 우정과 사랑을 넘나들더니 끝내 가정을 이루었다. 그 며느리로 인해 나는 내가 바라던 작은 가정을 이루었고, 우리 집은 다시금 정상적인 궤도에 접어들었다. 내 며느리 윤장순은 우리 집의 기둥이다.”(후기)

사실 이런 고백을 아들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하긴 힘들다. 나는 이부분에서 조 여사가 생전에 며느리 윤장순 여사와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고 자주 며느리를 집안의 기둥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들이 저런 말을 어떻게 어머니의 이름으로 함부로 쓸 수 있겠는가.
 

아이를 낳는 것도 독립운동

이 책을 읽다 보면 조선 여인의 강인함을 이곳저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망명지인 북경이나 상해에서 조 여사는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 치다꺼리를 한다. 허구한 날 시아버지의 친구들이나 남편 친구들이 집에 와 유숙하고 밥을 먹는다. 없는 살림에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 첫딸과 둘째 딸을 부지불식 간에 전염병으로 잃는다. 한때 아이들을 따라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내의 도리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을 위해 살 수는 없었다. 두 딸을 잃고 나서도 조 여사는 3남매를 낳아 굿굿하게 키운다. 그런데 한계적 상황이 다가온다. 우당 선생이 1932년 옥사하고 나서 갑작스레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자궁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에 들어와 치료를 받게 되자 의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자궁을 적출할 것인가, 이것은 간다한 치료방법이지만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된다. 또 하나는 자궁에서 종양만 적출해낼 것인가. 이것은 치료방법이 간단하지 않고 완치가능성도 적출에 비해 낮다. 하지만 완치되는 경우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다시 돌아간다. 조 여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것이 독립운동가의 아내의 또 다른 독립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요즘 세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선택이다.

“나는 의사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의사 말대로 치료가 쉽고 안전한 방법으로 가면 아이는 영영 더 낳지 못하고 2남 1녀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세상일 언제 어떻게 될지 알수 없지 않은가? 북경에서 두 아이 잃을 때 누가 예측이나 했나? 골똘히 생각했다.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밤에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나에게 일렀다. “치료하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고 견뎌서 아이를 계속 낳아야 한다. 그게 너의 희망이다. 아마 주명(남편)도 이를 바랄 것이다.”(374)

조 여사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답을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조 여사는 수술 뒤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더 낳는다. 그 아들이 바로 이종찬 회장이다.
 

1945년 11월 중경에 있던 임정요원들이 상해에 도착한다. 그때 공항에서 이종찬 회장 가족들이 김구 주석과 성재 이시영 선생 등을 환영한다. 사진 중앙의 김구 주석이 제법 포나는 양복을 입고 있다. 그 양복이 이종찬 회장의 아버지 이규학 선생이 마련해 준 것이다.오른쪽 눈물을 훔치는 이가 성재 이시영 선생이고 그 옆에 얼굴이 반쯤 가린 여성이 조계진 여사다.

 

우당의 아나키즘

우당의 아나키즘에 대한 설명도 나로선 새롭다. 나는 옛날부터 의문을 품은 게 있었다. 무장독립 투쟁을 하던 독립혁명가들의 이념 중 하나였던 아나키즘에 관해서다. 나는 아나키즘을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희구하고, 누구의 통치를 받기 보다는 스스로 통치(자치)하길 바라며, 자연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심성을 갖고 있다. 박홍규 교수(영남대)는 이를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3자주의라 했다. 나도 백번 동의하는 내용이다. 아나키즘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해방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당은 그의 출신성분상 삼한갑족이며 보황파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왕의 충성스런 신하였고 우당은 임금에게 직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이종찬 회장의 설명이 어느 곳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우당은 고종 승하 후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흐름에 빠져든다. 그것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던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족개량주의도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에 주목하며 독립은 단지 나라만을 뒤찾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있다고 보았다.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의 본질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독립운동은 이제 단순히 일본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새 나라를 통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인간을 해방하는 목표까지 달성해야 합니다. 나라만  되찾으면 무엇합니까? 외세가 물러난 뒤 또 다른 외세가 침략하든가, 아니면 찾는 나라 안에서 폭력적인 정치가 민중을 억압하면 나라를 찾으나 마나이겠지요."(290)

우당이 체득한 아나키즘은 독립된 국가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으로 이어지고 국가운영의 기본 방향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은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독립기념관 뜰에 새겨진 그의 어록을 들어보자. 그가 염원하는 조국은 이런 나라였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 지방자치체의 연합으로서 중앙 정치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296)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것들

이 책은 역사학자가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쓴 학술적 독립투쟁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이종찬 회장이 어머니 생전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구한말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연구되어 온 독립운동사에 기초해서 조 여사의 삶이 객관적으로 조명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책 여기저기에 조 여사가 생전에 자식들에게 이야기한 것들이 배치되어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나게 된다. 그 중 내 눈에 들어온 몇 가지만 보자.

구한말 이야기 중에서 발견한 것인데 갑신정변(1884) 당시 개화파로 이름을 올린 서재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바로 이부분이다.

“갑신정변 때 갓 스무 살로 사관에 불과했는데 성상 앞에서 아버지뻘인 한규직, 이조연 대시을 단칼에 살해하고, 또 민씨 일족이라고 민태호, 민영목을 처단했다. 임금 앞에서 무엄하게 칼자루를 잡고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서재필이 10여 년 만에 귀국하더니 미국인 안내를 데리고 완전히 미국인 티를 내면서 임금과 악수하자고 하고 맞담배질을 하는 꼴을 보고 아버지는 괘씸하게 여겼다.”(73)

진짜 서재필이 저런 정도의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미국 의사이자 독립신문의 주역으로 알려진 서재필이 인간의 기본이 안 된 방약무도한 자였다는 것인데, 이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에피스도는 100% 믿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1945년 11월 해방이 되고 중경의 임정요원들이 환국을 할 때 김구 주석과 이시영 그리고 조완구 선생이 입은 양복의 출처다. 당시 임정요원들에겐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깨끗한 양복 한 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 여사의 남편 이규학 선생이 김구 주석 등 3인 임정요원들에게 양복을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일을  조 여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11월 5일, ... 태극기를 들고 우리 가족은 비행장으로 갔다. ...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리고 장대한 백범 선생이 먼저 내렸고, 뒤이어 이시영 옹이 내렸다. ... “만세!” 이시영 옹은 아드님과 조카 가족들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순간 무엇보다도 세 분이 입은 양복이 주명이 정성스럽게 보낸 것임을 확인하고 기뻤다.“(416)

 

또 다른 눈으로 이 책을 보면

전문 사가가 아닌 나로서는 우당 가문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의 객관적 진실성을 가려낼 능력이 없다. 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 밀사들이 가지고 간 위임장에 새겨진 황제의 어새가 진짜가 아니라 우당이 고종의 윤허 아래 모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고종 황제가 3.1 만세 운동 이전에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했고 그가 독살되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소개한다. 모두 아직은 역사학계에서 사실로 공인되지 않은 것들로 알고 있지만 흥미로운 주장들이다. 이런 주장은 모두 이 집안이 왕가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고종 승하 이후 이 집안이 보황파에서 새로운 길을 걸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조선 왕조에 대한 아련한 동경을 발견한다. 회고록의 화자인 조계진 여사가 구한말 왕가와 연결된 특수한 신분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때에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수한 신분적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은 사람들이지만 부지불식 간에 과거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나만이 발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이 책은 이종찬 회장이 필생의 집념으로 쓴 어머니의 자서전(子敍傳)’ 으로 보기 드문 죽은 자의 회고록이며, 살아 있는 아들이 쓴 사모곡이다. 나아가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세상 모든 이에게 20세기 한국이 어떻게 외세로부터 독립하였는지를 알리는 귀중한 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 (2025.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