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7화 감옥의 인권수준이 그 나라의 인권수준이다

박찬운 교수 2016. 2. 12. 06:20

나와 민변(7)

7화 감옥의 인권수준이 그 나라의 인권수준이다

ㅡ손두팔과의 약속을 지키다ㅡ




[이 긴 글이 독자들에게 어떤 관심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평생 나하고는 상관 없는 곳이 감옥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제한 받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정말 죄를 지어서 그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후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자라 해서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입니다. 어떤 나라의 인권수준을 알려면 감옥에 가보라는 말은 세상사에서 진리입니다.]








1990년대 초 행형제도에 한참 관심을 갖고 동분서주할 때의 내 모습




A와의 만남
내가 감옥에 관심을 갖고 그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것은 한 사건에서 강한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991A 피고인의 항소심을 맡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사건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하면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 같아 사건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혹시나 그 가족이 이 글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A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첫 면회하는 날 나는 깜짝 놀랐다. 온몸은 포승줄로 결박된 상태였고 거기에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는 가죽으로 된 수갑(혁수정)이 채워져 있었다.

아니 이렇게 하고 어떻게 지냅니까? 밤에도 이 상태로 잡니까?”
, 정말로 미칠 지경입니다. 밤에 잠을 잘 때도 이렇게 있으니까 몸이 마비됩니다. 못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 방성구(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머리에 모자처럼 씌우는 보호구)를 씌웁니다. 가끔 방안에 있는 동료들이 몰래 수갑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죽는 것보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1991년 내가 면회한 A씨가 차고 있었던 혁수정. 일본의 감옥사전에서 발견. 이런 것이 모두 일본 식민지의 잔재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감정이 복받쳤다. 몸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내 몸이 저렇게 결박되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갑자기 몸이 굳어왔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이때부터 감옥에 갇힌 자의 처우를 고민했고 어떻게 하면 그들도 인권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이런 고민을 할 즈음 한국 인권사에서 길이 남을 헌재결정이 하나 선고되었다. 이것은 미결구금 상태의 피구금자(미결수)가 변호인과 접견 할 때는 교도관 등이 입회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91헌마111)이었다.






 변호인(辯護人)의 조력(助力)을 받을 권리(權利)의 필수적 내용은 신체구속(身體拘束)을 당한 사람과 변호인(辯護人)과의 접견교통권(接見交通權)이며 이러한 접견교통권(接見交通權)의 충분한 보장은 구속된 자와 변호인의 대화내용에 대하여 비밀이 완전히 보장되고 어떠한 제한·영향·압력 또는 부당한 간섭없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접견(接見)을 통하여서만 가능하고 이러한 자유로운 접견(接見)은 구속된 자와 변호인의 접견(接見)에 교도관(矯導官)이나 수사관(搜査官) 등 관계공무원(關係公務員)의 참여가 없어야 가능하다. (헌재 91헌마111)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로선 아주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서 변호사는 교도관의 어떤 간섭도 없이 자신의 의뢰인에 대해 자유로운 접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결정을 보고 교정시설 내의 처우 중 많은 것들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는 경우, 제소자들의 인권개선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감옥연구에 열정을 태우다

감옥연구가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93년 초 민변의 김창국 변호사님이 서울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되고나서부터다. 나와 몇몇 민변 동료변호사들은 민변 내에 행형제도연구팀을 만들고, 김변호사님이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서울변호사회 인권위에 행형제도연구소위원회를 둘 것을 제안했다. 나아가 대한변협에도 인권위 산하에 행형제도연구소위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결국 내가 소위 간사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서울변호사회와 대한변협에 행형제도연구소위원회를 만들도록 제안한 이유는 변호사 단체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서울회는 대한변협보다 예산이 많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을 받기는 변협보다 더 쉽고 대한변협은 전국단체이기 때문에 대외적 활동에서는 서울변호사회보다 좋은 점이 있었다.

이렇게 민변을 비롯해 서울변호사회와 대한변협에 행형제도연구소위가 가동되면서 나도 바빠졌다. 우선 우리 행형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 해결을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분야에 대해 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혹간 형사 정책적 차원에서 다루어진 연구가 있다고 해도 실무가의 눈으로 볼 땐 우리의 제도와 현실을 고치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 되었다.


1993년 나는 감옥 관련 일로 바빴다. 당시 교정당국은 변호인과 재소자 사이에 아크릴 판을 세워 접견을 제한했는데 이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자 변협에선 헌재에 의견서를 냈다. 나는 그 의견서를 집필했다(왼쪽). 그 해 영등포구치소선 심각한 인권침해사건이 터졌다. 나는 그 사건의 변협진상조사위원으로 참여진상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오른쪽).

나는 일본상황을 검토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행형법은 일본의 감옥법에서 유래된 것이고 행형 상황이 기본적으로 일본과 대단히 유사했기 때문에 일본상황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제도를 고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일본은 감옥법 개정운동이 오래 전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일본 법무성이 구금 2법안(감옥법을 두 개의 법으로 나누어 개정 법률을 만든 것임)이라는 것을 내놓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피구금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어 변호사 단체가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는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연)의 정기월간지 <자유와 정의>를 통해 알았다.


19936월 나는 변협에 출장신청을 했다. 일본을 방문해 일본 상황을 청취하고 자료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여담이지만, 요즘 변호사들은 이런 것이 낯설겠지만아니 연배 많으신 변호사들도 거의 경험이 없긴 마찬가지일 것이다나는 변호사회 임원도 아니면서 종종 변협과 서울변호사회에 출장신청을 해 경비를 제공 받았다. 변호사가 인권이란 공익을 위해 외국을 나가는 데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만들어진 변호사회가 그것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이 출장을 마치고 쓴 보고서가 19936<인권과 정의>에 실렸는데 그것을 보면 당시 출장목적을 이렇게 쓰고 있다.

변협 행형제도연구소위는 현재 행형제도를 연구함에 있어 1차적인 사업으로 국제인권기준에 비추어 본 한국의 행형제도를 연구하고 있으나 그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 이에 이미 10여 년 전부터 감옥법 개혁운동을 정열적으로 펼치고 있는 일본의 변호사단체로부터 자료협조를 받고 그들의 경험을 청취하며, 사계의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교환을 할 필요성이 있어 방문하게 되었다.”(156)

원래 이 출장은 김선수 변호사와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여행사의 실수로 김변호사의 비자가 출발 일까지 나오지 않아 나 혼자 출발하였다. 나는 이 출장을 통해 일변연과 동경 제2변호사회의 감옥법 개혁을 주도하는 주요 변호사들을 거의 다 만났다. 거기에다 덤으로 일본의 인권변호사 중 리더급 변호사들도 만났다.


이게 후일,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와 일본 인권변호사들 간의 우정의 기초다. 귀국하면서 나는 일본 변호사회로부터 꽤 많은 자료를 확보했다. 일본변호사 단체가 작성한 22개의 논문 또는 보고서, 행형분야에서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이 쓴 9권의 책을 가지고 왔으니.

행형 관련 책을 출간하다
이 출장을 다녀온 후 나는 우리의 행형에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는 그 현실이 국제인권수준에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수용자 처우에 대한 법적 기초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수용자에 대한 처우는 모든 게 소장 맘이었다. 셋째는 형이 확정된 사람(수형자)에 대한 처우가 사회복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형벌의 취지가 수형자를 교육시켜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내용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런 분석 아래 국제화, 법률화, 사회화라는 3가지 방향이 우리 행형제도를 개선하는 기본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나는 우선 변호사회의 행형제도연구소위가 빠른 시간 내에 우리 행형현실을 국제인권규범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나와 박승옥, 김선수, 유선영 변호사는 수시로 모여 내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자료를 가지고 스터디한 다음 이중에서 우리나라 행형에 가장 도움이 될만한 국제인권원칙을 번역하기로 했다.







1993년 발간한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

거기에다 나와 김선수 변호사는 두 개의 논문을 준비했다. 나는 국제인권원칙으로 본 한국행형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이란 글을, 김변호사는 국제인권법의 성립과 계보 및 효력’이란 글을 썼다. 이렇게 해서 중요 행형 관련 국제인권원칙 번역문과 2개의 논문이 마련되었고 이것은 서울변호사회의 지원을 받아 그해 10<국제인권원칙과 한국의 행형>(역사비평사)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김창국 회장은 이 책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행형제도는 7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일본의 감옥법이 그 뿌리이기 때문에 현재의 국제수준에 비추어보면 대단히 뒤떨어진 측면이 많다. 이러한 우리의 제도를 개선하는 방향은 무엇보다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인정되는 국제인권법의 수준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1994년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의 용역을 받고 제출한 보고서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감옥 부조리를 조사하다

행형제도 연구와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1994년 감사원 용역 건이다. 당시 감사원엔 부정방지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그 위원회로부터 행형제도 부조리 실태 및 방지대책이란 제목의 연구용역을 받은 것이다. 그런 용역을 받을 수 있던 것은 그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김창국 변호사님이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용역을 받고 나서 단순히 교정기관 내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불법 혹은 부당행위) 현상을 밝히고 그 대책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형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행형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교정기관 내부에 정통한 사람들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니 뜻있는 교도관들의 참여가 절실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동참할 교도관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일을 당시 막 만들어진 인권단체 인권운동사랑방서준식 선생의 도움으로 끝낼 수 있었다. 서준식? 지금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름이다. 70년 대 초 그의 형 서승 선생과 함께 간첩사건으로 구속되어 20여 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다가 전향하지 않고 출소해 인권단체를 만든 바로 그 인물이다. 요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출신 문필가 서경식의 형이기도 하다.


당시 서준식 선생은 오랜 수형생활을 한 경험으로 교도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교도관 중에서도 소위 민주교도관이란 분들이었는데, 이분들이 교정기관의 각종 비리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1999년 발간한 <한국 감옥의 현실>


우리나라 최초의 감옥백서... 국제인권원칙
행형제도 연구와 관련해 또 하나 언급할 것은 1999년 감옥현실에 관한 보고서 <한국 감옥의 현실>의 발간이다. 감옥인권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유의 연구는 민간차원의 감옥연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인권단체 관계자들과 공동으로 작업한 것으로 우리나라 감옥연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천주교인권위원회가 수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세한 설문조사를 했고, 이것을 토대로 연구자들이 우리나라 행형시설의 인권수준을 분석하고 그 개선방안을 제안했다.

나의 행형제도 연구는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 재직 시절 한 권의 책을 꼭 번역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1990년대 중반 일본을 오가면서 발견한 국제형사개혁위원회(PRI, Penal Reform International)이라는 국제 NGO가 만든 Making Standards Work라는 책이었다. PRI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만들어 낸 각종 피구금자 처우와 관련된 원칙을 모아 분야별로 체계화하고 설명한 책자였다.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출간한 <국제피구금자처우준칙>



이것은 원래 PRI1995년 카이로에서 열린 제9회 유엔범죄방지위원회에서 각국 정부와 NGO에 배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알려진 문건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96년에 완역본이 출간되어 행형관계자들이 행형관련 국제인권기준을 알아보고자 할 때 기본서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인권위에서 번역출간하기로 결정하고 번역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인권위를 나올 때까지 그 번역은 완료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을 내 손에 넣은 것은 퇴직한 지 1년이 지나서다. 인권위 담당자가 전임국장이 그토록 번역하고 싶었던 책이란 것을 알고 계속 챙겼던 모양이다.


나는 퇴직 전 이 책이 나오면 사용할 발간사까지 손수 써 그 담당자에게 맡겼는데 책을 받아보고 첫 페이지를 넘기니 내가 쓴 발간사가 그대로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담당자였던 오유진 선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손두팔과의 약속을 지키다

글이 길어짐에도 이곳에서 꼭 하나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있다. 손두팔이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재일 한국인이다. 그는 1951년 코베에서 일어난 강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 사건의 범인으로서가 아니라 구치소 내에서 재소자의 인권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서이다.


그는 무학에 가까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년 대 일본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실태를 고발하고 그것을 법정으로 끌고 갔다. 변호사 없이 스스로 공부해 자신에게 부과되는 구치소 내의 각종 반인권적 조치에 대해 모조리 법의 심판을 받게 했던 것이다.


사형수로 12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가차 없이 교정당국을 법정의 피고석에 앉혔다. 그는 일찍이 사형집행이 위헌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집행정지를 신청한 바 있고, 판사들과 같이 자신이 처형될 교수대를 직접 검증까지 하였다.



한양대 로스쿨 공익인권센터의 저널을 통해 손두팔의 히라미네 판결은 완역되었다. 나는 여기에 그 <해제>를 썼다.


손두팔이 벌인 법정소송은 무려 20건나 되는 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게 1958년 오사카지방재판소가 선고한 이른바 히라미네 판결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행형사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전설적 판결이다. 나는 이 판결 전문을 90년대 중반 일본 동경의 카이도류이치 변호사로부터 구했다. 200자 원고지로 500장 이상이 되는 엄청난 분량의 판결문이었다.


당시 나는 그 판결문을 읽어보고 전체를 조속히 우리 말로 번역해 보리라 결심했다. 그것이 손두팔이란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두 차례 손두팔을 소재로 한 글은 썼지만 전문번역은 사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완역이 이루어진 것은 이 판결을 입수한 지 18년만인 2010년이었다. 내가 센터장을 맡고 있는 우리 로스쿨 공익인권센터에서 번역한 것이다. 마침 연구원으로 들어온 정해인 박사가 일본어에 능통한 지라 나는 정박사에게 이 번역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히라미네 판결 전문이 번역되었고 그것을 센터가 발행하는 <공익인권의 이론과 실제>에 실었다.


나는 그 저널에 <히라미네 판결 해제>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본다.


"(이 판결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 일본에서 일어난 초유의 감옥 반란사에 관한 이야기다. 놀라지 말라. 그렇다고 감옥에서 무슨 폭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니. 사법적 절차 내에서 일어났으니 흔히 말하는 반란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감옥에서라면 누구나 받을 수밖에 없는 처우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고 그것을 위해 공권력과 처절하게 투쟁하였으니 실질적인 반란이다. 그런 투쟁은 그 때가지 없었지만 그 이후도 없었다. 아니 인류사에서 또 다시 있기 어려운 투쟁이라 나는 감히 생각한다."


감옥의 변화에서 보람을 찾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행형제도와 상황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제 행형법은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현실도 많이 달라졌다. 이 변화 과정엔 국가인권위원회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재소자들이 인권침해가 있을 경우 인권위에 쉽게 진정함으로써 구금시설엔 이제 엄한 시어머니가 생긴 것이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내가 연구했고 만들었던 여러 가지 제언이 알게 모르게 사용되었으니 나로선 큰 보람이었다.




1993년 변협 <인권과 정의>에 게재한 행형관련 논문, 나는 이 즈음 행형제도 개선의 방향으로 국제화(우리 행형수준을 국제인권수준으로 격상시킬 것), 법률화(피구금자에 대한 처우는 원칙적으로 법률에 의해 할 것), 사회화(수형자의 처우 내용은 가급적 재사회화에 초점을 맞출 것)를 제시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내 순수한 열정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던 시절이었다. 재소자들의 인권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교도소와 구치소를 방문했다. 재소자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들었다. 일본을 왕래하면서 감옥 전문가들을 만나 토론을 벌였다. 제도개선을 위해 책과 논문을 썼다.


이런 일을 함께 했던 친구들의 모습도 하나씩 기억난다. 민변의 동료 변호사들, 서준식 선생을 비롯해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해 준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들... ,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16.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