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19 UCL에서 제러미 벤담을 만나다

박찬운 교수 2016. 9. 25. 05:48

영국이야기 19


UCL에서 제러미 벤담을 만나다

 

<이 글을 백남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쓴다. 불법적이고도 무자비한 공권력에 희생되신 백선생님의 영령에 하얀 국화꽃 한 다발을 바친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 제러미 벤담을 이렇게 만났다. UCL 본관에서.


런던에 오면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꼭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 있었다. 러셀이 태어나기 한 세기 전(정확하게는 124년 전)에 태어난 철학자 제러미 벤담(1748-1832)이다.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게 공리주의의 정수인 바, 철학자 벤담에서 비롯된 말이다.

 

공리주의 철학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ㅡ공리주의는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최대다수의 행복만 추구하니 거기에서 소외되는 최소의 소수자는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ㅡ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철학만큼 정당하고도 적절한’(right and proper) 사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철학도 드물다.


공리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방법론이다. 이해관계가 나누어지는 문제에서 다수의 의사를 확인해 결정하는 것은 누가 봐도 원칙적으로 합리적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전부가 다 행복해질 수 없다면 우리가 노릴 수 있는 차선책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차선의 선이고 차선의 정의다.

 

제러미 벤담의 철학에 기초하여 1826년 세워진 UCL의 본관


벤담은 이러한 공리주의를 기초로 정치, 사회, 경제 제 부문의 개혁을 주창했고 그것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공리주의 사상은 말년을 함께 한 또 다른 철학자 제임스 밀과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계승 발전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벤담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의 공리주의는 추상적인 원리에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개혁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주장한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법은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사법절차는 신속하고 저렴해야 한다.

2. 범죄인에 대한 처벌은 범죄예방을 목표로 해야 하지 응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정부는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적 행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4. 정부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투표에 기초해 민주적으로 대표되어야 한다.

5. 정부의 행위는 공중에 공개되어야 하며 여론을 중시해야 한다.

6. 법과 도덕은 반드시 종교와 분리되어야 한다.

7. 합의된 성적 행위는 비난받아서는 안 되며, 처벌된다고 해도 경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벤담은 이렇게 캐니닛 속에 앉아 있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실제 그의 것이며 입고 있는 옷 또한 그가 생전에 입었던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도 이런 주장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의 대부분 주장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대부분 실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니만큼 그의 사상의 유용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정도에서 벤담의 사상을 소개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보자. 나는 오늘 벤담을 직접 만났고 그와 함께 다정히 사진을 찍었다

아니 뭐라고? 거의 2백여 년 전에 죽은 벤담을 어떻게 만났냐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천만의 말씀! 나는 그를 만났다.

 

벤담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이 얼굴은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얼굴 그대로이다. 뭔가 고집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이다.


오늘 점심을 먹고 나는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찾았다. UCL은 현재 런던 소재 대학 중에서 ICL(Imperial College London)과 함께 가장 뛰어난 연구실적을 내는 세계적 명문대학이다. 그 대학이 내가 있는 런던대학(SOAS)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한국처럼 외부와 분리된 독립 캠퍼스에 모든 학과가 있는 게 아니어서 사실 어디가 SOAS고 어디가 UCL인지 구별조차 어려운 게 이 동네 대학의 모습이.

 

내가 오늘 가고자 한 것은 UCL 본부건물(South Cloister). 이곳에 바로 벤담이 있. 벤담은 이 대학 총장 방 근처 조그만 목제 캐비닛 속에 있었다. 매일 아침 캐비닛 문이 열리고 밤이 되면 닫힌. 캐비닛 속의 벤담? 언뜻 보면 단순한 밀납인형이다. 모르는 사람이 이것을 보면 단순히 UCL이 제러미 벤담을 밀납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이걸 그저 밀납인형으로만 보면 큰 오해다.


저것은 보통 밀납인형이 아니라 벤담의 육신이 들어가 있는 특이한 인형이다. 그 사정을 설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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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L 도서관 중앙 로비, 사진 상단을 보면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UCL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벤담이 그 계획을 승인하는 상상도이다.


왜 벤담이 UCL에 있을까? 이것은 UCL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UCL은 영국 대학역사에서 하나의 전기를 만든 대학으로 통한다. 19세기 초까지 잉글랜드에서 제대로 된 대학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두 대학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대학은 당시까지 영국 국교회 신자가 아니면 입학이 안 되었다. 다른 종교적 배경이나 아예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회는 요동치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종교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었고 대신 자유와 평등사상이 넘쳐났다. 그 사상의 중심엔 제러미 벤담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벤담의 사상이 소위 옥스브리지라 불리는 전통의 두 대학에선 실현될 수는 없었. 새로운 대학이 필요해진 것이다.

 

UCL 도서관 내부 오래된 건물이라 공간은 넓지 않다. 하지만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도까지 모두 서가로 꽉 채우고 있다. 책의 숲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다. 


UCL은 바로 이런 분위기와 벤담의 강한 영향력 하에 그가 죽기 6년 전인 1826년 설립되었다. UCL은 설립 때부터 벤담이 주장한 자유주의 평등사상에 고무되어 입학생들에게 어떤 종교나 사상적 배경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을 떠난 대학(godless college)가 된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벤담은 이 대학 설립 이후 오늘 날까지 비록 형식적 설립자는 아니지만 정신적 설립자(spiritual founder)라고 불리운다.


말이 나왔으니 이 대학에 대해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 바로 이 대학이 일본 근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일본 근대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소위 일본의 선각자들 중 상당수가 이 대학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863년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이 학교에 들어온 조슈파(지금의 야마구치현을 중심으로 한 일본 근대화 그룹) 5인 중 한 사람으로 이곳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2년 뒤인 1865년에는 사스마파(지금의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그룹) 14인이 이곳에 와서 공부를 했다. 이들 모두가 귀국 후 일본 근대화의 선봉장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UCL이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리는 대학 내 표지


UCL 본관 가까이에 있는 1863년 및 1865년 일본 유학생 기념비, UCL에서 근무하는 손정원 교수(도시계획)의 안내로 이것을 찾아냈다.


벤담은 1832년 죽는 순간에도 유언을 통해 그의 철학 공리주의를 실현한다. 그는 죽은 후 자기 사체를 의과대학에서 해부실습용으로 사용할 것과 그의 머리를 보존해 실제 모습대로 전시해 줄 것을 유언한다. 이 유언에 따라 그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사우스우드 스미스는 런던의과대학 학생들 앞에서 벤담의 사체를 가지고 해부를 했고, 그의 머리와 뼈를 보존한다. 스미스는 십 수 년간 자기 집에서 벤담의 머리와 뼈를 보존한 다음, 1850 UCL에 기증했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UCL은 벤담의 유언 그대로 그의 머리를 그대로 전시할 순 없었다. 기술적으로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머리는 따로 보존하는 대신 벤담의 뼈를 넣은 밀납인형을 만들어 전시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살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밀납인형에 벤담이 생전에 즐겨입던 옷을 그대로 입혔다. 이 정도되면 이 밀납인형이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벤담 자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UCL에 따로 보존되어 있는 벤담의 실제 머리


조사해 보니 이 밀납인형엔 이러저러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재밌

벤담은 사망 이후에도 이곳 UCL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참석했. 이사회에는 벤담의 고정석이 있었다. 그는 참석은 했지만 표결엔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전설은 아마도 후대의 사람들이 벤담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의도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UCL의 건물은 런던 시내 유스톤 역 근처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다.


지금 이곳 UCL엔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있다. 이번 주부터 개학이기 때문에 수 백 명 신입생이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다.곳곳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코스 중 하나가 이 본관건물에서 벤담을 만나는 것이다

이 젊은 친구들이 벤담을 만난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도 당분간 이곳 UCL 도서관에 나올 참이다. 오늘 이곳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 주었. UCL의 영특한 젊은 친구들과 도서관을 함께 쓰면서 물어봐야겠다. 정신적 설립자 벤담에 대해, 그의 공리주의에 철학에 대해

(2016.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