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3 도서관이 살아야 학문이 산다

박찬운 교수 2016. 10. 10. 23:10

국이야기 23

 

도서관이 살아야 학문이 산다

 

영국도서관, 바로 여기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도서관은 1753년 영국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그 하나의 소속으로 설립되었다. 1973년 영국박물관에서 독립해서 킹크로스 역 근처에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재개장했다.


내가 우리나라 도서관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그 많은 도서관의 장서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아마도 학교 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처럼 대형도서관에 있는 장서 중에는 단 한 번도 대출이 안 된 책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이게 왜 그럴까? 도서관이 책을 찾아 읽는 장소가 아니라 그저 시험 공부하는 장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이것이 한국의 대부분 도서관의 민낯이다.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에 자리가 없다고 불평하지만 그것은 중간고사기말고사 준비를 할 때 뿐이고평상시엔 꼭 그렇지도 않다매일같이 도서관에 나와 억척스럽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보이지만 그들은 대부분 취직시험 혹은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나오는 이들이다.

 

영국도서관에 들어가다보면 거대한 동상을 만난다. 누군가하고 자세히 보니 뉴튼이다. 그가 영국의 지적세계를 지배하는 거인이다. 영국박물관은 호텔로 말하면 7성급 최고급 호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같은 외국인에겐 모든 시설이 입이 벌어질 만큼 최고급이다. 보안도 철저해 이곳 리딩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용품은 저렇게(맨 아래 사진) 투명 비닐 봉지 속에 넣어서 검사를 받고 들어가야 한다.


이게 학생만 그런 게 아니다. 대학교수들 중에도 도서관에 직접 나와 책을 골라 그곳에서 읽거나 연구실로 대출해 가는 이들은 많지 않다도서관을 이용해도 조교들이 와서 교수를 대신해 책을 찾아가는 정도다교수들이 보는 대부분 책은 도서관에 주문을 요청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사서 연구실 서가에 꽂아둔다. 그러니 한국 교수들 연구실은 해가 가면 갈수록 책이 쌓여 연륜 있는 교수들 방은 조그만 도서관이 부럽지 않다.

 

이런 모습은 국제적으론 일본 교수 연구실 정도나 비교가 되지 유럽이나 미국의 교수 연구실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서구사회의 교수 연구실은 우리처럼 크지 않아 원천적으로 많은 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다그들은 대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지 자신의 돈으로 사서 연구실에 쌓아두지 않는다.

 

연구를 위한 리서치 환경에서 도서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한국 대학에서는 도서관의 역할은 약할 수밖에 없다좀 험하게 말하면 한국 대학의 도서관은 대학이란 학문연구기관의 구색 갖추기 정도의 기관에 불과하다


대학이니 도서관이 없을 수 없고, 명색이 대학 도서관이니 학생교수가 책을 보든 안보든 매년 책을 살 수밖에 없고 .... 딱 이 정도가 한국 대학의 현주소다.

 

런던대학의 본부건물인 세니트 하우스(Senate House)와 그 내부에 있는 세니트 하우스 라이브라리


내가 지난 20년 간 미국네덜란드스웨덴 그리고 이번 영국의 교육기관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학문(적어도 인문사회과학분야)을 하기 위해선 도서관 운영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도서관장과 사서들이 분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학교 전체가 바뀌어야 하고특히 교수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하며, 근본적으론 우리들의 교육방법론이 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방법론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과과정ㅡ 이건 대학뿐 아니라 초중등 교육까지를 포함한다ㅡ에서 학생들에겐 교과서 외에는 필요하지 않다교수는 정해진 교과서를 기준으로 강의하고 학생은 그 범위 내에서 이해도를 측정받고(중간/기말고사학기를 끝낸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교과서 외의 자료를 읽을 필요가 없다도서관에 가서 관련 자료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그저 교과서 한 권을 달달 외우면 그것으로 끝이다.

 

UCL 도서관, 이곳은 UCL 본관(첫번째 사진) 내에 있다. 2백 여 년 전에 지은 건물 내에 있어 비좁을 것 같지만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엄청난 장서를 가지고 있고 매우 편리하다.


미국과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크게 느낀 바는 도서관의 위상과 그 활용의 차이다서구대학은 어느 대학에서든지 도서관이 중심이다학교 역사 자체가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대학은 반드시 좋은 도서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학의 연구역량은 도서관이 결정한다.

 

서양에선 대학의 건물 구조를 보아도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대학교수의 연구실은 대부분 도서관을 중심으로 위치한다내가 과거 공부한 미국의 노틀담 로스쿨은 교수 연구실이 도서관 내에 있었다도서관의 창가로 교수 연구실이 위치하고 연구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도서관의 서가가 도열해 있는 구조였다.

 

스웨덴의 룬드대학 법대는 교수 연구실이 도서관 바로 위층에 위치한다지금 내가 있는 런던대학(소아스)도 마찬가지다이렇게 교수 연구실이 도서관 내 혹은 도서관과 밀착해서 만들어지다 보니 도서관은 마치 교수들의 큰 연구실이나 다름없다교수들이 각자 책을 사서 자기 연구실에 쌓아둘 필요가 없다아무리 책을 많이 산다고 해도 큰 도서관의 장서와 비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곳이 내가 소속되어 있는 런던대학 소아스(SOAS)다.지역학 관련 장서는 입이 벌어질 정도다. 한국 섹션도 놀랄만한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다. 위의 두번째, 세번째 사진이 바로 한국 컬렉션이다.


거기에다 더 본질적인 것은 교육방법의 차이다유럽교육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다강의는 방향정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족하고 나머지는 모두 학생 스스로가 공부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일주일에 6시간 학습 시간이 있으면 적어도 3시간 이상은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채워진다이것은 내가 1년 동안 관찰했던 스웨덴의 법과대학에서도바로 이곳 런던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더욱 교과과정을 보면 한 학기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가 여럿 있다이 보고서 작성은 모두 도서관의 리서치를 기본으로 요구한다


그러니 이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우리처럼 취직시험을 위해서도, 중간고사/기말고사를 위해서도 아니다. 관련 자료를 찾아 그것을 읽고 정리하는 게 주목적이다이런 환경에서 이들의 리서치를 도와주는 사서(라이브라리언)의 역할은 커질수밖에 없다.

 

서구의 학문 연구자들은 대학시절 도서관을 통한 기본적인 리서치를 학습한 후 대학원 이후 그것을 심화시키면서 새로운 연구를 해나간다내가 지난 두 달 간 경험하고 있는 런던대학의 리서치 환경을 잠시보자.

 

런던대학은 시내 런던에 있는 18개 대학의 연합체다(전체 대학생 수는 16만 명이 넘는다). 내가 소속해 있는 런던대학 소아스 주변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런던정경대학(LSE), 킹스 칼리지 등 유명대학과 대학원 과정만 있는 고등법률연구소(IALS) 등이 있다


이들 모든 대학엔 각각 매우 훌륭한 도서관들이 있고, 거기에다 런던대학 본부라 할 수 있는 세니트 하우스(Snenate House)엔 런던대학 본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또 멀지 않은 곳엔 세계 최고수준의 도서관인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이 버티고 있다.

 

이곳 연구자들은 이들 도서관을 모두 이용한다.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 여러 도서관이 몰려 있 때문에 자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만 해도 이곳에 와서 도서관 카드를 무려 다섯 개나 만들어 매일 매일 필요한 자료를 찾아 도서관을 이동하며 이용한다


어느 도서관을 가도 시설은 쾌적하고 편리하다높은 천정의 고색창연한 도서관이지만 그 운영은 21세기 최첨단의 방법이 사용된다. 연구자에겐 최적의 환경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온 동료 방문학자들에게 도서관의 만족도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이구동성 만족을 표한다. 

 

이제 말을 맺는다. 우리가 서양근대 학문을 받아들인 지 100년이 넘었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서관을 아직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도서관을 단지 시험 공부하는 곳이 아닌, 책을 찾아 읽는 곳으로 만들어, 대학 내의 가장 핵심적인 연구센터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도서관의 사서가 단순히 책을 구매관리하는 직원이 아닌, 학생과 교수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적절하게 지원하는, 진정한 라이브라이언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


이것이 내가 이곳 런던에서 매일 고민하는 것이다


(2016.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