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판례백선>이 출간되다
-지난 30년 나는 무엇을 했는가-
매우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교정판례백선>. 우리나라 형사절차에서 구금 당한 피구금자(피의자, 피고인, 수형자)의 인권과 관련된 법원 판결, 헌재 결정,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을 해설한 책입니다. 우리 인권 역사에서 역사적인 저술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내기 위해 6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저도 영광스럽게 참여해 두 꼭지의 글을 썼습니다. 부디 이 책이 널리 익혀 우리나라의 피구금자 인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회고하면, 저에게 있어 피구금자의 인권문제는 매우 역사가 긴 과제였습니다. 30년이 넘는 동안 이 문제에 관여해 왔습니다. 교정판례백선을 받아보니 몇 가지가 선명하게 기억나는군요.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1993년 '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 출판
저는 재야 법조에서 처음으로 피구금자 인권문제를 변호사회에서 다루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1993년의 일인데, 저의 제안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에 행형제도연구소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저는 그 소위의 간사를 맡았습니다. 이 소위 활동으로 한 권의 책이 나왔는데, 그것이 <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입니다. 이 책은 저와 김선수 변호사(후일 대법관이 됨)이 각각 논문 하나 씩을 쓴 다음, 피구금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인권원칙 몇 개를 번역해(박승옥, 김선수, 유선영, 박찬운) 실은 책입니다. 지금 보면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우리나라 인권법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2. 1994년 감사원 행형부조리실태보고서 작성
1994년 감사원에 부정방지대책위원회원회가 민관 합동으로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 위원회의 용역 의뢰를 받아 우리나라의 행형실태를 보고하는 보고서 <행형부조리실태 및 방지대책>을 작성했습니다. 이를 위해 전국 여러 교정시설을 방문해 우리나라의 구금시설의 실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제가 이 보고서에서 강조한 우리나라 행형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한 것이 3가지였습니다. 첫째가 법률화. 행형과 관련된 각종 규정은 대부분 피구금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므로 법률유보의 원칙상 법률에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회화. 행형의 목표는 피구금자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재사회화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국제화. 행형의 수준은 국제적 수준(특히 유엔의 인권원칙)에 맞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3. 1998년 ‘한국 감옥의 현실’ 출판
1998년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인권운동사랑방이 중심이 되어 감옥실태보고서가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단체가 중심이 된 피구금자 인권 보고서였습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에서 한 꼭지 글을 쓰는 한편 이승호 교수(건국대)와 함께 편집책임을 맡았습니다.
4. 2000년 대 초반 보호감호제도 폐지운동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사회보호법이란 법률이 한때 있었습니다. 재범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형벌과 함께 보호감호(7년 혹은 10년)가 병과되었고 이들 재소자들은 모두 본형을 복역한 다음 교도소와 사실상 같은 시설인 청송보호감호소로 옮겨져 장기간 세상과 두절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이중처벌로 위헌이었지만 장기간 실시되었습니다. 저는 이 법률의 폐지를 위해 한동안 동분서주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저는 사회보호법 폐지 공대위 집행위원장으로서 대규모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5. 국가인권위원회에서의 피구금자 보호
저는 두 번에 걸쳐 인권위에서 일했습니다. 이 기간 중 저의 특별한 관심사 중 하나가 피구금자의 인권 개선이었습니다. 교정시설의 인권 증진은 인권위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교정 관련 인권정책 개선을 위한 여러 권고에 직접 개입했고, 특히 2020-2023년 3년간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구금시설에 수용된 많은 재소자이 제기한 수많은 진정사건을 직접 다루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현재 가장 큰 문제인 과밀수용 문제에 저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3-4평도 안 되는 공간에 6-7명이 수용되어 있는 현실은 그 자체로 비인도적 처우입니다. 저는 이러한 진정이 제기되는 경우 이를 인권침해로 과감히 인정해 법무부에 즉각적인 처우 개선을 권고했습니다.
한 나라의 인권 수준은 그 나라의 감옥을 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교정시설은 가야 할 길이 멉니다. 항시 3-4만 명이 갇혀 있는 교정시설은 언제든지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 제도 개선을 했지만 외부감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과밀수용, 부적절한 의료처우 등 심각한 인권문제가 전국 모든 시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곳을 관리하는 교정공무원들의 어려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근무환경 개선은 교도관의 인권문제인 동시에 피구금자들의 인권문제와 직결됩니다. 저는 이제 하나씩 일을 놓아야 하는 처지입니다만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후배 법률가들이 하나둘 늘어나길 고대합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느낀 것이지만 30년 전 제가 이 작업을 시작할 때와는 격세지감입니다. 그 사이 수십 명의 후배 전문가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더 많은 법률가들, 더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피구금자의 인권 개선을 위해 활동해야 합니다. 힘닿는 대로 함께 하겠습니다. (202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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