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와 그의 사단이 ‘반일 종족주의’에서 강제징용과 함께 대한민국 반일 종족주의의 극단적인 예로 제시하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이교수는 위안부 장을 다룬 총 120쪽 글에서 80쪽이 넘는 양을 직접 쓰고 있다. 그만큼 위안부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를 주장하는 그에겐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이영훈 교수의 관점
이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국내외에서 형성되어 온 성노예로서의 위안부(그러므로 이를 운영한 일본군은 국제범죄의 당사자가 됨)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교수가 위안부를 보는 관점을 그의 글로 직접 확인해 보자.
“저는 위안부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당시의 제도와 문화인 공창제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을 일본군의 전쟁범죄로 단순화하고 줄기차제 일본의 책임을 추궁한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였습니다.”(337)
이교수는 위안부가 일제 강점기에 공식적으로 존재했던 공창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위안부의 성격규정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301)
나아가 그는 위안부를 전 근대의 남성 중심의 착취적 성문화와 연결시킨다. 즉 그는 위안부의 뿌리는 조선시대 기생제이며 그것이 일제강점기의 공창제로 나아가 해방 이후엔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군 위안부 형태로 이어졌다고 한다.
“기생제, 공창제, 위안부제는 본시 역사적으로 한 계보였습니다.”(291)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위안부 제도는 1960년대까지 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형태로 건재했으며, 오히려 발전하였습니다.”(273)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가 당시의 성문화의 군대식 표현에 불과하고, 공창제를 범죄시 할 수 없었다면 위안부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수 십 년 동안 제기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교수(또 그의 사단)가 사용하는 집단적 광기로서의 민족주의, 반일 종족주의가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밑바닥에는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종족주의적 적대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271)
......
나의 비판
이교수의 관점은 대한민국의 인권운동이 중심이 되어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아 온 전시 성노예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문제의 초점은 일본군 위안부를 당대(193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에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허용되어 온 공창제(이것은 지금도 많은 나라가 시행하고 있음)와 본질적으로 같은가 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위안부를 공창제로 이해하는 것은 어불성설
공창제가 비록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과 일본군 위안부는 그 성격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공창제에서도 인신매매에 희생되어 성매매업에 종사한 여성이 있지만, 그것(인신매매)은 그 당시에도 범죄에 해당되었다. 본질적으론 근대사회의 공창제는 성매매업을 허용하면서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권리보호와 국민의 보건 위생을 위해 국가가 그 관리 운영에 간섭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인신매매를 허용하면서까지 성매매업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는 없다.
그런데 위안부는 어땠는가. 많은 경우가 이교수도 인정하는 것처럼 기망에 의해 전장의 위안소로 갔고 거기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굶주린 병사의 성노리개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신매매 이상의 범죄가 저질러졌음에도 국가는 방관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주도했다. 도저히 공창제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근대의 공창제는 민간이 운영하는 성매매업에 국한된 것이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일본군 위안부는 민간이 위안부를 모집하고 운영하는 데 역할은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일본군 곧 국가이었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군인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위안소 운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이를 국가권력을 이용해 시행했다. 다른 말로 말해 국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것이다. 더욱 그 운영방법은 폭력적이었고 위안부 개인의 인권은 (대부분)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것은 이 책에서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위안소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습니다. 군이 직접 설치하고 운영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민간 업소를 군 전용의 위안소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형태였습니다. 어느 경우든 위안소의 운영은 군의 세밀한 통제 하에 놓였습니다.”(302)
일본군 위안부의 반인권적 처우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이미 시인된 내용이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93년의 고노담화인데, 이 책은 그 내용까지도 이렇게 소개한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되었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있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그를 담당했지만, 이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한 사례가 많이 있었으며, 당시 관헌 등이 직접 모집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또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 상황에서 처참한 것이었다.”(356)
사실이 이럼에도 이 교수가 위안부를 공창제에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명백히 사실왜곡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미국 흑인노예도 백인남성을 사랑하기도 했다
이교수가 위안부의 삶이 노예적 삶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선에서 병사와 위안부는 어느 의미에선 한 덩어리의 운명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거칠게 짓눌러지기도 했지만, 남녀가 살을 섞는 관계이기도 하였습니다. 위안부를 사랑한 병사도 있었고, 병사를 사랑한 위안부도 있었습니다. ... 위안부라 하지만 생활실태에서나 정치의식에서 심리 감정에서 무권리의 노예상태는 결코 아니었습니다.”(326)
이것은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어느 구절을 연상시키는데(참고문헌 목록을 보면 이 책이 나옴), 살아남아 투쟁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겐 머리를 들고 말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나는 저 대목에 대해 특별한 반박을 하기 보다는, 몇 글자만 바꾸어, 미국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제 하에서 사랑을 주고받았던 어느 백인과 흑인의 이야기로 돌려주고 싶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노예제도 하에서도 백인과 흑인노예는 어느 의미에선 한 덩어리의 운명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거칠게 짓눌러지기도 했지만, 남녀가 살을 섞는 관계이기도 하였습니다. 흑인 여성노예를 사랑한 백인도 있었고, 백인을 사랑한 흑인노예도 있었습니다. ... 흑인이라 하지만 생활실태에서나 정치의식에서 심리 감정에서 무권리의 노예상태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정대협에 대한 비판, 도를 넘었다
정대협(현재 명칭 정의기억연대)은 지난 30여 년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했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끌어내 세계의 양심에 호소했다. 그 결과 전시 성노예라는 개념이 국제범죄로 재정립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이 책은 정대협의 이런 활동을 철저히 무시하고 폄하하며 나아가 반일 종족주의로 낙인을 찍는다.
“정대협은 그들의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의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원 위안부들을 앞세운 시위를 줄기차게 벌여왔습니다.”(337)
“정대협, 그 이름을 바꾼 정의기억연대는 실상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로 일본을 무릎 꿇리려 해 왔습니다. 2015년 박근혜-아베 합의는 과거보다 진일보한 것이었는데도 역시 걷어찼습니다. 문재인 정권도 똑 같은 입장이죠. 진정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이 문제를 이용해서 한일관계를 파탄 내는 게 이들의 진짜 관심사일 것입니다. 한미일 삼각협력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요.”(373. 이 부분 집필은 이영훈 교수가 아니라 이영훈 사단의 주익종 박사임)
아무래도 이것은 과도한 비판이다. 정대협의 관심사가 한일관계를 파탄 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데, 한국인이 쓴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난다는 게, 나로선 경이로울 뿐이다. 나도 일정 기간 정대협에 관여했지만 무슨 억하심정으로 한일관계를 파탄낼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말인가. 정대협으로선(정대협을 지원한 사람들로선) 모욕 중의 모욕이다. 소송사태가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저자들이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책과 인생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언론인터뷰- (1) | 2023.12.03 |
---|---|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4) | 2023.11.24 |
‘반일 종족주의’ 과연 읽을 만한 책인가 (0) | 2019.08.23 |
8번이나 이름이 바뀐 도시, 리비우-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한 죄의 기원- (2) | 2019.04.26 |
미국 건국의 진정한 일등공신, 알렉산더 해밀턴 -베개 같은 책 <알렉산더 해밀턴>을 읽고- (4) | 2018.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