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33 런던대학 청강생 리포트 -샬롯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듣고-

박찬운 교수 2016. 12. 4. 01:41

영국이야기 33


런던대학 청강생 리포트

-샬롯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듣고-

 


런던에 와서 경험하는 게 많지만 그 중에서도 대학교수로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아무래도 이곳 대학 강의다나는 지난 9월 말부터 런던대학 SOAS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듣고 있다이 강의는 내가 런던에 오기 전 읽은 인하대 김영 교수(한문학, 10년 전 SOAS에서 방문학자로 있었음)의 책 '김영 교수의 영국문화기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책을 통해 판단하건대, 강의 내용강좌운영 모두 흥미로웠다.* 그래서 학교에 오자마자 이 강좌의 담당교수인 샬롯 홀릭 교수(현재 런던대학 SOAS 한국학연구소장)를 찾아가 한 학기 동안 청강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녀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단번에 말하길 Welcome!


*영국에 오기 전에 책을 보내 주신 김영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런던대학 SOAS 샬롯 홀릭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의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국 대학의 학기 운영을 잠간 말해야겠다모든 대학이 같은 방법으로 학기 운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런던대학 SOAS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학기는 3학기로 구성되는 데, 1학기는 9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12, 2학기는 1월 초부터 3월 말까지 11, 3학기는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8주로 총 31주로 이루어지며각 학기가 끝나면 크리스마스 브레이크 3부활절 브레이크 4여름방학 3달이 주어진다.


*2016-2017년 SOAS 학사일정

1학기: 2016년 9월 26-12월 16일

크리스마스 브레이크    

2학기: 2017년 1월 9일-3월 24일

부활절 브레이크

3학기: 2017년 4월 24일-6월 16일

여름방학

 

학기운영상 큰 특징 중의 하나는 1, 2학기는 수업만 듣고 시험이 없다는 점이다(물론 리포트 제출 같은 과제물은 있다). 시험은 3학기에 몰아서 보는데첫 두 주는 교수들이 과목 정리를 해주고, 3주차부터 시험을 본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학기 중 리딩 위크가 있다는 점이다. 1학기의 경우 5주가 끝나면 두 주 동안 리딩 위크가 시작되는 데, 학생들은 이 기간 한편으론 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말 그대로 수업에서 요구하는 각종 리딩자료를 집중적으로 읽는다


마지막 특징은 시험 채점인데항상 두 교수가 채점을 한다는 점이다. 공정성을 위한 것인데, 우리로선 좀 어색하지만, 세부전공이 다른 교수라도 출제교수와 함께 2인 1조 채점교수가 된다고 한다.

 



리딩 위크 기간 중 SOAS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샬롯 교수와 나는 몇 차례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나의 관심 중 하나는 영국 교수의 일상사였다.

 

샬롯 선생영국 교수는 매일 매일 어떤 일에 신경을 씁니까?”

한국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연구하고 강의하는 일....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여기에선 학생들의 학습을 학문적으로정신적으로 돕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신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많습니다여러 가지 고민이 많겠지요교수는 이들을 적절히 도와주워야 합니다학교 차원에선 이들을 위해 전문 상담가들이 상담에 응하고 있습니다그 이용도 아주 높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국 대학생들이 생각났다한국 대학생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친구들이 전 세계 어디에 있을까그들이 지금 학교로부터 받고 있는 서비스는 어떤가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미안하구나한국의 대학생들이여!”

 

샬롯 교수는 덴마크 출신으로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미술사를 전공하였다그의 한국어 실력은 출중 그 자체다내가 이제껏 본 유럽인 중에서 한국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찬일까그 스승 박영숙 교수(은퇴)는 런던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개척한 선구자로, 꼬장꼬장한 성격에 빈틈이 없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들리는 말로는 샬롯 교수가 지도교수인 박교수로부터 엄격한 학문적 수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덕에 한국어를 잘하는 유럽 최고의 한국미술사 연구자가 되었고더욱 모교에서 지도교수의 뒤를 이어받았으니, 이런 걸 고진감래라 할 것이다


나는 샬롯 교수의 대학원 수업 고려 조선의 미술’(Arts of Koryo and Chosun)의 청강생로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교실 맨 앞에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내겐 강의내용도 관심사였지만 샬롯 교수가 어떤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지가 사실 더 궁금했다


내가 대학교수라고 해도 동료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마 이것은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머리 속의 교수들 강의라는 것은 고작 학창시절 은사님들의 강의가 전부다. 교수가 된지 10년이 넘었지만, 내 강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무엇을 고쳐야 양질의 강의를 할 수 있을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러니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번 기회에 영국 교수의 강의기법을 철저히 분석해보리라!




샬롯 교수가 사진을 보면서 고려자기의 상감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샬롯 교수의 강의는 기본적으로 PPT를 활용한다미술사이니만큼 보여주어야 할 그림이 많다오랜 기간 업데이트한 PPT는 노고의 흔적이 역력하다여러 박물관에서 찍은 한국 관련 미술품도자기 등의 사진을 사용하는 데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진의 특정 부분을 확대해서 보여 주었다. 사실 이 정도야 한국 교수들도 많이 하고 있으니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제출하는 리포트 과제물을 보니 생각나는 게 많았다샬롯 교수는 학생들에게 학기 중 두 개의 과제물 제출을 요구한다. 하나는 짧은 리포트(1500단어), 다른 하나는 긴 리포트(3000단어)모두 고려와 조선시대에 관련된 책이나 논문을 선정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제다


과제 수행의 첫 단계에선 유사주제로 그룹을 나누어 수업시간에 자신들이 선택한 책이나 논문을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이곳의 모든 교육에서 강조되는 것이지만 무릇 대학생은그것도 학문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글을 잘 써야 한다그리고 그 글은 비판적인 자기 글이 아니면 안 된다이런 분위기에서 남의 글을 베끼는 것은 불가능하다아무리 보아도 이런 점은 확실히 우리가 부족해 보인다한국 교육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샬롯 교수의 강점은 역시 현장감 있는 강의다미술사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들어보니 유사 과목의 다른 교수들이 다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현장감 넘치는 그의 강의 두 가지만 소개해 보자


하나는 한국의 도자기 공부를 할 때였다강의실에 그녀는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와서 풀었다거기엔 도자기 파편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청자분청사기백자 등등... 어디에서 입수했는지이런 파편들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직접 만져 보면서 질감과 색상 등을 확인토록 했다. 나도 난생 처음 이런 경험을 했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니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이다고개를 끄덕인다.


 


샬롯 교수가 학생들과 도자기 파편을 만져가면서 자기의 질감과 색깔을 살펴보고 있다.



두 번째는 박물관과의 유기적인 협조로 이뤄지는 현장강의다들어보니 이것은 샬롯 교수의 인맥으로 이뤄진다고 한다특별히 박물관에 비용을 지불하는 게 아니다원래 샬롯 교수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VA) 미술관의 큐레이터 출신이라 그곳 동료의 협조로 미술사 강좌 참여 학생들을 그곳으로 데려가 한국 소장품을 직접 보고 만지는 수업을 진행해 왔다고 한다


올해는 VA 대신 학교 바로 옆의 브리티시 뮤지엄의 한국관에서 현장 수업이 이루어졌다사실 나는 이날 수업만큼은 꼭 참석하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 그러질 못했다수업이 공교롭게도 나의 독일 튜빙겐 대학 초청 강연 날짜와 겹쳤던 것이다.

 

내가 뮤지엄 현장 수업에 참관하지 못해 아쉬움을 표하자 샬롯 교수는 다른 기회를 하나 제안했다자신이 학부에서 맡고 있는 한국불교미술’ 강좌 현장수업을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에서 진행하니 거기에 참여해 보라는 것이다그곳의 동아시아 선임연구원이 직접 희귀 소장품을 설명하는 수업이란다이보다 좋은 제안이 어디에 있겠는가보안이 삼엄한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의 깊숙한 연구 공간에서 학생들 몇 명과 단출하게 희귀본을 본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가 아닌가.


브리티시 라이브러리는 리딩 룸을 들어갈 때 완전 빈 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입장이 허락 안 될 정도로 보안이 엄격하다모든 이용자는 지하에 있는 클록 룸에 가서 자켓을 벗어 보관하고가방 등은 개인 사물함에 넣고투명비닐에 필기구나 노트북만을 넣어 리딩 룸으로 들어가야 한다그러나 우리는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라이브러리 연구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구공간으로 들어갔다육중한 문을 두세 개를 열고 닫고서야 소장품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브티티시 라이브러리의 동아시아 선임연구원이 소장된 희귀본을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의 한국 도서는 어느 정도일까설명을 들으니 이 도서관이 왜 세계 최고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 같다이 도서관(원래 브리티시 뮤지엄의 한 부속기관이었다가 1970년 대 초 독립되었음)이 한국 도서를 처음으로 입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인 1843년이다


한국 도서가 본격적으로 수집된 것은 일본에서 외교관을 지낸 어네스트 새토우(Sir Ernest Satow)의 힘이 컸던 모양인데이 사람은 당시 일본의 고서를 다량으로 수집하면서그 중에 한국에서 발행된 목판본 고서를 포함시켰고결국 그것이 브리티시 라이브러리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현재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엔 한국 관련 자료가 꽤 있다. 1만 5천여 권의 단행본과 500여 종의 정기간행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방엔 막 수장고에서 갓 나온 희귀본 몇 권이 책상위에 올려 져 있었다. 1390년 간행된 고려시대 화엄경, 16세기 삼강행실도정조 시절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일본의 17세기 초 간행된 묘법연화경 등을 차례로 보았고, 고려시대 반양세고(潘陽世稿)를 판각한 목판(1909년)을 직접 만져보면서 책 만드는 과정을 설명받았다서양에 결코 뒤지 않은 기록문화의 정수들이다보관상태도 좋다

 



브리티시 라이브라리가 소장하고 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서적 중 하나인 기사진표리진찬의궤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행이 본 것은 브리티시 라이브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대표 기록물 중 하나바로 1809년 순조 시절에 만들어진 기사진표리진찬의궤다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결혼(관례)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기록한 의궤다한 장 한 장을 넘기니 화공들이 그린 컬러풀한 색감의 그림들이 나온다잔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궁궐여인이 머리에 꽂은 비녀장식품잔칫상의자 등등의 각종 소품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져 있다보는 이들이 탄성을 지른다한국의 기록문화가 대단하구나!

 

브리티시 라이브러리는 어떻게 이런 보물을 입수했을까의궤 맨 뒤에 빨간 도장이 하나 찍혀 있다자세히 보니 1891년에 이것을 입수했다는 표시다담당자는 이 의궤를 당시 프랑스인으로부터 샀다고 하나 그 프랑스인이 입수한 경위는 모른다혹시 병인양요 때 불란서가 가지고 간 의궤 중 몇 권이 증발한 것은 아닐까그럴 지도 모른다


저것이 불란서에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가 서울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을것인데... 아쉬움이 남았다하지만 우리의 귀중한 보물을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청강 리포트를 끝낸다. 청강하면서 늘 고민하는 것은 한국에 돌아가 학생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이다. 좀 더 정성스럽게 강의해야겠다. 학생들의 고민에 좀 더 다가가야겠다. 학생들과 배움의 즐거움을 함께 하고 싶다. 기다려라, 나의 학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