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역사

삶은 단순하게, 생각은 깊게

박찬운 교수 2023. 12. 9. 05:06

(아래 글은 내 책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의 후기이다. 이 책이 어떤 삶 속에서 나왔는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단순하게, 생각은 깊게

 
나의 삶은 단순하다. 그렇지만 생각은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삶은 단순하게, 생각은 깊게’ 이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나는 일과가 끝나면 대체로 곧장 귀가해서 잠시 운동을 한 다음 하루를 정리하고 바로 취침(10시 전)에 들어간다. 5-6시간 잠을 잔 다음 새벽 4시 전에 기상해 하루를 시작한다. 맑은 머리로 두 시간 이상 독서와 글쓰기를 한다. 6시가 되면 부엌에 나가 과일샐러드를 만들고 빵을 구운 다음 우유나 커피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8시 출근. 주말에는 주변 산책을 하고 잘 가는 카페에 가서 카페라테 한 잔을 마신다. 이것이 나의 일상사다. 과거에는 각종 모임에 얼굴을 비추기도 했지만 학교로 직장을 옮긴 2006년 이후에는 가급적 모임에 나가는 일을 삼가고 단순한 삶을 즐긴다. 너무 단조롭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즐겨하니 저런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가도 배낭을 짊어지고 전국 여기저기로 혹은 방학이 되면 해외로 나간다.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자연도 많이 보지만 나는 주로 인간이 만든 도시 문명을 관찰한다. 수천 년 전 혹은 수백 년 전 만들어진 건축물을 보면서 인간의 위대함에 탄성을 지르고 인류문명의 흐름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주말에는 산책을 즐기며, 방학에는 긴 여행을 떠난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게 준 복이다. 다만 나는 이런 복을 나만을 위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읽은 책, 내가 다녀본 곳을 기록해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미력이나마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갖고 살도록 도왔다. 이런 일은 내 체력과 지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인권위에서 일한 3년은 내겐 무척 바쁜 일상이었다. 나의 이런 단순한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물론 퇴근 이후와 주말은 저 루틴한 삶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머릿속에 일이 있으니 지속적으로 독서하기가 어려웠다. 학교에 있으면 강의 준비와 수업을 제외한 시간에는 주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일주일이면 꼭 책 한 권은 읽었는데 인권위 근무 이후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영화다. 마침 인권위에 가기 전부터 넷플릭스에 가입해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터라 집에 돌아오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영화를 보았다. 주말이나 연가를 내서 종일 쉴 때는 몇 편을 몰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본 영화가 지난 3년간 수백 편에 이른다. 고전에 가까운 명화부터 헐리웃 액션영화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미드 혹은 영드까지 수많은 영화를 보았다. 이것의 나의 인권위 3년의 또 다른 면모다. 비록 이 기간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한 번도 제대로 못 했지만 나는 이렇게 일과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 내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했다.

이제 나는 다시 절간 같은 연구실로 돌아왔다. 3년 이상 비워둔 연구실의 먼지를 닦아내고 이미 구형이 된 컴퓨터를 교체한 뒤 새로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이곳에서 또 몇 년을 지내다 보면 내게도 정년이라는 게 다가온다. 공적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또 어찌 보면 크게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시간만 간 것 같다. 정년 후 내가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때가 되면 내 인생 전체를 다시금 되돌아볼 날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삶이 역사라는 생각을 일찍이 했기에 나는 대학 시절 이후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일기를 열심히 썼고, 한 시기를 보낼 때마다 내 일과 삶을 정리해 놓았으며, 먼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기를 썼으니 나로선 인생 회고라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인권위 3년의 기록은 내 일상의 기록을 넘어 공적 업무를 담당한 공직자의 자세로 쓴 것이었다. 비록 이 책에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내가 기록한 것 중 일부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말하고 싶었고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훗날 회고록을 쓸 기회가 오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수없이 하면서 살고 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수많은 일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결과만 알뿐이다. 그것도 단 며칠만 지나면 뇌리에서 사라지고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통해 ‘일과 삶의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매일 경험하는 것이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나 이 기록의 책이 나의 우둔함을 감추고 성실함만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만일 그랬다면 기록하는 과정에서 내 주관적 판단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란 모든 현상을 복사하듯 완전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쓰는 이의 선택적 기록이 아닌가. 내 ‘일과 삶의 역사’도 그런 한계가 없을 수 없다. 독자 제현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