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8화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찬운 교수 2016. 2. 13. 21:18

나와 민변(8)

 

8화 당신이 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직변호사 제도의 기원에 대하여






내가 일본을 처음 간 게 1992년 5월이다. 내 첫 외국여행이기도 했다. 바로 이 사진이 그 때 내 모습이다. 동경대 정문 아카몬에서. 와 젊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사람이 살다보면 경찰서검찰청 한 번 안 가고 살긴 어렵다선량한 사람은 해당 안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바라진 않겠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경찰서검찰청에 가면 처음부터 주눅이 든다어제까지 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한 변호사도 검찰청사에 들어갈 때는 일약 갑의 기분에서 을의 기분으로 바뀐다고 한다게다가 체포되어 유치장 신세까지 져보라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수사기관에 연행되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음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라첫째말하지 말라(묵비권 행사). 일단 수사기관이 당신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면 말하는 순간 수렁에 빠질 수 있다.  둘째빨리 변호사를 불러라변호사가 달려와 당신과 접견을 하고 어떻게 조사를 받아야 할지 정하라조사가 시작되면 그 변호사를 옆에 앉혀라이것이 수사 받는 피의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왕도다.

 

사실 형사변호를 해보면 잘 알지만 수사 초기그러니까 경찰서 단계에서단추가 잘못 꿰지면 웬만해서는 그 억울함을 풀기 어렵다처음부터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빼도 박지 못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빽 없는 민초가 변호사를 만날 수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변호사다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변호사를 만날 수 있는 사람, 더욱 변호사를 옆에 두고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돈 많은 사람들이야 수사기관에 갈 때언제부터인지변호사를 대동하지만 일반 민초야 언감생시다.

 

1990년대 초에는 일반 시민이 변호사를 만나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그러니 그 때 인권변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변호사 초년 시절  형사변호에 관심이 많았다통상 그 시절 형사변호를 많이 하는 변호사는 지금의 변호사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요즘은 변호사들이 전용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예는 아주 드물지만 그 당시는 웬만큼 돈 버는 변호사는 죄다 운전기사가 있었다형사변호를 많이 하는 변호사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변호사 선임료도 적지 않았다내가 아는 한 요즘 변호사 수임료는 1990년대 초와 비교해 크게 오르지 않았다물가는 2, 3배 올랐는데도 수임료 절대액수가 거의 같다는 말은 당시의 수임료가 엄청나게 비쌌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니 서민들이 경찰서에서 변호사를 만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1년 민변에 가입하면서 나의 형사변호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질적양적 도약을 한다당시 적지 않게 발생하던 시국사건의 양심범을 직접 변호하면서 형사절차에서의 인권문제를 실감나게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공부한 이유

민변에 가입하면서 사무실 주변에 있는 민변 동료들과 아침 일찍 만나 일본어 공부를 같이 했다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공부 좀 하는 법조인들에겐 일본어 능력이 많이 필요했다사건 해결을 위해서 판례 연구를 할 때 국내 판례가 없는 경우엔 일본 판례를 검토하는 게 자연스러웠이를 위해 적어도 일본어로 된 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1992년 민변은 일본의 진보적 법률가 첫번 째 교류회를 경주에서 갖는다. 그 때 한국을 방문한 일본 변호사들과 대화하는 필자.

 

나아가 서울변호사회든 대한변협이든 모두 일본 변호사회와 정기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류회에 자주 참가하는 사람들에겐 일본어 소통능력이 더 필요했이즈음 민변도 일본의 진보적 법률가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1991년 가을 동경에 열린 제2회 아시아 태평양 법률가회의에 민변 변호사 18명이 참석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2년부터는 일본의 진보적 변호사들과 정기교류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변 변호사들 중 일부는 해독 정도의 일본어를 넘어 회화가 가능한 정도의 일본어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1990년대 초 이런 노력은 내가 주도했당시 서초동 주변 법조인들에게 알려진 일본인 여성이 한 사람 있었다고바야시라는 분이었는데, 게이오대학 출신의 재원으로 남편이 한국 사람이었다그 분은 부업으로 일본어 번역과 회화 과외교사 일을 했다.

 



1992년 5월 첫 일본 방문. 서울변호사회와 교류하는 동경 제2변호사회 회관 앞에서. 지금은 이 건물은 없어지고 근처에 동경의 3개 변호사회와 일본변호사연합회 통합회관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그 분을 사무실로 초청해 일본어 공부를 했다주 2회 업무가 시작되기 전 사무실에 모여 공부를 해나갔다주로 내 사무실과 김선수 변호사가 있는 '시민'에서 모여 했다어학공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면 자연스레 성장하는 게 어학이다내 기억엔 4-5명의 민변 변호사가 시작은 같이 했지만 아쉽게도 한 달두 달 가니 남은 사람은 나와 김선수 변호사 정도였다.

 

일본의 당번변호사를 발견하다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나는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자유와 정의>를 구독했다이 잡지는 당시 내겐 일본 변호사계의 동향을 알아볼 수 있는 창구였다매달 그 달의 특집이 나왔는데 대부분 일본 변호사계의 핫이슈를 여러 변호사들이 최신의 정보에 입각해 쓴 논설(논문)이었다여기에서 나는 1992년 초 특집으로 다룬 일본의 당번변호사 제도를 읽었다.

 

그것은 수사기관에 일반시민이 체포구금되었을 때당사자나 가족이 변호사회에 연락하면 그날의 당번 변호사가 달려가서 조언을 해 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의 원류는 영국에서 찾을 수 있는 데, 영국에선  Duty Solicitor라고 한다형사법 학자인 니와야마 교수가 처음으로 이 제도를  당번변호사란 이름으로 일본 사회에 소개했다(니와야마 교수에 대해선 제6화 스승열전 참고).




일본의 당번변호사를 소개하는 필자의 글. 1992년 4월 9일 자 법률신문

 

당직변호사 제도를 만들다

이것을 읽고 나는 책상을 쳤다바로 이거다나는 즉시 일본의 당번변호사 제도를 소개하는 글을 써 <법률신문>에 기고했다. 글 말미에 우리 변호사회도 하루 빨리 이런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걸 잊지 않았다. 1992년 4월의 일이다.

 

얼마 뒤 내 제안이 정식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채택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민변 출신인 김창국 변호사가 회장으로 출마를 한 것이다나는 그 분의 선거참모가 되어 나의 제안을 선거공약으로 넣었다. 1992년 12월의 이야기다.

 

드디어 1993년 1월 말 서울변호사회의 회장 선거여기에서 김창국 회장은 민변의 젊은 변호사들의 지원을 받아 당당히 회장으로 당선되었다김창국 변호사의 회장 당선으로 나의 제안은 날개를 달았다새로운 집행부에서 나는 인권위원이 되었고 이 제도의 성안은 나의 오롯한 임무가 되었다.

 

과연 한국에서는 일본의 당번변호사가 어떤 모습으로 도입될 것인가당시 이 제도 도입을 위해 서울변호사회는 인권위원회 산하에 소위원회를 만들었다위원장은 안상수 변호사간사는 바로 나였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창원시 시장이 된 안상수 변호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알려진 검사 출신 변호사였다이 분이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에서 인권변호 활동 경력이 각광을 받았는데내가 기억하는 한이 분의 인권활동과 관련된 가장 큰 업적은 이 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활동한 것이었다.

 




1993년 5월 1일 당직변호사 제도 출범을 앞두고 만든 운영 매뉴얼


우리 소위원회는 40회 이상의 회의ㅡ아마도 변호사회 역사상 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이 정도의 회의를 한 것이 얼마나 될까?ㅡ를 소집하여 제도의 틀을 만들었다나는 이 소위원회에서 우리 제도의 명칭을 <당직변호사>로 할 것을 제안했고그 제도의 골격 초안을 만들어 냈다제도의 모든 프로세스를 담은 안내 매뉴얼도 손수 만들었다.

 

당시 일기장엔 그즈음 내가 이 제도와 관련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이것과 관련해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그 부분을 직접 옮겨 본다.

 

나는 김창국 회장의 첫 번째 공약인 당직변호사제도 운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며칠 전 나는 서울변호사회 기획위원회 간사에 임명되었고이어 당직변호사연구소위원회 간사역도 맡게 되었다현재 연구소위는 그간 내가 연구 검토하여 만든 시안(세부계획서운영규정)을 검토하고 있는데 다음 주면 연구소위 보고서가 완성될 것 같다.

당직변호사 제도 운영은 나의 젊은 시절 변호사로서 최대의 공익적 기여이다이것이 활성화된다면 한국의 변호사 사회형사사법절차에서는 일대 전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런 사업에 내가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크나 큰 보람이다돈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1993. 2. 12)

 



당직변호사 운영매뉴얼의 서문




나는 당직변호사 제도를 만들고 3년 간 이 운영을 위해 설치된 당직변호사제도 운영위원회의 간사로 일했다. 사진은 1996년 임무를 마치게 되자 서울변호사회에서 내게 준 감사패.


드디어 이 제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3년 5월 1일이었다당시 이 제도시행을 위해 만든 매뉴얼에서 김창국 회장은 이 제도 도입을 위해 수고한 당직변호사제도연구소위 변호사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시했다그 부분을 옮겨 본다.

 

당직변호사제도를 시행하기까지에는 박재승 본회 인권위원장과 당직변호사제도연구소위원회의 안상수 위원장 그리고 소위원회 위원인 김현박성호박찬운백승헌성민섭 변호사들과 사무국 나정수 홍보과장의 노고가 컸다특히 이제도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연구를 하여 왔고 또 소위원회 간사로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준 박찬운 변호사에게 이 지면을 통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당직변호사제도란 무엇인가?> 서문)

 

그렇게 만들어진 <당직변호사 제도>가 어느새 올해로 만 23년이 되었다. <당직변호사 제도>는 지금도 서울변호사회의 대표적인 공익인권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고 지난 20년 동안 서울을 넘어 전국 모든 변호사회로 전파되어 변호사회에서 실시하는 공익인권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발전했다.


내가 이 제도를 성안한 1993년의 상황과 지금은 법조 환경이 너무나 다르다. 당시 변호사 수는 전국적으로 3천 명이 채 안 된 상황이었다. 지금은 2만 명이 넘는다. 이젠 이 제도를 발전시켜 수사단계의 국선변호제도로 정착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렇게 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사람 누구나, 변호사가 필요한 경우, 대기하고 있는 변호사가 달려가 조언하고 조사에 동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선진국 수준의 인권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1992년 이후 일본 변호사회의 기관지 혹은 일반 법률잡지에 글을 써왔다. 이 글은 한국의 당직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법률시보>에 실린 것이다. 


일본에서 이름이 알려지다

나는 이 제도로 인해 일본 변호사계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일본에선 1992년 전국 52개 변호사회 전부가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일본 변호사들은 한국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시행된다고 하자 큰 관심을 보였다.  매년 이 제도와 관련된 심포지엄이 동경과 지방 여러 곳에 열렸는데, 한국 상황도 알고 싶다면서 나를 단골로 초청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여러 차례 한국의 당직변호사제도와 수사과정에서의 변호와 관련된 글을 일본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지금 생각해 보면 변호사가 된 지 2-3년 밖에 안 된 신출내기 변호사가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젊음이란 그래서 좋은 것이다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음껏 달렸으니 말이다.

 

당직변호사 제도를 만든 사람들

참고로 위 서문에서 김창국 회장이 감사 표시를 한 분들이 그 후 어떤 일을 했는지 간단히 소개한다. 일부는 예상 밖의 다른 길로 갔지만 대부분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박재승 인권위원장은 서울변호사회장을 거쳐 대한변협 회장이 된다진보성향을 띈 원로 변호사로서 2012년 총선에선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안상수 소위원장은 1990년대 후반 정치인으로 변신해 여당의 4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현재는 창원시장으로 일한


김현 변호사는 해상법 전문변호사로서 서울변호사회장으로 일했다박성호 변호사는 필자와 같이 한양대 로스쿨 교수로서 국내 최고의 저작권법 전문가백승헌 변호사는 민변 회장을 역임했고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성민섭 변호사는 숙명여대 법대로 옮겨 학장을 역임한 중진 법학자로 활동한


(2016.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