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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단상-어떻게 살 것인가-

박찬운 교수 2019. 6. 25. 15:18

새벽 4시도 전에 깨 책상 앞에 앉았다. 골똘히 생각했지만 답은 보이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50대 후반의 한 남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묻고 또 묻는다.

아주 젊을 때 나는 교조주의에 물든 사람이었다. 원칙주의자였고 그것에 양보함이 없었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새벽 신호등 앞에서도 나는 언제나 녹색등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불편해도 나는 이런 삶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젊음의 본능이 넘칠 때도 나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결코 상남자라 여기지 않았다. 젊은 도덕주의자로서 나는 양심에 가책을 주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법률가로서 도덕의 법률화를 찬성했다.

나는 그렇게 20대 30대를 살았다. 질풍노도의 시대라지만 나는 옛 선비의 고루함을 인생의 황금률로 여기며 살았다. 그것이 나로선 최선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이제 생각해 본다. 나는 과거의 바로 ‘그 사람’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거울을 보면 아직도 옛날의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만, 어쩐지 빛바랜 ‘그 사람’이다.

나는 이제 교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원칙의 중요함을 알지만, 그 원칙을 그대로 내 삶의 기둥으로 삼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원칙이란 없다! 젊은 친구들에게 유연함을 강조하고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새벽녘 차 없는 신호등 앞에서 녹색등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가끔 원칙이란 대로에서 벗어나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샛길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나는 이제 엄격한 도덕주의자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사는 얽히고 얽힌 실타래라 그것을 술술 풀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제 간간히 본능의 일단을 드러내며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이 되었다. 그저 대과없이 큰 물의나 일으키지 않고 사는 것이 어느새 삶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


나는 자주 새벽에 일어나 이런 것이 삶인가 하고 자문해 본다. 질문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매지만 확연한 답을 찾지 못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다만 이 순간 나는 이런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남은 삶, 조금 덜 후회하면서 살아보자,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런대로 선량하게 살아보자. 그리고... 남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 본능을 존중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삶’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자.

(2019.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