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34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사는 예술인들, 그들이 살린 거리

박찬운 교수 2016. 12. 5. 05:29

영국이야기 34

 

자유의 공기가 살린 거리

-브리크 레인 거리를 거닐다-

 



브리크 레인의 그라피티



런던은 갈만한 곳이 참 많은 도시다. 도시가 생긴지 2천 년이 넘었고, 17세기 이후 200년 이상 세계 최강국이자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의 수도답게, 그 역사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내겐 천금 같은 기회라 생각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역사의 현장을 찾고 있으나, 귀국 전까지 몇 곳이나 가볼지 모르겠다.

 

오늘 이야기는 내가 사는 버러(Borough)인 Tower Hamlets의 한 거리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버러라는 말 나아가 런던의 행정구역을 설명해야겠다. 런던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시내 이곳저곳에서 시티 혹은 버러(borough)라는 표지를 발견할 때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런던이란 도시는 템즈강 북단의 작은 성곽도시였다. 18세기까지 런던은 그 성곽을 유지했으나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과거의 그 성곽도시 런던은 City of London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 지도가 우리가 말하는 런던 곧 광역런던(Greater London)이다. 광역런던은 정 가운데에 있는 1번 City of London과 32개의 버러(borough)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사는 Tower Hamlets 버러는  8번이다. (지도 위키피디아)



과거 런던이 성곽도시이었던 시절 그 주변에는 버러(Borough)라 불리는 독립적인 행정구역(지자체)이 있었다. 이것은 런던이 광역화되면서 런던의 하부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는데 그 크기에 따라 법률상 여러 층위의 자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 대 이후 광역 런던(Greater London)이 만들어지면서 이들 버러는 32개로 통폐합되어 City of London과 같은 하부 행정구역으로 정리되었다. 쉽게 말하면 광역 런던(단순히 런던이라 부름)은 서울특별시와 같은 수준의 광역자치단체이고, City of London32개의 Borough는 서울의 각 구와 같은 기초자치단체를 말한다.

 

각설하고, 내가 사는 버러의 공식명칭이 London Borough of Tower Hamlets인데, 이곳에 매우 유니크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바로 브리크 레인(Brick Lane). 집에서 지하철을 타면 단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이다. 12월 어느  일요일,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브리크 레인이 시작되는 곳



이곳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런던의 고급동네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내가 사는 이 타우어 햄렛 지역은 템즈강 북단에서 동쪽 지역인데 고급동네가 아니다(런던의 고급동네는 대체로 도심에서 서쪽의 켄싱턴 가든, 하이드 파크, 홀랜드 파크 근처나, 거기에서 더 서쪽으로 가야 있음). 이 지역은 산업혁명 이후 주로 공장지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주택가로선 서쪽 동네에 비하여 그 격이 많이 떨어진다.

 

브리크 레인은 지금으로부터 4-5백 년 전에 이곳에 벽돌공장이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런던 시내의 건축공사용 벽돌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17세기에 들어서선 트루만이란 유명한 맥주공장도 이곳에 세워졌다. 동네가 공장지대다 보니 런던의 중상류층은 이곳에 얼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일찌감치 이민자들이 이 동네에 모여들었다. 산업혁명기인 19세기엔 유대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벵갈인(방글라데시)과 무슬림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 지금도 방글라데시인에겐 이곳이 런던에서 가장 큰 집단거주지역이다.

 



가겟집 앞에 저런 그라피티 하나 정도는 있어야 여기서는 행세할 수 있다



평범하다 못해 낙후된 거리 브리크 레인이 최근 확 변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런던의 뜨는 동네, 소위 핫 플레이스가 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것이다. 안내책자는 브리크 레인을 거리의 미술’(street arts)로 유명한 곳이라고 소개한다. 온갖 그라피티가 거리 이곳저곳에 그려져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라피티로 도시재생에 성공한 지역! 바로 그곳이 브리크 레인이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라피티는 서구도시의 뒷골목 벽에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는 낙서나 흉한 그림이다. 물론 그런 그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예술성이 인정되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림 애호가들이 즐겨보는 장르의 미술은 아니다. 그런 장르의 그림들이 어떻게 이 거리를 살려놓았다는 말일까?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라피티 중엔 초상화가 많다.



이곳을 찾는 것은 간단하다. 지하철 역 알드게이트 이스트(Aldgate East)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이 거리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그 입구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브리크 레인 거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조금 한산하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핫한 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 거리를 가려면 일요일 가는 게 좋다. 왜냐하면 매주 일요일 열리는 선데이마켓이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거리엔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노상 음식점(중간 중간에 옥내 마켓도 있음),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 거리의 악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사람들이 오는 이유는 단순히 먹기 위해서도, 단순히 쇼핑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관광객들이 오는 주목적은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그라피티를 보러 오는 것이다. 거리의 쇼핑은 사람이 많이 오니까 자연스레 생긴 부수적 경제현상일 뿐이다.

 


벽면 전체가 그라피티로 빼곡하다.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철학과 메시지가 있다.



이곳에서 보는 그라피티를 잘 관찰하면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게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넘치는 창의, 비판적 정신이 이 거리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그라피티의 종류도 많다. 어떤 이는 초상화를 그렸고, 어떤 이는 꽃이나 동물을 그렸다. 또 어떤 이는 문자의 조합으로 현대사회를 조롱하고 있다. 작은 것도 있고, 엄청나게 큰 작품도 있다.

 

많은 가게가 입구 근처에 그라피티 한두 점을 그려 놓았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한 마디로 이곳의 공기는 자유다. 자유의 공기를 마시면서 많은 예술인들이 이곳에 모여 그들의 끼를 발산하고 있다. 그로 인해 볼품없는 거리가 생기 있는 거리로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몰려온다.

 



언뜻 지저분해 보이고 아무 뜻없는 그림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꽤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들이다.



대한민국 여기저기에 죽어가는 거리가 많다. 그런 거리에 우리의 창의적인 젊은 예술가가 둥지를 틀고 마음대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자유의 공기를 마시면서 거리 곳곳을 예술품 전시장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판단해 보길 바란다.

 

 







거리 이곳저곳의 그라피티





브리크 레인 거리, 일요일에 가면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차량을 개조한 노상카페도 앙증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