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16 과거를 잊지 않는 사람들

박찬운 교수 2016. 9. 18. 01:50

영국이야기 16


과거를 잊지 않는 사람들

 

생 폴 대성당 앞에 있는 2차대전 런던 대공습 시 희생된 소방관들을 위한 추모 조각상


한국은 과거를 너무 쉽게 잊는다. 이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큰 사건이 일어나도, 전국이 초상집 같은 비극이 일어나도, 시간만 가면 잊는다. 열거할 수 없는 비극이 끊이지 않는 것도 그 놈의 망각이 비극의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그로 인해 한국은 어떤 악당도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우병우가 연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지금 이런 말을 되뇌길 것이다. ‘시간만 가라, 또 사건이 터질 테니, 그러면 나는 산다.’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은 한 사회가 공감의 사회라는 증거다. 비극의 당사자가 그래도 살 수 있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지의 요체는 비극을 잊지 않고 비극의 주인공과 그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감의 정신이다

우리 사회는 바로 이 부분에서 큰 결함을 안고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가리는 작업이 이리도 어려운 게 무슨 이유인가. 과거를 기억하기는커녕 그것을 빨리 잊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고 여당의 대표가 아닌가.

 

문명사회란 무엇일까?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회다. 그것이 없다면 그 사회는 문명시대에 살면서도 야만의 사회라고 불려야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문명국가라 부를 수 없다. 우린 아직 야만의 사회에서 산다고 고백해야 한다.

 

영국박물관 근처에 있는 러셀 체임버, 저 파란색 동판을 보면 버트런드 러셀이 이곳에서 1911년부터 1916년까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고든 공원 옆의 버지니아 울프 형제가 살았던 집. 이 집에서 경제학자 케인즈가 1916년부터 1946년까지 살았다.


주말, 런던의 거리를 마냥 걸었다. 런던의 거리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빅토리안 시대의 영화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영국의 영화가 과장이 아님을 건물 하나하나에서 발견한다. 놀람과 함께, 솔직히 주눅이 든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위엄과 권위에 찬 건축물이 아니다. 그들 건축물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정신이다. 나는 거리에서 무수히 그 정신을 발견한다. 그 정신의 골자는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영국인들의 의지다.

 

생 폴 대성당 앞의 소방관 추모 기념물. 보행자들이 이곳에서 조형물을 보면서 그 내력을 살피고 있다.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수시로 건물 앞에 붙어 있는 푸른색  동판을 보게 된다. 무슨 표지냐고? 거기엔 이런 식의 문구가 써있다.

 “버트런드 러셀, 철학자이자 평화운동가, 이곳에서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살다.” 

나는 이런 표지를 지난 8월 이곳에 온 이래 수없이 보았다

공원에 가면 조그만 흉상이 있다. 그곳에서 살았던 어느 철학자 혹은 예술가를 기리는 것이다. 거리의 이름 중 상당수는 사람 이름이다.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한 후대의 다짐이다.


오늘 발견한 것은 조금 더 설명을 해야겠다. 생 폴 대성당에서 템즈 강으로 나가는 길에서 꽃다발이 놓여 있는 조형물을 발견했다. 런던 시내엔 이런 조형물이 발 길에 채일듯이 많아 일일이 눈길을 주지 못했는데, 오늘은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민들은 이 조형물의 설치내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서 살피니 1991년에 조성된 런던 소방관 추모 기념물이다. 왜 이것이 여기에 설치되었을까? 이 조각상은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한 런던 대공습 당시 화재 현장에서 희생된 소방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희생된 후 50년이 지난 뒤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가 참석해 조각상의 장막을 내렸다.

반세기 동안 영국인들은 그 죽음을 잊지 않았다. 당시 희생된 모든 소방관의 이름을 이 조각상 곳곳에 새겨 넣어 그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사람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의 다짐이다.

 

이 조형물의 제안자까지 이렇게 새겨 넣었다.


조각상 전면엔 이 기념물을 처음 구상한 사람의 이름도 볼 수 있다. 이런 기념물을 만들어 과거를 잊지 말자고 제안한 사람, 그 사람도 영원이 잊지 말자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국인들은 이런 기념물을 거리 한 가운데에 놓고 매일 같이 본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망각이란 게 찾아오는 것은 영국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것을 막는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활보하는 거리 한 가운데 이 기념물을 두는 것이다. 그래도 잊겠는가?

 

우리에게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 권위정권 시절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세월호 비극의 희생자들... 어찌 그들을 잊을 수가 있는가. 

4대강 사업으로 국토를 유린한 사람들, 자원외교한다고 세금을 도둑질한 사람들, 국정원을 선거에 이용한 책임자들... 어찌 그들을 잊고 면죄부를 줄 수 수 있는가.


문명사회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그 진실을 밝히고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한 사람도 빠트리지 말고 추모비에 새겨 명동거리 한 복판에 세우자. 책임있는 자는 응분의 책임을 지도록 하고 그것을 역사책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자.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 첫 단추는 불의한 정권의 연장을 막아내는 일이다.

(2016.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