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사상

‘쓸모없는 것’에 대한 찬양

박찬운 교수 2015. 9. 26. 17:58

‘쓸모없는 것’에 대한 찬양





세월호 선체 인양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거 인양하는 데 수천억 원이 든답니다. 그 돈도 모두 우리 국민 세금이에요. 그거 인양한다고 해서 죽은 아이가 살아오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그런 돈을 써야 하나요? 그저 죽은 아이는 가슴에 안고 사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의 지적 족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태어나서 무엇을 공부했고, 어떤 책을 읽어 왔는지... 보나마나 답은 나와 있다. 그는 공리주의의 주술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의 정의는 이것 하나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돈으로 계산하여 이익이 되면 그게 진리인 게다. 힘이 있으면 그게 최고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겐 유용하지 않는 모든 것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는 시간을 너무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사색 자체도 시간낭비라 생각한다. 유용성을 절대가치로 아는 공리주의는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모든 걸 쓸데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교향곡보단 망치가, 시보다 칼이 더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분명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페친 중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는 어느 박사 연구원이 있다. 그가 며칠 전 페북에 이런 글을 썼다. 잠시 그의 글을 보자(내가 조금 윤문했다).


“회사 앞에 빼곡하게 서있는 임원용 자가용이 대기하고 있는 걸 보면서, 성공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나도, 상무되고, 전무되고 부사장 될까. 검사장이 되고, 대법관이 되고,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고... 큰 차타고 사람들은 굽신거리고...(그게 대한민국이지!)
내가 하는 일은 캐나다에서나, 스웨덴에서, 미국에서 하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돈은 한국에서 더 많이 버는 거 같은데,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산책하고 내가 밥해먹고, 장보고, 친구들 초대해서 초라하지만, 라면 끓여 먹을 때가 더 행복하다.“


나나 이 친구에겐 오늘 우리시대는 야만의 시대다. 돈과 권력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이 시대가 과연 인류가 이루어 놓은 고도문명의 정체인가.


세상은 반드시 유용하다고 하는 것(돈과 권력)만이 가치 있는 게 아니다. 때론 무용하다고 하는 것에서도 번득이는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허공을 꽉 채우는 것만이 유용하지 않다. 때론 비우는 것도 지혜다.


이런 이유로 (돈과 권력으로 대표하는) 유용성이 지배하는 이 야만의 시대에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이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며, 자연을 탐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당장 돈을 갖다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고독하다. 정말 이런 생각이 정상인가?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세계 곳곳에 고독한 우리와 생각을 나눌 동지들이 있으니 말이다. 나는 며칠 전 그런 동지를 발견하였다. 그것도 이 나라가 아닌 저 유럽 이태리의 석학이다. 누치오 오르디네. 알고 보니 르네상스 인문학의 거목이다.


그가 쓴 책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컬처그라퍼)에 바로 내가 그동안 생각해 온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쪽이 조금 넘는 소책자이지만 그 메시지는 강렬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을 책이 아니라 정신 바짝 차리고 문장 하나하나에 밑줄을 치면서 읽을 책이다. 그는 ‘쓸모없는’ 지식이라고 취급되는 고전읽기, 자연탐구, 예술, 비판적 사고 등의 그 위대한 ‘쓸모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공리주의에 빠져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유용성의 수치로 재단하는 우리 문명에서 ‘쓸모없는 것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의미는 오히려 그 쓸모없는 것들이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을 생산하길 거부한다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달려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분별하고 병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말 것이다. 이 공동체는 결국 길을 잃고 자기 자신과 생명의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31쪽)


그는 인문교육이 망가지고 유용성만 강조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있는 대학에 경고를 보낸다. 내가 평소 대학에 있으면서 느껴왔던 문제의식이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대학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직업이 요구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르치기 이전에 보다 폭넓은 인문교육을 먼저 하지 않는다면, 어떤 직업도 전문적으로 훈련될 수 없다. 인문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그들의 정신을 함양하고 그들의 호기심을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해야 한다.
...
모든 형태의 공리주의와 철저히 거리를 둔 이와 같은 교육적 차원의 접근이 없다면, 미래를 내다보며 공공복지를 포용하고, 연대감을 나누며, 관용의 정신을 옹호하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환경을 걱정하고,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책임 있는 시민을 길러 내기 어려울 것이다.“(116쪽)


정말 이 나라가 인간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하는 국가다운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다시는 세월호 사건과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돈과 이익만을 좇는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150년 전에 이미 그 답을 내놓았다.


“학교, 교수, 도서관, 박물관, 극장, 서점을 배로 늘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할 장소와 어른들이 책을 읽을 장소, 그리고 사색하고 정신을 집중하고 뭔가를 배우고 더 성장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배로 늘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디서든 국민의 정신에 빛을 밝혀야 합니다.”(빅토르 위고의 1848년 연설, 121쪽)


돈의 화신이 되어 인간을 죽이는 야수는 ‘국민의 정신에 빛을 밝히는 사회’에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언제 태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 한 다발을 바칠 때 태어날지도 모른다. 유용성의 눈으론 별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할 꽃 한 다발... 그러나 그것의 가치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최초의 화관을 전하는 순간 원시인은 자신의 야만상태를 초월했던 것이다. 원시적인 본능을 초월할 때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되었다. 쓸모없는 것의 용도를 간파하는 순간, 인간은 예술의 왕국에 들어서게 된다.”(오카쿠라 텐신, 102쪽)


꽃 한 다발의 가치를 어떻게 알 것인가. 이 시대에 ‘쓸모없는’ 일이라 불리는 고전을 읽자, 밤하늘의 별을 헤자, 아름다움을 노래하자. 그럴 때 당신에게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