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9 내 친구 빈센트 반 고흐를 찾아 프로방스를 가다(1)

박찬운 교수 2016. 11. 15. 04:22

영국이야기29


프로방스, 내 친구 빈센트 반 고흐를 찾아 (1)

-고흐의 숨결이 살아 있는 아를-





아를 시내 한 가운데 있는 공화국 광장



국내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외국에 있어도 마음이 편칠 않다. 나도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럴 때는 어딜 여행한다는 게 꽤나 신경 쓰인다. 나 혼자 유유자적하는 것 같아 여러 사람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여행! 나는 누구에게 어딜 간다는 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런던을 떠났다. 


프로방스 아를! 거긴 내가 런던에 있는 중에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으로 일찌감치 점찍어 놓은 곳이다. 2년 전 페이스북에 <반 고흐 그림이야기>를 연재하면서도, 1년 전 그 글을 모아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를 출간할 때도,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고흐가 10년이란 화가생활을 하면서 2년을 보낸 프로방스를 가보지 못하고 글을 썼다는 점이었다. 고흐가 남긴 900여 점(드로잉을 뺀 수치임)의 그림 중거의 절반이 프로방스에서 그려진 것인데, 그곳을 가지 않고 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꼭 뭔가를 빠트린 듯 허전했다.


그 글 어딘가에서도 말했지만 언젠가 꼭 고흐의 흔적을 찾아 그가 머물었던 아를과 생레미를 가 볼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해서 오래 동안 준비된 여행이 공교롭게도 정국이 혼미에 혼미를 거듭할 때 이뤄진 것이다.



아를역은 과거나 지금이나 작은 역이다. 이제 건물은 신식 건물이지만 단촐하기 그지 없다. 한국이라면 간이역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고흐는 바로 이 역을 통해 아를에 도착했다



고흐는 1888년 2월 어느 날 파리에서 따뜻한 고장, 빛이 많은 동네를 찾아, 그곳에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아를에 도착했다. 


계산해 보니 내가 아를에 도착한 것은 고흐가 이곳에 온지 만 128년만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고흐가 도착한 아를역은 지금도 그 자리에 모습만 바꾼 채 그대로 있었다. 역사를 나가니 이미 관광 시즌이 지난 후라 그런지 역전 광장은 썰렁했다.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순간 고흐가 아를역을 도착했을 때를 그려보았다. 


고흐가 아를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릴 땐 프로방스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인줄 알았던 프로방스에 하얀 눈이라! 푹푹 빠지는 눈을 밟고 그는 역에서 시내로 향했다. 그곳에서 3-4백여 미터를 가면 라마르틴 광장. 고흐는 광장 근처 여관에서 며칠을 머문 다음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한다. 이름하여 노란집!


나는 그 노란집을 떠올리며 시내로 향했다. 내 눈에 들어올 노란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보니 그 집은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아를에서 영원히 사라졌던 것이다. 노란집이여, 안녕! 마음이 휑해졌다.




아를의 노란집(1888)




.고흐의 노란집이 있었던 라마르틴 광장, 노란집은 사진 속의 큰 나무 뒷 쪽이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시내로 나갔다. 아를은 아담한 도시다. 마음만 먹으면 도시의 어떤 곳이라도 20-30분 내에 갈 수 있을 정도다. 처음에는 지도가 필요했지만 두어 시간 돌아다니다 보니 그것 없이도 아를 시내를 돌아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어느 골목을 들어가도 조금만 더 가면 좀 전에 지나쳤던 바로 그 거리다. 


고흐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론강은 어딘가? 호텔 앞 대로인 리세 거리를 산책하듯 걸어 내려가니 강이 나타났다. 제법 큰 강이다. 수량도 풍부하다. 저 멀리엔 선착장이 있고 유람선 몇 척이 정박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 위로 들어섰는 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그게 트린케타이에라는 다리다. 아, 고흐가 이 다리를 배경으로 몇 장의 그림을 그렸지! 바로 그 다리!




트린케타이에 다리(1888). 다리 오른쪽 아치부분을 잘 보고 아래 사진을 보라.




트린케타이에 다리 입구, 고흐는 이곳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트린케타이에 다리에서 보는 론강



론강을 보고나니 발길은 자연스레 시내로 향했다. 고흐 그림 중 대표작 중 하나인 <밤의 노란 테라스 카페>의 배경이 된 그 카페와 그 광장이 생각났다. 관광안내소에서 준 지도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 그림의 배경이 된 포룸 광장을 찾았다.(참고로 아를 관광안내소에 가면 일본어 안내서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보면 고흐의 흔적을 표시해 놓은 지도가 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고흐를 좋아하는 지 이 안내서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포룸광장의 노란 테라스 카페는 지금도 성업 중이다. 그 이름도 이젠 '빈센트 반 고흐 카페'로 바뀌었다. 관광 시즌이 지나서 그런지 평일임에도 카페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잠시 카페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흐가 앉아 그림을 그렸을 곳을 찾아 포룸 광장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저녁 밥을 먹고 산책을 할 때도 일부러 이곳으로 나와 밤의 정취를 살폈다. 낮과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노란 테라스 카페에서 고흐가 느낀 정취를 직접 느끼고 싶었다,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의 한 부분을 꺼내 읽었다. 나는 언젠가 고흐에게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나도 아를의 포럼 광장을 걸어볼 거야. 하늘 별이 반짝일 카페 테라스에 앉아 고흐를 기다릴 거야. 가로등불도, 거리도, 사람들도 모두 노랗게 빛날 , 나의 친구 고흐는 내게로 다가와 옆에 앉겠지. 나는 그곳에서 그가 즐겨 마시던 압센트를 마시며 밤새도록 별을 거야, 그리고 그의 그림과 우리들의 인생을 이야기할거야.




밤의 카페 테라스(1888)




낮에 보는 노란 테라스 카페




밤에 보는 노란 테라스 카페




노란 테라스 카페가 있는 포룸 광장



아를 사람들의 자부심은 무엇일까? 추측건대, 자신들을 프로방스 최고의 로마인 후예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 유럽 사람들은 고대 로마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사는 도시가 로마제국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자랑한다. 내가 보기엔 아를도 마찬가지다.


아를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원형경기장과 그 주변의 원형극장이다. 원형극장은 하나의 유적으로만 보존되고 있지만 원형경기장은 지금도 투우경기나 음악회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여기다. 


과연 대단하다. 거의 2천 년 전의 건축물이 이렇게 남아 있다니. 규모는 로마의 콜롯세움에 비해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지금의 아를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경기장이다. 2천 년 전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물이다. 아를 사람들의 자부심의 원천이 될만한 충분한 문화유적이다.


고흐는 이 경기장을 배경으로 작품 하나를 남겼다. 투우경기가 열리는 어느 날 그는 지인들과 함께 이곳을 찾는다. 투우경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함성이 그림을 보다보면 들리는 것 같다. 고흐에겐 투우보단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림 좌측에 양산 쓴 두 여인이 보인다. 오른쪽 여인이 바로 지누부인, 고흐가 단골로 다녔던 카페 주인이다. 




아를 원형경기장의 투우경기(1888)





아를 원형경기장. 지금도 이 경기장은 사용된다. 투우경기가 열리며 음악회 등에도 사용된다.



아마도 아를 시내에서 고흐의 흔적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고흐가 1888년 말 자신의 귀를 자르는 엽기적 사건을 일으키고 들어간 정신병원일 것이다. 이 정신병원의 원래 이름은 Hôtel-Dieu-Saint-Espiri라는 이름을 가진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고흐가 들어갈 때도 이미 3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지금도 건물 입구엔 원래의 병원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곳에서 그는 젊은 의사 레이를 만나 치료를 받는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고흐 인생에선 이곳에서의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중 하나였다. 시내 한 가운데 요양소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것은 자유를 아는 사람에겐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에너지는 식을 줄 몰랐다. 그는 환자로 입원했지만 이곳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록 몸은 정신병원에 있지만 그에게 있어 그림은 하나의 종교였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를 수 있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고흐가 이곳에서 그린 그림 중 대표작은 건물 중앙 정원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그림에 나오는 정원의 지금 모습은 어떨까? 신기하게도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그림 속에 나오는 왼쪽의 큰 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성성하다. 마치 100년 이상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다. 고흐가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아를 정신병원 정원, 1889년 초




아를 정신병원 내부. 정원 앞에 고흐의 그림을 세워 놓고 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왼쪽의 큰 나무가 지금도 성성하게 살아 있다.



고흐가 입원했던 아를 정신병원



흐가 아를에 있는 1년 동안 그린 그림의 수가 무려 200점(여기에 100점 가까운 드로잉과 수채화를 그렸음)에 가깝다. 거의 하루 혹은 이틀에 한 점씩을 그린 셈이다. 10년 화가 생활 중 가장 정력적으로 그린 기간이다. 고흐의 전매특허인 임파스토 기법을 완전히 마스터한 시점이기에 어떤 그림을 보아도 고흐의 힘찬 필치와 그 두터운 물감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 그림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그림 중 하나가 <별이 빛나는 론강>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내 연구실 출입문에 붙여 놓고 있다. 내 방을 들어오는 모든 방문객은 고흐의 이 그림을 보고 들어온다. 가끔 나는 방문객에게 물어본다. 들어오면서 뭐 본 것 없느냐고. 만일 그가 "예? 본 거 없는 데요."라고 말하면 필시 나로부터 한 마디 듣는다. "이따가 나갈 때 한 번 꼭 보고 가세요." 


아를에 가기 전부터 나는 이 그림을 그가 어디에서 그렸는 지 꼭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지도에는 분명하게 이 그림을 그린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바로 고흐가 살았던 라마르틴 광장 근처의 강변이다. 그곳엘 가보니 고흐의 이 그림이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다. 고흐를 만난 듯 감회가 새로웠다. 아, 바로 이곳에서 고흐는 그 쏟아지는 별들을 보았구나! 아, 이곳에서 그 때 한 노부부가 고흐 앞을 지나가고 있었구나!




 별이 빛나는 론강(1888년 9월), 회화 역사상 예를 찾기 힘든 풍경이다. 밤은 고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먹만한 별이 뿜어 내는 , 마을의 불빛이 연출하는 론 강의 그림자, 속을 유유히 걸어가는 노부부.아무 것도 표현할 없을 같은 밤도 이렇게 그려 놓으니 다른 세계다. 아늑하고 포근한 별세계!




바로 이곳이 고흐가 <별이 빛나는 론강>을 그린 곳이다. 그림을 보면서 론강을 바라다보니 내가 마치 고흐가 된 기분이었다.




밤의 론강이다. 대안의 불빛이 론강에 반사되면 고흐가 그린 위 그림의 빛 반사가 낭만적이지만 매우 사실적인 묘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틀 동안 아를에 머물면서 나는 가급적 느린 걸음으로 도시 곳곳을 둘러보았다. 내 머리속은, 고흐가 화구를 들고 이곳을 어떻게 걸었을까, 어떤 위치에 앉아 그림을 그렸을까 ...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내를 걷다보니 아를 교외를 나가보고 싶었다. 교외에서 바라다보는 아를은 어떤 모습일까. 고흐가 시내를 벗어나 아를 외곽에서 그린 <랑글르와 도개교>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그 다리는 아직도 잘 있을까? 관광안내소의 여직원에게 랑글르와 다리에 대해 말하니 신기한듯 나를 쳐다보며 그 다리는 원래 자리에 없다고 말한다. 운하 공사로 인해 불가피하게 도개교를 없애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도개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그래 좀 멀다손치더라도 그것을 안 볼 순 없지 않은가. 차를 타고 가라는 권유에도 나는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게 아닌가. 관광안내소를 출발한지 무려 한 시간... 드디어 눈에 익은 도개교가 나타났다. 나의 끈기도 이 정도면 대단하다. 고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가 이런 것일 게다.






아를이 보이는 꽃이  과수원(1889년 4월)





랑글르와 도개교(1888)





랑글르와 도개교(위)와 그곳을 찾아 가는 길(아래). 아를 시내에서 멋 모르고 찾아간 길,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덕분에 아를 주변의 전원풍경을 원 없이 보았다.



아를 시내 어디를 가도 고흐의 흔적이 없는 곳은 없다. 건물, 골목길, 공원 그 어디에서도 고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정원이나 공원은 고흐에겐 여지 없이 좋은 풍경화의 대상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꽃밭을 그렸고, 나무를 그렸고, 나무와 어울어진 동네 사람들을 그렸다. 그리고 틈만 나면 화구를 메고 아를 교외로 나가 전원풍경을 그렸다. 아름다운 밀밭, 과수원, 멀리서 바라다보이는 아를 시내...


아를이란 곳을 가서 고흐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를을 그저 사진이나 찍을 관광도시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선 고흐를 느낄 수 없다.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라. 천천히 걸어라. 어느 골목에선 눈을 감고 고흐의 그림을 생각하라. 론강에선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라. 밤에 산책을 하며 시내를 걸어보라. 쏟아지는 별빛을 느끼며 이골목 저골목을 걷다보면 스스로 느낄 것이다. 내가 바로 고흐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를에선 적어도 그렇게 보내야 한다. 그게 바로 이 머나먼 땅에서 고흐를 만나는 방법이다. 그것이 고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다. 




시인의 공원(1888)




길이 있는 정원(1888)




아를 시내의 주요도로인 리세가 근처의 공원, 이 공원에 고흐는 자주 나와 그림을 그렸다. 위 그림들도 바로 그런 그림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