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1 서울 지하철이 그리운 런던 지옥철

박찬운 교수 2016. 9. 30. 14:14

영국이야기 21


서울 지하철이 그리운 런던 지옥철

 


영국박물관 근처의 홀번역의 저녁 시간, 승객들이 역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역사 바깥 인도를 점령하고 있다.


매일 런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한국의 그 무엇인가이다. 내 머리속에선 언제나 비교에 비교를 한다.

조선인 유길준은 1885년 이곳 런던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무렵 런던에는 이미 지하철이 개통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라인을 포함해 4개 라인이 땅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유길준은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2016년 또 한 사람의 유길준은 런던 이곳저곳을 다니며 생각에 잠긴다.


......


런던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우리 눈에는 불편하기 그지 없는 것도 여럿 있다. 그 중 하나가 지하철(이곳에선 튜브라고 함)이다.

 

런던의 교통체계는 1천만 명이 넘는 유럽에서 가장 큰 메카시티에 걸맞게 지난 150년 이상 진화해 왔다. 도심을 중심으론 지하철과 시내버스 그리고 외곽은 철도망으로 촘촘하게 이루어져 시민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내겐 아직 복잡한 런던 교통체계 전체를 평가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늘 나는 다른 것 보다, 그저 지난 50여 일 동안 경험한 지하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센트럴 라인의 플랫폼, 우리처럼 스크린 도어가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이 몰리면 매우 위험하다.


런던 시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1의 교통수단이 지하철이다. 런던 교통의 상징인 2층 버스는, 보기도 좋고 낭만적이라 런던에 도착해서 가끔 타보았지만, 요즘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하기 때문이다


버스는 교통 체증이 심한데다 정거장 간격이 짧아 이동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시간 많은 관광객들이 2층 버스를 타고, 여유 있게 런던 구경할 때가 딱이다(사실 대낮에 버스 2층에 탄 사람들은 대개 외국인들이다). 바쁜  런던 사람들로서는 지하철만한 교통수단이 없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하철을 도입한 도시가 어디일까? 물으나마나 런던이다. 언제냐고? 1863년! 100년 전도 아니고 150년 전이다. 지금도 운영 중인 메트로폴리탄 라인이 바로 런던 지하철 1호선이다. 런던 지하철 노선은 현재 총 11개인데, 이 중 6개 라인이 1900년 이전에, 3개 라인이 1900년 대 초에 각각 완공되었고, 두 개 라인(빅토리아와 쥬빌리 라인)만이 1960년 대 이후 완공되었다


이 정도면 런던 지하철이 얼마나 연륜이 깊은 지 알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이 된 것은 1974(나는 그 해 815일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1호선 지하철 개통식이 있었던 날 지금 박대통령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총에 맞어 쓰러졌다).  우리와 런던 지하철 사이에 100년이라는 간격이 있다는 게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이 과거 어떤 존재였는지를 대충 가늠할 수 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


사실 이렇게 오래된 지하철이지만 지금도 성성하게 잘 운행되고 있다는 게 내겐 신기한 일이다. 물론 100년 전 모습 그대로 운행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에 보수를 거쳐 현대화했지만 지하철이란 터널을 뚫어 만든 것이라 보수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철로 폭에서 오는 불편함일 것이다. 터널을 마음대로 넓히지 못해 옛날 만든 좁은 궤도를 사용하는 비좁은 전통차는 자연스레 수송 상의 한계로 나타난다. 


거기에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요즘 거의 모든 역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안정성이 훨씬 강화되었는데 런던에선 이런 안전장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넓지 않은 플랫폼에 수많은 승객이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당장 몇 사람이라도 선로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간간히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붐비는 역사에선 의례 주의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그럼에도 런던 지하철의 운행상황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속하다. 아침저녁 러시아워에는 보통 운행간격이 1-2분이어서 쉴 새 없이 플랫폼에 전동차가 들어온다.


노후화된 런던 지하철은 서울에서 온 나를 지난 50일 간 엄청나게 당황시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자주 이용하는 라인이 센트럴 라인이다. 학교가 영국박물관 근처라 통상 근처역인 토텐햄 코트 로드 역이나 홀번 역을 가기 위해선 이 노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많은 승객들이 플랫폼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라. 숨이 꽉 막힌다.


역사 플랫폼에서 전동차를 기다릴 땐 숨이 막힌다. 역사의 에어컨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느낄 수 없고 탁한 공기상태가 참기 힘들다. 이미 등짝에선 땀이 주루룩 흐른다. 전동차에 간신히 올라타면 사람은 어찌 그리 많은지 숨도 쉬기 어렵다.


더욱 가관인 것은 퇴근길이다. 5시만 넘으면 홀번 역의 경우 역사에 쉽게 진입할 수가 없다. 개찰구가 불과 4-5개 밖에 없어 일시에 몰려든 승객들은 역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역사 밖 인도를 점령한 채 내부 진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떤 역은 아침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역사 입구에 철문이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승객이 내리니 아예 아침엔 출구전용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역으로 가기 위해 그 역을 찾아갔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그뿐 만인가. 주말이면 어떤 노선은 상당구간을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어제까지 이용했던 역사의 문도 닫힐 때가 많다. 노후화된 노선 공사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교통상황을 사전에 제대로 알지 못하면 헛걸음치기 십상이다.


이런 서비스의 런던 지하철이지만 요금은 만만치 않다. 존(1존에서 6존까지 있음) 별로 차이가 나는 데, 현재 1-2존 한달 정기권을 끊어 다니는 내가 치른 돈이 무려 125파운드! 한국 돈으로 20만원에 가깝다. 


런던에서 적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런던튜브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두어 달이 되어가니 조금씩 이런 환경에서도 살만하다. 조금 한가한 노선, 그래도 조금 더 현대화된 노선을 머리만 잘 쓰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런던 도심 역들은 그 거리가 짧아 어느 역에서 내려도 도보로 십야 분 정도 이동하면 닿을 수 있다. 나 같이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사실 문제는 없다.


그러니 내가 꼭 홀번역이나 토텐햄 코트 로드 역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처음 가는 지역은 반드시 구글맵이나 교통 앱을 이용해 사전에 도상연습을 해보고 가면 거의 틀림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실시간 업데이트를 해주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보고 나서면 역사 문 앞에서 황당한 일은 당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두 마디 더 하자. 이렇게 불편한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홀번역에서 수많은 승객들이 도로를 점령한 채 역사 진입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사람들 입에서 불만이 없다. 우리 같으면 여기저기에서 욕 소리가 튀어나올 상황인데도... 왜 그럴까? 신분제의 잔영일까? 아니면 워낙 외국인이 많으니 그저 그런가보다하고 참는 것일까?


또 하나 신기한 것은 그렇게 붐비는 지하철에서도 승객들이 전동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별로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전동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간 힘을 쓸텐데 이들은 적당히 몇 사람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은 더 이상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전동차 내에서도 의외로 사람들은 붙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완전히 짐짝이 되어 갈텐데 이들에게선 그런 것을 보기 힘들다. 불편한 전동차 안에서도 최소한의 거리가 있다여기에서도 이들의 개인주의가 나타나는 것인가? 아니면 런던이란 곳이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서로 붙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드는 의문이다.

(2016.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