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10화 내 친구 메르샴, 내 친구 내툰나잉

박찬운 교수 2016. 2. 19. 06:07

나와 민변(10)

 


10화 내 친구 메르샴, 내 친구 내툰나잉

-난민변호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민변, 난민업무를 시작하다

1999년 민변 국제연대위원장이 된 이후 몇 년 간 가장 열심히 일한 게 난민분야다. 내가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고 해도 처음 이 분야에 손을 댔을 무렵 내가 난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어떤 변호사도 이 분야에 관심을 두진 않았을 것이다. 1999년 어느 날 민변에 한 외국인이 찾아왔다. 명함을 보니 유엔 난민기구(UNHCR,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의 동경 사무소 법무담당관이었다.

 

박변호사님, 민변이 우리 난민기구와 협력해 한국의 난민신청인을 법률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요?”

유엔 난민기구가 어떻게 해서 저희 같은 민간 법률가단체를 찾아 이런 요청을 하는 건가요?”

한국에는 현재 유엔 난민기구 사무소가 없습니다. 동경사무소에서 한국의 난민업무도 함께 담당하고 있는데, 난민신청과정에는 반드시 법률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희들이 한국의 변호사회도 접촉해 의사를 타진해 보았지만 이런 문제에 아직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민변에 이런 협력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유엔 난민기구의 이런 요청에 나는 며칠간 고민했다. 과연 우리가 난민기구와 협력해 난민신청자들에게 적절한 법률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까? 저런 업무를 누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민변 국제연대위에는 이런 업무를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의 위원장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역할을 할 때였기 때문에 역량을 초과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선뜻 수락할 순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민변이 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영역이었지만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대한민국에 들어 온 외국인이 우리 정부에 난민신청을 할 때 도와줄 법률가를 민변 아닌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유엔 난민기구의 협력관계 요청이 있고나서 얼마 후 민변과 난민기구는 공식적으로 협약을 체결했다. 그 협약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난민기구가 특정 난민신청자에 대해 법률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해 민변에 그 지원을 요청하면 민변은 그에 대해 법률적 지원을 한다' 는 것이었다.

 

열악했던 난민보호, 90년대 말의 상황

이 당시 난민보호와 관련되어 국내의 상황을 잠시 회고해 보자.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난민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70년 대 중반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발생한 보트피플을 난민으로 보호했을 때였다


당시 해상에서 구조된 베트남 보트피플은 국내로 들어와 잠시 생활하다가 미국 등지로 떠났다. 이런 사람들 외에 우리나라가 난민을 보호한 예는 70-80년대에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함으로써 향후 국내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난민에 대해 그 보호를 국제사회에 약속한다.

 

민변이 난민기구와 특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후 1994년부터 극소수의 난민신청이 진행되고 있었다. 1999년까지 우리 정부에 난민신청된 총 건수는 대략 60여 건 정도에 이르고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그 때까지 단 한 명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았다.




내 친구 메르샴. 그는 2015년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내 친구 메르샴, 국내 최초 난민소송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민변이 난민기구와 특별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협약이 체결되고 곧 이어 나는 첫 난민사건을 만난다. 내 생애 최초의 난민사건이었다. 이제 그 사람 이름을 밝혀도 될 것 같다. 그의 이름은 메르샴, 이라크 바그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쿠르드 출신이었다. 사담 후세인 시절 쿠르드족에 대한 후세인의 박해를 피해, 이라크를 탈출했고,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몇 년 공장생활을 전전하다가 난민신청을 한 사람이다.

 

그는 1999년 법무부로부터 난민신청이 기각되자 난민기구를 통해 나를 소개받고 찾아왔다. 당시 난민기구의 요청도 있고, 본인 희망도 그런지라, 나는 난민신청을 기각한 법무부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최초의 난민소송이다. 처음 소송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노하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국내에선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 사건을 진행하기 위해선 이라크에서의 쿠르드족의 일반적인 박해 상황과 그가 이를 피해 탈출을 한 사실 그리고 만일 그가 본국으로 송환되면 박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등을 입증해야 했다. 자료도 부족했고 있다고 해도 모두 외국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송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재판부에 원고본인신문을 신청해 원고가 법정에 나와 증언을 했지만 아랍어를 사용하는 원고의 의사를 정확하게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메르샴 관련 소송기록과 소장 첫 페이지. 나는 변호사를 2005년 초 변호사를 그만두면서 수백 건의 사건기록을 폐기처분했다. 그러나 이 소송기록은 남겨두었다.


몇 달이 지나 1심 판결 선고일. 긴장된 순간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청구기각. 하늘이 무너질 듯했다. 얼마 뒤 나는 민변의 기관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나의 친구 M’이란 제목의 시론을 썼다. 그 맨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M, 사랑하는 친구여.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만도 어떨 때는 행복하지 않은가. 자네는 아직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고,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굳은 의지가 있지 않은가. 신은 반드시 자네를 지켜줄 것으로 믿네. 되는 것이 없다며 우리의 인생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 우리에게 때는 오지 않겠는가. 부디, 친구로서 부탁하네만, 그래도 좀 버티게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리.”(나의 친구 M에게)

 

다행스럽게도 메르샴 건은 그 후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1심 이후 상소해 지리한 법정다툼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그는 한국 여인과 결혼을 했다. 이것을 이유로 나는 법무부에 인도적 지위를 그에게 부여할 것을 요청했고 법무부도 이를 받아주었다. 그 후 몇 년 뒤 그는 귀화요건을 채운 다음 법무부에 귀화신청을 해 한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는 피부색은 다르지만 이제 당당한 한국인이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해 성공회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작년엔 드디어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중동정치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제 그는 한국 땅에서 교수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난민 출신의 최초의 대학교수가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친구 메르샴, 브라보!




내 친구 내툰나잉. 그는 젊은 시절 한국에 와 조국 미얀마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내 친구 내툰나잉, 부디 극락왕생하길...

메르샴에 이어 민변에 들어온 난민사건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도의 미얀마 민주민족연합(NLD) 한국 지부 회원들의 집단 난민신청사건이다. NLD 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미얀마 야당으로 한국에선 부천을 중심으로 한국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회원인 샤린이라는 친구가 불법체류자로 단속돼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에 보호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해졌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인천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송환을 막기 위해 다른 NLD 회원도 함께 난민신청을 했다. 전부 21명이 했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NLD 난민신청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우리나라 난민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난민신청인들은 대체로 본국과의 관계에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게 상례인데, 이들은 예외였다. 거침없이 미얀마 군부정권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 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에 신경쓰는 정부로서는 골치 아픈 사람들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NLD 회원에 대해 난민인정을 한 게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우리 정부도 전향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해, 한 명 두 명 난민인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는 내툰나잉이라는 젊은이였다. 양곤 대학 출신의 인텔리로 한국 NLD의 리더 중의 하나였다. 나는 오래 동안 이 친구와 교유했다. 그런데 그가 2015년 9월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주검이 있는 부천 석왕사를 찾아 이런 추모사를 했다.

 

내 친구 내툰나잉!

내툰나잉! 이 낯선 이름이 제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입니다. 버마 친구들이 한국에서 NLD 지부를 결성하고 난민신청을 하였을 때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난민지원을 시작한 변호사였습니다. 내툰나잉과 그의 친구들은 제게 두 번째로 찾아온 난민친구들이었습니다.

 

내툰나잉! 그는 제게 버마와 미얀마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버마의 젊은이들이 머나 먼 이곳 대한민국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 머리 속에 있는 버마는 모두가 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내툰나잉!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미소를 나누는 친구였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습니다. 저는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만나, 버마의 내일을 위해 일하길 빌었습니다.

 

내툰나잉! 얼마 전이었지요. 우연히 2호선 건국대역에서 만났습니다. 밝은 미소로 곧 고국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언젠가 한 번 가겠다고 했지요. 우리는 버마의 이곳저곳, 특히 불교성지 바간을 함께 여행하자고 약속했습니다.

 

내툰나잉! 어찌 벌써 갔습니까? 무엇이 그리도 바빠 이렇게 황급히 갔습니까? 당신의 미소 뒤에 숨어 있었던 아픔을 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을 조금이라도 자주 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저의 나태함을 후회합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당신은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3년 동경에서 열린 난민 심포지엄에서 필자와 함께 참석한 민변의 김기연 간사


출중했던 김기연 간사

민변의 국제연대위원회가 난민업무를 본격적으로 하는 데에는 김기연 간사의 역할이 컸다. 아마 그녀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내가 이 업무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김간사는 영어 실력도 출중했고 일을 스스로 찾아 해결하는 매우 능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민변 사무실과 내 사무실을 오가면서 나와 현안을 의논해 가면서 일을 처리했다.

 

난민 업무 외에도 김간사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은 그녀의 노력으로 민변이 유엔의 특별협의자격 NGO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자격은 민변이 유엔을 무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격인데 당시 국내엔 이 자격을 갖고 있는 NGO가 매우 드문 상태였기 때문에 민변으로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간사는 바로 이 자격을 얻는 데 수훈갑이다.

 

김간사는 수년 간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일을 하다가 외국으로 진출했다.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그녀는 제네바와 방콕을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 국제인권전문가로 성장했다. 2년 전엔 공부 겸 재충전을 한다고 미국 하버드 케네디 스쿨로 떠났다. 현재 그녀는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NGO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국제네트워크(ESCR-NET)에서 일하고 있다. 김간사의 무운장구를 빈다.




2003년 동경에 갔을 때 유엔 난민기구를 방문, 대표를 포함해 주요 스태프들과 함께 기념촬영

 

민변 난민지원위원회

2001년 내가 민변 국제연대위원장 업무를 끝냈을 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나도 난민업무에서 졸업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도저히 그럴 여건이 아니었다. 내가 계속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원장이 아니면서 그 일을 계속하기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위인설관 격으로 민변 내에 새로운 조직을 하나를 만들었다. 난민지원위원회라는 새로운 위원회였다.

 

나는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국제연대위원회의 난민업무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국제연대위원장 업무를 끝내고서도 3년간이나 이 위원회를 이끈 것이다. 나는 이 위원회를 민변회원으로만 꾸리지 않았다. 외부의 전문가와 활동가를 포함시켜 위원회를 구성했다. 가톨릭대학 법학과의 장복희 교수(현 선문대 교수), 난민보호 단체 피난대표 이호택 선생, 난민기구의 정현정 선생 등이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나는 2003년 6월 유엔난민기구의 수장 루버스 고등판무관 방한 시 그가 머문 하야트 호텔에서 단독 면담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난민업무를 했던 내 지위는 아주 묘한 것이었다. 이것도 비사라면 비사인데, 나는 민변의 난민지원 책임자로 난민신청자들의 난민인정을 법무부에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법무부의 난민인정 업무에 직접 가담했다. 어떻게 보면 이익충돌(conflict of interests)의 상황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나는 당시 법무부 난민인정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 중이었다. 이 위원회는 당시 법무부장관의 자문기구였지만 사실상 난민인정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구였다.

 

나는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회의가 열릴 때마다 적극적으로 난민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위원회 바깥에선 난민신청자들의 지원자로서 활동을 했다. 지금 같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당시엔 난민업무를 이해하는 법률가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잘 아는 법무부도 내게 위원으로 일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2006년 학교에 온 다음에도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2007년 우리 대학은 유엔 난민기구와 MOU를 체결하고 난민법 강의 등을 하기로 했다.

 

난민업무로 동분서주 

내 난민업무는 변호사 시절 하이라이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짧은 지면에 그 시절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을 일일이 정리하긴 어렵다. 4-5년 간 나는 난민문제로, 낮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밤엔 그것을 글로 정리했다. 2001년엔 대한변협 인권보고서에 처음으로 난민인권상황을 보고함으로써 난민을 법조단체가 주목하는 인권보호 대상으로 만들었다.


난민법을 공부하기 위해 유엔 난민기구가 이태리 산레모에서 주최한 난민연수와 국제 심포지엄에 2번이나 참석했다. 일본의 난민법 전문가들과 교류하기 위해 일본에서 열린 워크샵과 심포지엄에도 여러 차례 참석했다. 이 때 만난 카나가와 대학의 국제법 교수 아베코키 교수와는 지금도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일본에서 책을 낼 때나,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그는 내게 많은 자료를 제공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연구실까지 사용토록 해 주었다.





2000년 가을 나는 이태리 산레모 국제난민법 코스를 다녀왔다. 사진은 그 이수증


나의 난민관련 업무는 변호사 시절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거기에서도 난민업무를 계속한다. 내가 정책국장이 된 이후 인권위는 주요 정책권고 대상 중 하나로 난민정책을 선정했다. 이로 인해 난민들의 인권상황실태조사가 이뤄졌고 그에 기초해 정부에 난민인권보장을 위한 전반적인 난민정책권고를 하게 된다. 나는 이 과정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마무리했다.

 

17년간의 변화, 아직 길은 멀다

내가 난민분야에 손댄 지 17년이 지난 오늘 여러 상황을 점검해 보니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독자적인 난민법이 만들어져 난민보호에 대한 체계가 어느 정도 선진화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제적으로 보면 아직 터무니 없는 수치지만, 17년 전 0명이었던 난민인정자가 이제는 400여 명에 이르니,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더욱 난민을 지원하는 법률가나 지원단체가 늘어났다는 것은 이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으로서 매우 보람스런 일이다. 변호사 중엔 황필규 변호사와 김종철 변호사, 이 두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황변호사는 민변의 국제연대 분야를 이끄는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출중한 영어 실력을 배경으로 난민 분야를 비롯 국제인권 전반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난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김종철 변호사는 변호사를 개업하자마자 외국인 인권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으로 난민분야에서 특별히 공로가 크다이 외에도 민변의 여러 변호사들이 난민보호를 포함해 외국인 인권보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다. 우리보다 5분의 1밖에 안 되는 인구를 가진 스웨덴이 연간 6만 명 정도의 난민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민문제는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이고 여기에서 대한민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난민문제에 대해 좀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법률가들이 앞장 서야 한다. 이게 바로 내가 아직 뒷 방에서 옛 일이나 회고할 수 없는 이유다.


(2016.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