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4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박찬운 교수 2016. 10. 17. 05:14

영국이야기 24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템즈강 가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바라보며-

 

런던 템즈강 변 엠반크먼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오벨리스크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누구보다 센 사람이다. 내 성격상 선진국에 왔다고 주눅이 들 사람이 아니다. 나도 알고 보면 애국적이다.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 자랑하느라 입에 거품을 내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영국이야기를 하면서 마냥 영국 좋다는 소린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런던에 와서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솔직히 이곳이 부럽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진국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영국의 화려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우리의 그것들과 비교해서 낫기 때문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세계를 호령한 영국이 모아 온 그 수많은 예술품과 유물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을 비교하면서 우리를 자학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19세기 유길준을 넘지 못하는 유치한 서유견문을 쓰고 있다는 증거다.

 

부러움은 다른 이유에서이다. 역사를 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자세가 우리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세계인 데, 나는 그것이 못내 부럽다.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서럽기까지 하다.


역사를 잊지 말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문명국가의 기본이다. 새것이 항상 좋은 게 아니다.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을 안다면 오히려 오래된 게 좋은 법이다. Old is beautiful!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한다는 거다. 백 년 이백 년 아니 천 년 역사가 오늘 우리를 만든 것이다. 과거를 버리지 말고 가급적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단절의 역사 속에 산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우린 과거의 흔적을 너무도 고의적으로 지워버렸다. 그 결과 우린 과거 없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20세기 후반에 갑자기 나타난 별종의 나라다. 백 년 혹은 이백 년 전의 과거가 내게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역사가 저 고조선의 상고사와 비교하여 무엇이 다르랴. 


과거에 대한 기록은 과장 없이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과거는 영광과 애환의 역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 어느 한쪽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그 역사를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부끄러운 역사는 우리의 역사에서 애써 지우려고 한다. 그런 속에서 불필요한 역사논쟁이 나온다. 쓸데없는 민족주의가 보편의 세계역사를 만들지 못하고 고립의 역사를 만든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논쟁은 바로 이런 천박한 역사관의 표현일 뿐이다.


 

영국박물관 근처 러셀 체임버, 버트런드 러셀이 이곳에서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살았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 이제 런던을 거리를 걸어 보자. 런던의 거리를 거닐다보면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 인물들이 살았던 흔적(, 철학자이자 평화운동가 버트런드 러셀은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역사적 인물이 방문한 흔적(,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60주년을 맞이해 이곳을 방문했다”), 역사적 건물이 세워진 배경(, “이 건물은 베드포드 공작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역사적 상징물을 세운 배경(, "이 조각상은 2차 대전 중 임무 수행을 하다가 사망한 소방관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등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런던은 가히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영국인은 이렇게 기록을 잘한다.

 

영국인들은 기록하되 반드시 과거의 영화만 기록하지 않는다. 영국에도 부끄러운 역사는 수없이 존재한. 런던탑(Tower of London)은 정치적 반대자들이 고문 받고 죽어간 흔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영국인들은 그 감옥에서 어느 수감자가 죽어가면서 돌 벽에 몇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을 일일이 유리판 아래에 특별히 보존하고 있다. 또한 필설로 옮기기 어려운 고문기구를 전시하고 거기에서 끔직한 고문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런던탑의 전경(위)과 런던탑 내에 있는 죄수의 방에서 발견된 글씨. 튜터왕조 시절 런던탑은 악명높은 정치범 감옥이기도 했다. 이곳에 같혀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처형된 유명인사는 수를 셀 수가 없다.


부끄러운 역사가 사오백 년 전 튜더왕조나 스튜어트 왕조 때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근대국가 이후 영국은 제국주의의 왕초국가였다. 그 시절 그들은 식민지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한 역사도 박물관 어딜 가도 그저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광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수치의 역사도 있었다고 기록하는 것이. 이게 바로 영국인들이 역사를 기술하는 자세다.

 

오늘 나는 특별한 역사현장을 찾아 나섰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라 불리는 오벨리스크.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집트 고대역사에 관심이 많다. 몇 년 전 이집트를 여행하고 나서는 장문의 여행기를 써 나의 세계문명기행기 문명과의 대화’(2013년 출판)에 싣기도 했다. 세계 어딜 가도 이집트 문명과 관련된 유물은 내가 우선적으로 봐야 할 대상이다. 영국의 이집트 유물이야 영국박물관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지만 시내 한 가운데에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라니! 뭔가 더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과 그 양 옆의 스핑크스


엠반크먼트역에서 내려 빅벤을 등지고 템즈강 가를 걷다보니 바로 눈앞에 높은 탑이 나타났다. 바로 저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다. 높이 21미터, 무게 224톤의 거대한 화강암! 저렇게 크고 높은 돌이 하나의 돌이라니!

 

저 오벨리스크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0여 년 전 이집트 신왕조 18왕조 시절 투트모시스 3세의 명령에 의해 카이로에서 멀지 않은 신성한 도시 헬리오폴리스에 만들어졌다. 돌은 50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나일강 상류 아스완에서 온 것이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은 저것만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다. 쌍동이 오벨리스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두 개의 오벨리스크는 만들어진 후 2백 년이 지나 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에 의해 그 표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람세스의 업적이 상형문자로 각인된 것이다


이 두 개의 오벨리스크의 운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인 기원 전 12년 이들 오벨리스크는 알렉산드리아의 카이사레움(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위해 만든 신전)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얼마 후 이들 오벨리스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진이 일어났는지 알렉산드리아의 모래 아래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벨리스크를 잘 보면 기단 부분 4면에 까만 동판이 있는데, 그곳에는 이 오벨리스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근대 이후다. 1800년 가까이 모래 아래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이다. 이 중 하나가 영국으로 오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영국이 19세기 초 나폴레옹과의 전투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것에서 연유한다. 1801년 넬슨은 나일전투에서, 랄프 아버크롬비는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침으로써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1819년 이집트의 지배자 무하마드 알리는 영국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위 전투에서의 영국의 승리를 기념한다면서 영국에게 이 오벨리스크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오벨리스크가 영국으로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알렉산드리아 모래 바닥에 박혀 있는 것을 꺼내 배로 싣고 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톤이 넘는 거대한 돌을 수송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의 최선두 주자였던 영국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2천 년 전 로마인들은 어떻게 그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날랐을까? 지금도 로마에 가면 성베드로 성당 앞의 오벨리스크를 포함해 8개의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는데 모두 로마제국 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로 수송해 온 것이다! 로마인들의 기술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 흑동판엔 이 오벨리스크의 탄생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의 기부의사가 있고나서 60 여년이 흐른 1877년 드디어 이 오벨리스크는 영국으로 옮겨진다. 의사인 윌리엄 제임스 에라스무스 윌슨이라는 사람이 거금을 들여 이것을 운반해 온 것이다. 하지만 오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폭풍우를 만나 배(클레오파트라호)가 조난되자, 견인해 오던 배(올가호)의 선원들 6명이 클레오파트라호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구명정을 타고 나갔다가, 뒤집혀 모두 죽는 상황이 발생했다. 불행 중 다행은 배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이런 어려운 일을 겪고 이 오벨리스크는 런던항에 도착했고 마침내 1878년 템즈강 변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강을 바라보는 쪽 흑동판엔 이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가져올 때인 1877년에 희생된 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도 이 오벨리스크가 영국으로 올 즈음 이집트 정부에 의해 미국으로 기증된다. 뉴욕에 가면 메틀로폴리탄 미술관 근처 센트랄 파크에 가보시라. 오벨리스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런던의 그것과 쌍동이 관계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다.

 

런던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과 쌍동이 형제인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의 오벨리스크,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사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책을 찾아보면 쉽게 나오는 것이라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아니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오벨리스크를 런던에 세우고 난 다음 영국인들이 이것을 보존하는 방법과 자세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에 다가가 자세히 보면 그 사면엔 까만 동판 위에 뭔가가 쓰여 있는데, 거기엔 여기 런던까지 이 오벨리스크가 오게 된 사연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위에서 말한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그 정도라면 뭐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뭐가 더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 내용 중엔 이 운반을 기획하고 돈을 낸 에라스무스 윌슨과 운반과정에서 희생된 6명의 이름을 그대로 적어 놓았다. 돈 낸 이의 그 갸륵한 뜻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것이다그것뿐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기록이 나를 감동시킨다

 

런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오른쪽에 있는 스핑크스(위), 스핑크스의 기단을 보면 많은 흠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1차 대전 중 독일군의 공습으로 입은 상처다. 그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설명문(아래)


오벨리스크를 잘 살피니 아랫부분에 여기저기 흠이 보인다. 이곳에 설치된지 140여 년이 지났으니 그 정도의 흠이야 당연한 게 아닌가? 아 그런데, 이건 무엇인가? 그 옆 스핑크스 아랫부분엔 구멍이 나있고, 그 기단 여기저기에 오벨리스크에서보다 더 큰 흠집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뭐 이리 관리를 못하나... 쯧쯧,,,“ 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잠시 후 나는 스핑크스 기단 옆의 작은 표지물을 발견했다. 여기 흠에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94일 독일군 공습이 있었다(2차 대전 중의 독일군의 런던 공습은 들어보았지만 1차 대전 중에도 독일군의 공습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이 때 이 오벨리스크 근처 도로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파편이 오벨리스크 쪽으로 날라 와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기단 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영국인들은 종전 후 그것을 복원할지 아니면 그대로 둘지 고민했다. 결론은 후자! 왜 그랬을까? 전쟁을 잊지 말자는 결의를 그렇게 보여 준 것이다. 그것도 역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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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을 맺어야겠다. 내가 이런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백 년 전 이백 년 전 일이 그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형성한다는 자각, 그 과거의 일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담담한 자세...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성숙한 시대로 나갈 때 필요한 역사인식이 아닐까? 이것이 오늘 런던 템즈강 가를 걸으면서 생각한 결론이다. 

(2016.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