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0 영국식 펍 한국에선 안 될까?

박찬운 교수 2016. 9. 28. 03:25

영국이야기 20


김영란법 시대에 맞는 영국식 펍 한국에선 안 될까?

 

일링 브로드웨이의 드레이튼 코트 호텔 펍의 비어가든


런던 생활이 다 좋은 게 아니다. 말동무 하나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은 가끔 고통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바로 펍(Pub)이다

영국식 선술집 펍에 대해선 많이 들어왔지만 이제껏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런던에 와서 그 펍을 가보게 되니 잠시 외로움도 달랠 수 있고 영국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어 좋다.

나는 요즘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은 펍에 가서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낙이다. 이러다가 맥주 중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 했는데... ㅎㅎ 


이 펍은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고, 귀가 길 동네 어귀, 심지어는 학교 안에도 있다. 내 경우는 친구가 많지 않으니 조용히 혼자 마시는 일이 많지만, 가끔 방문교수들끼리 가기도 하고, 때론 현지인 친구들을 만나면 의례히 식사를 하고 펍에 가서 담소를 나눈다.

 

한 세기가 훨썬 넘은 런던 일링 브로드웨이의 드레이튼 코트 호텔 펍


펍 중엔 유명 펍도 있다. 얼마 전 주말엔 런던에 사시는 교포 분의 초청으로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일링 브로드웨이라는 곳을 찾았다. 우리가 간 곳은 그곳에서 꽤 알려진 드레이튼 코트 호텔 펍. 이 펍은 1894년 만들어진 이래 이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독톡히 해왔고,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이 젊은 시절(1914년 경) 이 펍의 주방에서 일한 것으로도 유명하


돌아오는 길엔 유명세는 좀 떨어지지만 보다 서민적인 펍 로즈 앤 크라운을 들렀다. 규모는 위 호텔 펍보다는 작지만, 동네 한 가운데에 있어서 그런지 남녀노소 주민들이 나와,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게, 평화스런 영국의 진수를 보는 듯했다.

 


드레이튼 코트 펍의 내부와 비어가든


이 두 펍은 실내뿐만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어 가든도 있어 날이 궂지 않으면 이곳에 맥주를 들고 가 마실 수도 있다. 내가 간 날은 마침 청명한 날씨여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비어가든에서 왁자지껄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로 이게 영국 사람들의 참모습이다. 저들은 주말에 가족 또는 친구들과 펍에 나와서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때론 맥주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하루 종일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을까?

 

영국식 펍이란 대체로 유사하다. 들어가면 바텐더에게로 가서 자기가 마시고 싶은 맥주를 고른다. 그런 다음 즉석에서 돈을 치르는데 보통 파인트 잔(대략 500시시)3-4 파운드(4-5천원) 정도다. 바텐더가 맥주를 잔에 따라주면 그것을 가지고 적당한 자리에 가서 앉는다. 

이곳에선 술 마시면서 안주를 먹는 법이 없다. 그저 맨 술이다. 이야기하다가 좀 더 마시고 싶은 사람은 한 잔 더 사와서 마시고, 그렇지 않으면 한 잔 가지고 두어 시간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뜬다.

 

일링 브로드웨의 또 다른 펍, 로즈 앤 크라운


나는 이 문화가 참 좋다. 펍은 원래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모여든 노동자들의 삶은 고뎠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서 펍에 들러 맥주 몇 잔을 마셨다. 그러던 것이 두 세기가 지난 오늘 날의 펍은 영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가 되었다. 펍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영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러 한잔하면서 대화하는 소통공간이다.

5천원 정도만 있으면 누구나 들어가 누구와도 어울리면서 몇 시간을 떠들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펍이다.


내가 있는 런던대학(소아스)의 펍


내가 있는 런던대학(소아스) 구내에도 펍이 있다. 아니, 대학 내에 술집이라니! 그곳 펍에 가면 교수와 학생들이 와서 한 잔씩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들이 매우 자연스럽다. 저런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이기에 어딜 가도 주눅이 안 든다. 누가 누구의 술값을 내주는 법도 없다. 그저 자기 마실 것 사서 자리에 들고 오면 끝이다.


프랑스에 가면 지금도 카페가 많다. 근대국가 과정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만든 살롱과 카페문화의 유산이다. 그곳은 단지 사교장소가 아니라 소통의 장소, 민주주의의 공론장이. 영국엔 그게 펍이다.

 

내가 몇 년 전 스웨덴에 있을 때 그곳에서 특별히 관심 있게 본 게 피카라는 것이었다. 커피라는 뜻과 커피를 마시다라는 뜻이 있는 이 단어는 스웨덴 소통문화의 상징이다. 전국 어느 기업이나 기관을 가도 피카룸이 있고, 매일 한 두 번씩 피카타임이 있다. 그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상하관계, 동료관계는 이런 소통을 통해 가까워지고, 즐거운 직장문화가 만들어진다.


스톡홀름 옴부즈만 사무실의 피카룸, 국가기관도 이렇게 사무실 한 가운데에 이런 공간을 마련해 전 직원이 하루에 한 두 번씩 커피타임을 가지며 대화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게 안 될까? 대학에서 펍을 만들자고 하면 무슨 캠퍼스에서 술장사냐고 호통을 칠 것인가. 그런 식으로 술을 팔면 어떻게 높은 임대료를 내면서 영업을 할 것이냐고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줄 것인가


그럼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도 소통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무언가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식 펍문화를 만들 순 없는 것인가?


이제 김영란법도 만들어 시행하니 부담없는 펍을 만들어, 부담없이 가서, 각자 돈을 내고 맥주 한 잔 사서, 때론 조용히, 때론 격렬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어떨까? 그게 우리나라의 소통에도, 민주주의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도 이제 이런 말을 할 때가 되었다


어찌 술 한 잔 못 마시면서 인생을 논할 수 있을까. 어찌 술 한 잔 못 마시면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술이란 때론 좋은 것이다.


(2016.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