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기타

신원권(伸冤權)과 국가의 의무

박찬운 교수 2023. 12. 12. 05:37

그림 '시사 IN' 기사 중에서

 

사람이 살다보면 원통한 일이 많다. 그 중에서도 내 피붙이가 어떤 사고(재난)로 갑자기 눈에서 사라졌는데 그 시신마저 찾지 못한다면 그 원통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정황으로보면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장사도 치르지 못하고 망연자실 이제나저제나 하늘만 보며 살아야 한다. 시신이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고이 장사를 지내고 죽은 자의 명복을 빌어줄텐데 그것을 못하니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신원 (伸冤) 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 한자 뜻을 들여다보면  '원통함을 풀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애도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죽은 이를 생각하며 마음 속의 애절함을 푸는 것.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사람과 영원한 작별을 한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그 슬픔의 충격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간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죄의식에서 헤매게 된다. 

나의 인권위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 문제를 개인의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국가의 의무 문제로 심각하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일명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심의하던 때이다. 나는 당시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전원위에서 쟁점이 된 안건은 스텔라데이지호 사건. 2017년 남대서양 심해에 선박이 침몰되어 한국인 8명을 포함해 22명이 실종되었다. 이 사건에서 정부는 1차 수색을 해 선박과 유해 일부까지 발견했지만 유해를 수습하는 것을 포기했다. 유족들이 4년 간 유해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사무처의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 내용은 각하(진정원인사실과 유사한 손해배상청구사건이 현재소송 중이라는 이유) 후 2차 수색이 필요하다는 의견표명. 나도 지난주 사무처로부터 사전 보고를 받을 때는 그런 정도에서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말에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월 열린 토론회 자료를 받아 읽어본 후 생각을 바꿨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세월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에서 우리 국민은 국가에 대해 생명권, 애도권, 신원권을 주장할 수 있고, 국가는 그 보호(존중)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정부의 조치는 그 보호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1차 수색과정에서 유해를 발견했음에도 그것을 수습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대한 직무유기다. 여러 가지를 검토하면 이 사건은 인용하고 그에 맞는 2차 수색을 권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나는 전날 밤 발언문을 작성해 회의 전에 위원들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내 의견이 다수를 얻지 못했다. 중요한 안건 그 중에서 법리적 다툼이 있는 안건을 심의할 때 활발한 토론을 하기 힘들다. 이것이 인권위의 현실이다. 결국 나는 반대의견을 쓰기로 하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2021. 8. 24)

 

사무처 의견대로 이 사건이 기각되자 나는 반대의견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 의견에 동의한 문순회, 서미화, 석원정 위원이 반대의견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반대의견을 통해 재난 시 국민의 기본권이 무엇이며 국가는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오늘 아침 이 사건 결정문 말미에 붙은 나의 반대의견을 꺼내 읽어본다. 신원권에서 국가의 의무는 무엇일까? 어떤 때 이것은 개인을 넘어 국가의 관심사가 될 것인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가족의 애절한 마음에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


반대의견


인권위원 박찬운, 문순회, 서미화, 석원정은 이 사건을 각하하면서 2차 수색의 필요성은 있다고 국무총리에 대하여 의견표명을 한 다수의견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한다.

이 사건은 위원회의 의지에 따라서 각하결정, 기각결정, 인용결정 어느 것도 가능한 사건이다. 민간영역에서 발생한 재난사고에서 국민의 기본권과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우리 4명의 위원은 이 사건에서 위원회가 보다 적극적인 입장에서 결론을 내고 그에 맞는 권고를 정부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민간영역에서 발생한 재난사고이고, 그것도 지구 반대편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발생한 선박침몰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인해 22명(우리 국민 8명 포함)이 실종되었지만, 현재까지 우리는 이 재난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실종자들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사고가 다른 심해 재난사고와 차이가 나는 것은 침몰된 선박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과 조금만 노력하면 침몰사고의 원인과 유해(혹은 유품)의 수습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수의견은 국가인권위원회법 해석상 부당한 결론은 아니다(인권위에 진정이 접수된 후 진정원인 사실과 동일한 소송 등이 진행될 때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2조제3항 및 제1항 제5호에 따라 각하할 수 있으나 이것은 필요적 각하가 아니고 인권위에 재량이 부여된 재량각하임). 더욱 진정인 들의 요구가 2차 수색의 필요성을 인권위가 인정하고 정부에 그 뜻을 표명해 달라는 것이라면 진정취지에 부합하는 결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한다는 인권위의 설립목적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인권위가 이러한 결론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권위의 결론은 단지 2차 수색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정부에 표명하는 것을 넘어 그 전제로서 왜 2차 수색을 정부가 해야 하는지를 인권적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 이 사건 수색과정에서 우리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이 무엇인지, 국가가 그 인권을 제대로 보장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그리고 국가의 기본권보장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해석에 의해 국민의 생명권이란 기본권이 나오며 국가는 이를 존중하고(작위·부작위의 방법으로 직접적으로 생명권을 침해하지 않을 의무) 보호하고(제3자가 생명권을 침해하고자 할 때 이를 보호할 의무) 증진할 의무(생명권의 실질적인 신장을 위해 국가가 가용자원을 동원해 일정한 행위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에 터 잡아, 국가는 국민의 생명이 재난으로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신속하게 재난현장에 국가의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 우리 헌법은 이 생명권 보호를 재난상황에서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제34조 제6항에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고,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생명권 보장의무는 국내법적 효력을 갖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6조에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고, 동 규약 제2조제3항에 따라 이 권리가 위험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체약국은 효과적인 구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에서 비롯되는 생명권은 산 자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유족의 권리와도 관계가 있다. 유족은 죽은 자와 가족공동체를 이루며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받고 행복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재난으로 가족이 사라진 경우, 유족의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유해를 찾아야 하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죽은 자와 유족의 가슴에 묻힌 한이 풀리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권리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원(伸冤)권 혹은 애도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 이들 권리도 우리 헌법 제10조에서 연원하는 기본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우리 정부는 국민의 생명권 보장(존중의무)과 유족의 신원권 및 애도권을 보호하는데 충실했는가? 물론 정부는 50억 원이라는 예산을 들여 지구 반대쪽 바다를 수색했고, 그것은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일이니, 그 정도만으로도 국가의 책무는 다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역량에 비추어 정부의 노력은 매우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의 책임은 재난이 영해에서 일어나든 원양에서 일어나든 본질적으로 동일해야 한다. 이 사건의 국가의 책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세월호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사건에서 정부의 대응은 부실했지만, 천문학적 돈을 써서 유해를 수습했고 침몰된 선박을 인양했으며, 그 특별법을 만들어 사고원인을 밝히려 노력했다. 그 노력은 사고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재난사고에 대한 국민의 생명권, 신원권, 애도권 등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조치였다. 세월호에서 보여준 국가의 책무가 이 사건에서 유사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부는 1차 수색과정에서 수중에서 발견된 유해추정물체마저 수습하지 않았고, 그 이유는 수색회사와의 계약에서 유해수습에 대한 사항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구조된 선원들은 한국 선원들이 침몰 전에 조타실에 모여 있었다고 말했고, 그 조타실은 1차 수색과정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게 확인되었으나, 수색된 적이 없다. 나아가 1차 수색과정에서 많은 사실들이 유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유족들은 정부의 대처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더욱 1차 수색과정에서 회수한 VDR(항해기록저장장치) 마저 데이터를 온전히 추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이 사건 실종자들과 유족들의 기본권은 결과적으로 침해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민간영역에서 일어나는 해난사고에서 완벽하게 구조하고 원인을 밝히고 침몰선박을 인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의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저버리는 입장이다. 정부는 재난으로 선박이 침몰되어 국민이 수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엔 이유 불문 신속하게 재난현장으로 가서 사람을 구조하고, 유해를 수습하고, 침몰원인을 밝히고, 유족들에게 그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야 한다. 더욱, 재난사고가 원양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국가의 책무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원양에서 일어난 재난사고에서 국가가 아니면 누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돈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돈은 침몰원인이 선사에게 있다면 구상권의 법리로도 나중에 해결할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바로 그 예가 아닌가.

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인권위는 정부가 이 사건 재난사고에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인용결정)하고 2차 수색을 해야 한다는 권고를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불가침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인권위다운 권고라고 믿는다.

 

(이글은 내 책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에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