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18 내 친구 콜라월레 올라니안

박찬운 교수 2016. 9. 22. 14:19

영국이야기 18

 

내 친구 콜라월레 올라니안

 

내 친구 콜라월레 올라니안과 함께 엠네스티 인터네셔널 런던 국제 사무국 앞에서


영국이야기를 하면서 이 친구 이야기를 뺄 순 없다. 콜라월레 올라니안(약칭 콜라). 그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법률가로 현재 엠네스티 인터네셔녈(국제사면위원회) 국제사무국의 선임 법률자문관이자 저명한 국제인권법 학자다. 그의 최근 저서 <아프리카에서의 부패와 인권법>(Corruption and Human Rights in Africa)은 부패와 인권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인권적 측면에서 해결책을 접근한 책으로 학계에서 주목 받는 책이다.

 

그에 의하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패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법률적 책임을 지울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 부패는 일반 시민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결국 수많은 인권문제를 일으킨다. 콜라는 바로 이 부패와 인권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부패를 방지하는 새로운 인권메커니즘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콜라월레 올라니안의 저서 <아프리카에서의 부패와 인권법>(2014)


그의 책을 읽다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이 재임기간 중 4대강 사업, 해외자원개발사업으로 수 십 조의 돈을 날린 것은 단지 개인의 실책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이 제대로만 쓰였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 돈이 그렇게 허망하게 쓰임으로써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후퇴되었을까?

 

콜라. 그는 내 오랜 친구다. 20년 전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노틀담 로스쿨) 만난 클라스 메이트다. 매우 명석한 친구로 졸업할 때 최우등상(Summa Cum Laude)을 받았고 계속 공부를 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스승 다이나 쉘톤 교수은 현재 조지워싱턴 법대의 석좌교수로 국제인권법학에서는 세계적인 대가 중 한 분이다.

 

어제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4년 전 런던에 들렀을 때 잠시 만났는데, 그 땐 피차 바쁜 상황이라 간단히 점심밥만 먹고 헤어졌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더 보자고 했던 것이 훌쩍 4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엠네스티 인터네셔널 국제사무국 내부 모습


엠네스티 인터네셔널. 세계 최대의 국제인권단체다. 비영리조직이지만 그 규모는 우리가 아는 구멍가게 NGO가 아니다. 전 세계 웬만한 나라에는 그 지부가 있고(물론 한국에도 엠네스티 한국지부가 있음) 국제사무국은 런던 시내 한복판에 두 동의 대형건물을 사용하면서 수 백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콜라는 그 사무국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중년의 신사가 내 앞에 나타났다. 2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격세지감이다. 아프리카인의 전형적인 포스가 넘친다. 우리는 굳게 포옹을 했다. 곧 점심을 먹으면서 과거 우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 친구 콜라


이야기는 우리가 미국 로스쿨을 졸업하고 인턴십을 위해 함께 떠났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일어났던 일로 이어졌다. 우리는 당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반년 동안 인턴십을 했다. 같은 집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매일 출퇴근을 같이 하고 리서치를 공동으로 수행했다. 아침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재판소까지 (스케베닝겐베크) 도로를 질주했다. 그 친구는 네덜란드 남자들이 타는 안장이 높은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나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고 무서움이 많아 안장이 낮은 분홍색 여성용 자전거를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


1998년 노틀담 대학 로스쿨 LL.M. 졸업식에서 콜라와 함께

 

우리의 일터는 국제사법재판소 도서관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례를 찾는 것이었는데, 그게 바로 2차 대전 이후 극동지역에서 벌어진 맥아더 사령부의 동경 전범재판이었다. 우리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 헤이그 평화궁전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대출받아 그것을 정리해 리포트를 만들었다. 영어능력이 부족했던 내가 그 작업을 했던 것은 콜라 그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내가 그에게 빚을 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서 많은 빚을 졌다. 나보다 3살이 어린 그는 나를 형처럼 따랐다. 심리적으로 나는 그의 멘토였다. 더욱 나이지리아 경제사정은 우리와는 달라 내가 생각하는 1불과 그가 생각하는 1불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더욱 변호사를 하다가 미국 유학을 했기 때문에 그와는 씀씀이가 달랐다.

 

콜라와 함께 일했던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평화궁전)


그와 밖에서 밥을 먹으면 거의 모든 경우 밥값을 내가 냈다. 당시 우리들은 학교에서 1천불씩 생활비를 받았는데 나는 그에게 저축할 것을 조언했다. 그것들을 모아서 몇 천 불 만들어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면 몇 년 잘 살 수 있으니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서 오는 수표를 꼬박꼬박 모아 우리가 헤어질 무렵에는 드디어 몇 천 불을 만들고 말았다. 매일매일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면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꼽아 보았는데, 나는 옆에서 그 말만 들어도 배가 불렀다.

 

1998년 말 나는 헤이그에서 귀국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새벽, 아직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 급한 국제전화가 왔다. 브뤼셀 중앙역에서 걸려온 것으로 현재 룩셈부르크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박찬 변호사의 전화였다.

 

박변호사님, 지금 콜라 씨를 만났는데,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전화를 하다가 가지고 있던 작은 수트 케이스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중앙역을 무대로 하는 절도범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귀국 전 나는 나보다 두어 달 뒤에 귀국할 콜라에게 박변호사를 소개해 주었다. 콜라는 당시 브뤼셀 공항을 이용해 나이지리아로 가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선 브뤼셀 중앙역에서 묵을 호텔까지, 또 호텔에서 공항까지 짐을 싣고 갈 차가 필요했다.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시 루뱅대학교 법과대학생이었던 박변호사에게 콜라를 위해 수고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 전화를 받으니 잠이 확 깨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속에 콜라의 전 재산이 다 들어 있는데... 현금, 수표, 여권 등등. 콜라가 얼마나 망연자실할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나는 콜라에게 여권은 대사관을 찾아가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으라고 조언한 다음, 현금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고, 수표는 내가 바로 막아주겠다고 안심을 시켰다. 다행히도 그가 가지고 온 현금은 전체 돈 중에서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나는 급히 노틀담 대학으로 메일을 보냈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수표 인출을 막아줄 것을 부탁했다. 긴박했던 시간이 지나고 수표는 다시 발행되어 콜라에게로 보내졌다.

 

나도 콜라의 자리에서 한 장 찰칵!


그랬던 콜라가 이제 세계 최대의 국제인권 NGO의 선임 법률자문관으로, 저명한 국제인권법 학자로 내 앞에 있다. 3자녀의 아버지로 이미 영국 시민이 되었고, 최근엔 런던 근교에 방 5개의 저택을 구입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이지리아에서 뭐 연락 없는가? 차기 법무장관 혹은 대법관 될 가능성이 없어?”

아 물론 있지. 나이지리아가 계속 민주화되고 있으니 내게도 기회가 있을 거야. 지난 번 책을 내고 라고스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현직 장관도 오고 그랬어. 내가 법무장관이 되면 꼭 Chan(그가 부르는 내 이름)을 초청할 게. 그 때까지 기다려 줘.”

 

우리는 함께 웃었다. 언제 그 날이 올지 모르지만... 20년을 이렇게 보냈는데, 또 그렇게 가다보면 그의 꿈이 이뤄질 날이 오지 않겠는가.


(2016. 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