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9화 새로운 세계, 국제인권법에 도전하다

박찬운 교수 2016. 2. 16. 10:48

나와 민변(9)

 

9화 새로운 세계, 국제인권법에 도전하다

 
[이번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보다 깁니다. 저의 본업에 관계된 일을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줄이고 줄였습니다만 독자분들이 이런 곳에서 읽기에는 다소 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제10화도 국제인권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될 겁니다.]

 

 

1999년 국내에서 첫번째로 발간한 국제인권법 교과서(좌). 2015년 발간한 인권법 교과서(우)

 

왜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는가

내가 국제인권법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곰곰이 생각하면 내 성격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나는 평소 호기심이 많다. '무언가 새로운 세상에서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강한데 젊은 시절엔 그 강도가 지금보다 훨씬 셌다. 남이 하는 일을 똑 같이 따라가고 싶진 않았다.

이 전문화의 시대에 무언가 나에게도 전문적 영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어야 했을까? 헌법? 민법? 형법? 생각해 보니 그런 영역은 너무나 많은 인재가 박 터지게 경쟁하는 곳이다. 나도 그런 영역에서 전문화를 꿈꾸면서 수많은 인재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을까? 아니다.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1990년대 초 내가 국제인권법이란 분야에 빠져들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나는 민변 가입 초기부터 국제교류에 관심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변호사들과 교류했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아가 서울변호사회대한변협의 국제교류 업무에도 매우 열심히 참여해 다른 변호사들에 비해 대외적인 일을 많이 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2001년부터 2년간 서울변호사회의 섭외이사(국제이사)도 맡게 된다.

 

2004년 동경에서 열린 수사과정에서의 가시화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필자

 
국제인권법은 내 인권활동의 활로이기도 했다. 7화와 제8화에서 이야기한 행형제도당직변호사 제도도 따지고 보면 국제인권법을 배우는 중 얻어낸 소산이었. 90년대 우리 사회엔 해결해야 할 인권현안이 많았다. 나도 현장에서 인권 피해자들의 옹호자가 되어 뛰어다녔지만 머릿속에선 항상 제도(법) 자체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근본적 해결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뜯어 고친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해준 게 국제인권법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권제도와 현실을 국제사회가 만들어 놓은 보편적 인권기준에 맞춰 바꿀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 보편적 인권기준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내용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도입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늘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부해 나갔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국제인권법에 관한 전문도서가 거의 없었다. 자연스레 우리보다 먼저 이 분야를 알고 있는 일본 법률가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나는 일본 변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대해서는 <7화 스승열전>에서 이미 이야기했던 바다.

 

  국제인권이란 새로운 장

1990년대는 한국의 법률가에게 국제인권이란 새로운 장이 열리는 시기다. 이게 어떤 것이었을까? 국제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보편적 인권개념을 확인하고 그것을 제도화해 왔다. 세계인권선언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다만 그것은 국제법상 구속력 있는 조약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국제사회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이후 법적 구속력 있는 인권조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결과 많은 인권조약이 탄생한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이후 이러한 국제인권조약에 본격적으로 가입하는데, 그 중 기본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일명 A 규약)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일명 B 규약)1990년 동시 가입하고, 그 외의 인권조약에도 순차적으로 가입한다.

이들 조약에 가입하면 가입국은 정기적으로 조약에 규정된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지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고 해당 조약감독기구로부터 그 준수 여부를 검토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NGO 들은 정부보고서의 내용을 반박하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감독기구의 최종검토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국제인권 메커니즘을 실감나게 관찰한 것은, 우리나라가 1992B 규약에 따라 첫 번째로 제출한 정부보고서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 에 의해 검토될 때였다. 그 해 민변은 국내의 여러 인권단체와 연대하여 정부보고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제 인권상황을 설명하는 반박보고서(counter report)를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제출하고 로비활동에 들어갔다.

해방 이후 국내 인권단체가 유엔이란 장에 나가 대한민국 정부의 인권조약 준수여부를 따진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 작업은 나보다 연수원 2년 선배인 조용환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반박보고서를 읽어 보니 인권현실을 왜곡한 정부보고서의 문제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민변은 반박보고서를 제출하고 제네바에서 정부보고서가 검토되던
199210월 대표단을 파견한다. 최영도 변호사님을 필두로 천정배, 박원순, 조용환 변호사가 현지에 가서 인권위원회 위원들을 직접 만나 한국 인권현실을 전달했다. 나는 이 작업에 함께 참여하진 못했지만 지근 거리에서 선배 변호사들의 활동을 보면서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발견하였다. 것이야 말로 앞으로 내가 할 일이었다.

1996년 2월 동경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이 끝나고 이 책이 출판되었다. 오른쪽은 이 책에 실린 필자의 글

 

미국 유학을 결심하다

나는 국제인권법을 1990년대 초반 일본을 통해 배웠다. 그러다가 1995년 초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분야를 본 고장에 가서 직접 배워야겠다고 말이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직접적 계기인데, 나는 19952월 동경에서 열린 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와 국제법률가협회 공동주최로 열린 이 심포지엄은 일본의 대용감옥 폐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일본은 지금도 그대로이지만 구속 피의자가 기소가 된 이후에도 재판이 다 끝날 때까지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 전부터 피의자 인권을 침해하는 온상으로 국내외적으로 비판 받아 왔다. 일변연을 비롯해 일본의 인권단체들은 오래 전부터 그 폐지를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심포지엄에선 대용감옥을 국제인권적 차원에서 비판하고, 각국의 상황을 비교법적으로 점검하면서, 그 폐지를 촉구하였다. 나는 이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수사단계에서의 피의자 구금 상황을 소개하고 그것을 국제인권법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심포지엄에는 일본에서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참석했고, 영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도 유명 변호사들이 참석해 활발하게 토론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일본을 통해 배운 국제인권법의 한계였다. 일본 전문가들 불과 얼마 전에 그것을 접했기 때문에 전문성엔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내용을 파고 들어가면 그들이 내게 말해 줄 게 없었다. 내가 더 이상 일본에 의존하지 않고 국제인권법을 배울 필요를 느낀 것이다.

특히 영국에서 온 IBA 회장과 유엔 특별보고관을 역임한 말레이시아 법률가가 참석한 만찬에서 제대로 의사소통을 못한 게 내 개인적으론 유감스러웠다. 일본어의 한계였다. 내가 영어를 조금만 잘 할 수 있었다면 그들과 얼마나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을 지를 생각하니 아쉽다 못해 내 능력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내에서 눈을 감고 결심을 했다.그래, 미국으로 가자. 거기에 가서 공부를 하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당시 민변의 분위기였다. 1990년 대 중반 민변의 변호사들에겐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종래 유학이란 학문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외국 대학으로 나가는 것이지만 이 시기 민변 변호사들의 유학은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의 발동이었다. 많은 민변 동료들이 이 좁은 대한민국을 떠나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민변 변호사가 박원순 변호사. 그는 1992년 경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1, 그 다음 해 미국에서 1년을 보내고 돌아온다. 그 이후 그의 활동은 변호사의 그것을 뛰어 넘어 새로운 개념의 시민단체(참여연대) 운동으로 확장된다. 박변호사의 뒤를 이어 조용환 변호사도 유학을 떠난다. 이렇게 되자 초기 민변을 주도했던 젊은 변호사 그룹의 주요 멤버 대부분이 이 대열에 뛰어든다. 1990년대 말까지 유남영, 정미화, 김선수, 임종인, 이기욱, 김갑배, 이덕우, 한택근, 장주영 변호사 등이 미국으로 영국으로 1년 혹은 그 이상 체류하면서 공부를 한다.

민변 변호사들이 이런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변호사들의 경제적 상황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았던 것을 의미한다. 얼마간 사무실 문을 닫아도 돌아와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내게도 이런 분위기는 폭풍처럼 다가왔다. 나도 그 대열에 뛰어들어 넓은 세상에 나가 공부하고 싶었다.

 96년 초 내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올해 나는 큰 목표를 세워 실행에 옮기려 한다. 미국행! 바로 그것이다. 5월쯤 도미해 2-3년 지식과 경험을 쌓으려 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인재들을 만나 그들과 경험을 교류할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쌓아 보다 성숙하고 탄탄한 ‘나’를 만들어 낼 것이다.”(1996. 1. 3)

 
유학 그 어려웠던 시절

19965월 나는 식솔을 거느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이 서른다섯에 큰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둘째는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지만 누구 하나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첫날부터 실수의 연속이었다. 집을 찾아가는 것도 어려웠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음 없이 외국 생활을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 미처 몰랐다.

도착한 지 며칠이 안 돼 방에선 물이 샜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팩스를 이용해 주인에게 항의를 해 간신히 고쳤다. 서 너 달후 집을 옮겨야 할 때는 난생 처음 트럭을 빌려 내가 손수 운전해 짐을 날랐다. 얼마 되지 않은 보증금이었지만 주인이 그걸 내주지 않으려 해,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소송한다고 위협해 기어코 받아냈다. 영어를 잘 못하더라도 변호사는 변호사인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경험이라 생각하고 견뎌냈다.

오랜만에 하는 영어공부는 쉽지 않았다
. 학창 시절 영어를 꽤 했다 생각해 이 관문을 금방 통과할 줄 알았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은 없지만 영어 듣기는 좀처럼 궤도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학원에 가기 위해선 토플 점수를 올려야 하는 데 볼 때마다 그대로였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 대학에 비지팅 프로그램을 신청해 그 자격으로 오는 건데... 그렇지만 때는 늦었다. 사무실 문을 닫았고 식솔까지 다 거느리고 미국에 왔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간다는 말인가. 죽으나 사나 앞으로 Go! 할 수밖에 없었다.

 

노틀담 로스쿨 시절 캠퍼스에서. 뒷 배경&amp;amp;nbsp;건물이 로스쿨이다.



노틀담의 추억

우여곡절 끝에 토플 점수를 받고 인디아나 주에 있는 노틀담 로스쿨에 지원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로스쿨은 한국에선 잘 알려진 학교가 아니었지만 미국에선 최상위급 학교였다. 이 학교를 내게 알려 준 이가 지금 서울대 로스쿨에 있는 조국 교수다. 조교수는 당시 버클리 대학 로스쿨에서 박사과정(SJD)에 있었다. 조교수가 소개하는 노틀담 로스쿨 석사과정(LL.M.)은 국제인권법을 특화한 프로그램이라 내겐 안성맞춤의 코스였다. 더욱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기만 하면 학비도 면제고 매달 생활비까지 제공받는 특전이 주어졌다.

얼마나 마음졸였는지... 천우신조
! 입학이 결정되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들어온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후일 내 다음으로 이 프로그램에 들어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1992년 사노맹 사건의 주인공 백태웅 교수(현 하와이대 로스쿨).

노틀담 로스쿨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정 가운데 여성이 다이나 쉘톤 교수, 앞 줄 맨 왼쪽 남성이 파올로 카로자 교수

 

노틀담에서의 LL.M. 과정은 내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새로운 지식을 마음껏 흡수했다. 당시 노틀담엔 아주 쟁쟁한 교수들이 즐비했다. 국제인권법의 대가 중 한 사람인인 다이나 쉘톤(현 조지워싱턴 로스쿨 교수), 후일 미주인권위원회의 위원이 되는 젊고 유능한 교수 파올로 카로자(현 노틀담 국제인권 프로그램 디렉터) 그리고 미 법무성 검사출신으로 미국 최고의 국제형사법 교과서를 쓴 지미 그룰레 등등.... 나는 이들로부터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졸업장엔 우등졸업을 의미하는 cum laude가 표기되었으니 말이다.

 



1998년 5월 노틀담 로스쿨 LL.M. 과정을 졸업했다. 아래는 졸업증서.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다. 대표적인 친구가 나이지리아에서 온 콜라월레 올라니안(콜라)이란 친구다. 나보다 세 살이 아래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단짝이었다. 나는 이 친구를 통해 아프리카를 이해했고 그곳에 매우 우수한 친구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프로그램의 최우등(summa cum laude) 졸업생도 바로 이 친구였다. 콜라는 지금 런던의 엠네스티 국제사무소의 아프리카 선임 법률자문관으로 일한다. 2012년 가을 나는 14년 만에 그를 런던에서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졸업 당일 지미 그룰레 교수와 함께. 맨 오른쪽이 내 친구 콜라.



노틀담을 졸업하고 1998년 여름 나는 콜라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그곳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서 인턴십을 밟기 위함이었다. ICTY1990년대 과거 유고연방에서 일어났던 내전의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 임시 국제형사재판소다. 나는 그곳 검사실에서 반년 가량 수습을 받았다. 내가 했던 일은 과거 동경재판 기록을 찾아 어떤 법리로 일본 전범들을 처벌했는지를 정리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2014년 여름 16년 만에 헤이그 평화궁전을 방문했다. 여기가 바로 유엔의 사법기구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 곳이다. 나는 헤이그 시절 이곳에서 자료를 수집했다.

 

매일같이 콜라와 함께 재판소에 출근한 다음 자료를 찾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 평화궁전으로 향했다. 자취 생활을 했던 숙소에서 재판소까지는 다른 화란인처럼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신사복에 배낭을 메고 미국의 어떤 여학생이 주고 간 분홍색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헤이그 시내를 휘 젖고 다녔다. 생각해 보니 그 때가 내 인생의 봄날이었다. ! 그리운 내 봄날이여!

 

국제인권법 교과서를 쓰고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하다

1998년 여름과 가을 나는 헤이그에서 혼자 지냈다. 가족은 전부 서울로 돌아갔다. 긴 밤을 어떻게 지낼까? 나는 그곳에서 책을 한 권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배운 국제인권법을 어떻게 하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한국 사회에 선을 보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밤마다 원고지를 메워갔다. 이렇게 해서 그 해 말 귀국할 무렵엔 대충 국제인권법 책 초고가 완성되었다.

1999년 출간한 내 첫번째 국제인권법 책. 지금 읽어보면 내 놓기 부끄러운 책이지만 처음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신 세계를 개척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해 여름 나는 한국에 일시 귀국을 한다. 이 기간 나는 사법연수원을 찾아 가재환 원장을 면담했다. 이 분에 대해선 제1화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나는 가원장께 국제인권법을 소개하고 사법연수원에서도 교육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나는 당시 강의안 초안을 들고 가서 만일 내게 강의를 요청한다면 이렇게 강의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내놓았다.

가원장은 당돌한 내 부탁을 구원(?)도 잊고 흔쾌히 들어주었다. 나는 귀국 후 그 다음 해인 1999년 가을에 사법연수원에서 한 학기 동안 국제인권법 강의를 맡았다. 사법연수원 역사에서 처음 있는 강의였다. 그러는 사이 내 첫 번째 <국제인권법> 책이 탄생한다. 이것 역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국제인권법 교과서로 기록되었다.

 

1999년 제네바 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필자와 김선수, 한택근 변호사.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에서

 

민변의 국제연대위원장이 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변호사로 복귀하자 민변에선 내게 국제연대위원장을 맡겼다. 19995월의 일이다. 국제인권과 관련된 민변의 모든 업무가 내 책임이 된 것이다. 내가 위원장이 된 1999년은 B규약에 따른 정부보고서가 두 번째로 검토되는 해였다. 앞서 말한 조용환 변호사가 했던 일을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첫 번째의 경험을 되살리고 거기에 수 년 간의 노하우를 덧붙여 반박보고서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제네바로 떠났다. 나와 김선수 변호사가 민변을 대표해 서울에서 떠났고 영국 옥스퍼드에서 유학 중인 한택근 변호사가 현지에서 합류했다.

1999년 민변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제출한 반박보고서)좌), 인권위원회 검토회의가 끝나고 민변 대표단이 작성한 활동 자료집(우)

 

당시엔 민변이 유엔의 협의자격이 없었으므로 유엔 내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협의자격이 있는 국제 NGO의 힘을 빌려야 했다. 국제인권연맹(FIDH)라는 국제 NGO가 우리의 파트너로 체류기간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간 반박보고서와 그것을 요약한 자료 등을 활용해 자유권규약위원회(HRC) 위원들을 설득했고 다른 국제 NGO의 협조도 구했다. 그 결과 당시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HRC)는 우리의 정보제공과 권고요청을 대거 받아들였다.

유엔의 인권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내 인권문제를 국제무대에 가지고 가는 것을 대외 의존적 인권운동이라고 비난을 했다
. 우리의 의도는 인권의 보편성이란 신념 아래 우리의 인권상황도 국제기준에 맞추어 질적으로 개선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국제무대에서 우리 정부가 진지하게 토론해 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시절 우리 정부는 대외적으로 대통령을 인권 대통령으로 홍보만할 뿐 유엔무대에서 어떤 인권 토론을 해야 할 지 잘 몰랐다. 내가 보는 바로는 갈 길이 멀었다. 내가 이 활동을 마치고 그해 말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 그에 대한 단상을 이렇게 썼다.

1999년 12월 필자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회의를 다녀 와 &amp;amp;lt;신동아&amp;amp;gt;에 쓴 글



보통 인권위에서 각국의 인권보고서가 검토될 때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청문형의 회의인데 이것은 보통 인권후진국의 보고서가 검토될 때의 모습이다. 위원들은 정부대표들에게 실랄한 비판조의 발언을 하고 대표들은 이를 방어하는 데에 급급하다. 대표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몇 시간의 가시방석과 같은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땀을 흘린다. 다른 하나의 모습은 소위 생산적 토론형(constructive dialogue)'이다. 대표들은 위원들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자국의 인권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성실하게 답변한다. 특별히 공격하고 방어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할까. 아직은 후자 보다는 전자에 가까운 느낌이다. 국제사회가 우리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에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인권대통령이라는 말은 정부가 스스로 만들어 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인권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권고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때 저절로 우리의 대통령을 인권대통령이라고 국제사회가 부르게 될 것이다.”

민변의 국제연대위원장으로서 나는 B 규약뿐만 아니라 2000-2001년에는 A규약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때는 민변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인권단체가 네트워크를 만들어 반박보고서와 현지로비를 했다.


2000
년대에 들어와 민변의 국제인권활동은 양적 질적 도약을 하게 된다. 내 뒤를 이어 한택근, 김병주, 오재창 변호사 등이 국제연대위원장을 맡았고 민변 회원의 증가로 국제인권활동을 원하는 회원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선 황필규, 장영석 변호사 등과 이동화 간사와 같은 유능한 인재가 합류하고 유엔의 인권레짐이 변화하면서 민변의 국제인권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민변의 국제인권 활동은 더욱 전문화되었고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뒤를 이어준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2016.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