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법률

인권법 제3개정판

박찬운 교수 2024. 2. 22. 04:05

나의 전공서인 인권법 제3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여기에 서문을 게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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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법 제3개정판 서문

 
대한민국 인권법 30년 역사를 회고하며

 
인권법 제2개정판을 낸 지 8년이 지났다. 교과서란 성격을 갖고 출판했으니 이미 한참 전에 제3개정판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독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변명을 하자면 개정판을 낼 짬을 내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특별히 지난 3년(2020년 1월~2023년 2월)간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으로 일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무 외에 연구를 한다거나 글을 쓴다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학교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비로소 내 본업으로 귀환했음을 느낀다.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자로서 할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세월이 화살처럼 흐른다는 말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학교에서 일할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분망하게 살다가는 내가 젊은 날부터 개척해 온 인권법 분야를 미완의 상태로 남기고 떠날 것 같다. 시간이 흐른 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연구실의 불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것이 조급한 마음으로 이 책을 오늘의 시점에 맞게 대대적으로 손을 보게 된 이유이다.

제3개정판은 제2개정판이 나온 2015년 이후의 달라진 상황을 반영하는 데 주력하였다. 본문 이곳저곳을 그동안의 연구 성과로 보완했고 불분명한 부분을 찾아내 또렷한 의미로 바꾸었다. 나아가 부록에선 최근 우리나라가 가입한 조약을 추가하였고, 일부는 그간의 변화를 반영해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였다.

제3개정판을 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읽어보니 부족하지만 이것이 한국의 인권법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국의 인권법이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에서 내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것이 이 책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약간의 보답일지 모르겠다.

인권법을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역사는 본문에서 말하듯 국제인권법을 중심에 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인권법의 역사는 곧 한국의 국제인권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사의 출발점은 1990년대 초 우리나라가 유엔의 주요 인권조약에 가입하고 그에 따른 국가보고서를 관련 인권기구에 제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인권상황이 국제인권조약에 기초해 검토되는 과정은 인권 실무가나 이론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1990년대 초부터 오늘날까지 국제인권법 실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약칭 민변)이 주도해 왔다. 특히 초기 10여 년간은 민변의 독무대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민변 변호사들은 인권조약에 따라 정기적으로 한국 정부가 조약기구에 제출하는 국가보고서에 대응하는 반박보고서를 제출하고 개인통보 사건을 대리하면서 국제인권법의 실무를 익혔다. 이 시기 이들 업무의 중심에는 조용환 변호사(제2대 인권법학회장)가 있었는바, 그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최초로 NGO 반박보고서를 제출하는 데 앞장섰고, 개인통보 제도를 최초로 이용해 규약위원회로부터 인용결정을 받아냈다. 학계에선 국제법 연구자인 정인섭 교수(초대 인권법학회장)의 저술이 돋보였으며, 그의 글은 실무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1990년대 특별히 기억할 일은 비법률가 NGO 단체의 활발한 국제인권 활동이 국제인권법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유엔 인권기구에서 꾸준히 제기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이 대표적인바, 이 활동으로 일본군위안부는 전시 성노예의 국제범죄라는 국제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 활동은 신혜수 선생에 의해 주도되었는바, 그는 2000년대에 들어와 유엔 여성차별철폐방지위원회 및 사회권규약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면서 국제인권 활동을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는 국제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NGO 인권운동가들이 속속 탄생하면서(예컨대 국제 NGO 팍스로마나나 포럼아시아 등에서 일한 이성훈, 김기연 등) 이들의 활동이 국내 인권운동가들과 법률가들의 국제인권법 활용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은 국제인권법의 이론과 실제에 새로운 국면을 제공하였다. 인권위는 설립 초기부터 지난 20년간 정기적으로 국제인권기구에 독립보고서를 제출해 우리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정확히 알리는 한편, 국제인권법의 국내 적용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인권침해 판단이나 정책권고에서 국제인권법을 기준으로 삼았고, 국제인권법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번역해 국내 활동가와 전문가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변 변호사들과 함께 국제인권 활동에 주력하는 일군의 변호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난민법 분야를 연구하고 난민신청인들을 위한 소송지원과 국내 난민인정 제도 개선에 노력했으며(황필규, 김종철 변호사),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등에서 개인통보 절차를 활발하게 이용해(오재창, 오두진 변호사) 국제사회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201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는 국제인권법을 중심에 두고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인권법의 수준이 크게 발전한다. 로스쿨이 시작되면서 몇몇 로스쿨이 인권법을 정식 과목으로 채택하자 이를 담당하는 교수들이 나타났고(채형복, 정영선, 홍관표 교수 등), 곧이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인권법학회가 설립되고 학회지가 탄생했다. 바야흐로 실무 중심의 인권법이 이론을 토대로 심화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또한 인권법학회의 자매학회로 인권학회가 설립되어 인권의 스펙트럼을 규범학 이상으로 넓히게 된 것도 인권법 연구자들에겐 큰 자극이 되었다. 이런 활동에는 인권학회를 이끈 정진성, 조효제 교수와 인권법학회를 이끈 김병주 변호사(제4대 학회장)와 김종철 교수(제5대 학회장)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이후 인권법 연구자들이 유엔 인권기구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전문가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양희 교수가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최근엔 서창록 교수가 자유권규약위원회에서, 이주영 교수가 사회권규약위원회에서, 백범석 교수가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다.

나아가 국제인권법과 관련해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는 수준 높은 연구도 지난 수년 사이에 나왔다. 국내 법원의 국제인권 관련 판례를 전수조사하거나(이혜영 교수), 개인통보와 관련하여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신윤진, 원유민 교수) 연구자들이 그들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혐오·차별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홍성수 교수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국제인권법 발전과 관련해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사법부의 동향이다. 사법부는 오랜 기간 국제인권법의 사각지대로 비판받아 왔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고 있다. 2011년 법관들이 자율적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조직한 이래 국제인권법을 공부하고 공동 저술(유럽인권재판소 판결 평석) 작업을 벌여나가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근래 국제인권법을 적용하는 판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기 힘든 현상으로 향후 대한민국 인권법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에서 국제인권법이 지난 30년 동안 많은 발전을 하였지만 인권법 차원에선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제인권법 연구의 중심은 대체로 국제인권규범의 존재와 그 의미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을 기준으로 국내의 인권제도와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인권법의 목표에서 볼 때, 국제인권법 연구의 중심은 국내에서 그 적용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국제인권법이 입법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폭넓게 수용될 수 있도록 인권의 각 분야에서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앞으로의 국제인권법 연구의 과제라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한국 인권법 역사에서 나는 실무가와 이론가의 경계에서 활동해 왔다. 나의 국제인권법 연구는 1993년 행형제도 연구[󰡔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역사비평사)]에서 시작되었으니 올해로 만 30년이 되었다. 이 기간 중 국제인권법 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했고(1999년), 2006년 대학교수가 된 이후에는 국제인권법을 인권법으로 확장(2008년 󰡔인권법󰡕 초판이 출간됨)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실무가들에겐 좀 더 이론을 공부할 것을 강조했고, 이론가들에겐 현실에 밀착한 이론을 연구할 것을 주문했으며, 이것을 인권법학회 활동(제3대 학회장)으로 연결했다. 특히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3년간은 수천 건의 진정사건과 수백 건의 정책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제인권법 활용을 주도했다. 이런 활동은 나 개인의 능력을 넘는 것으로 위에서 거명하거나 지면상 거명하지 못한 동학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분들에게 이 지면을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면 이 제3개정판이 내가 정년 전에 내는 마지막 개정판이 될지 모르겠다. 물론 정년 후에도 지적 능력이 계속되는 한 이 책을 다듬고 보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지난 30년간 국제인권법을 중심으로 인권법 분야를 개척해 온 나의 의무라 생각한다. 부디 인권법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이 책과 내 연구가 참고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크게 인기가 없는 이 두꺼운 책을 꾸준히 출판해 준 한울엠플러스의 관계자 여러분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3년 겨울
한양대학교 행당캠퍼스 연구실에서
박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