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정치

강제징용 판결이 무역제재 국면으로... 이 문제 정녕 풀 길은 없는가

박찬운 교수 2019. 7. 12. 20:17

한동안 정치현안에 대해 입장을 내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고달파서 그랬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서 쉬면서 살펴보니 이것만은 꼭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불거진 한일 간의 갈등에 관한 것입니다.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이 나자, 일본 정부는 그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 정부에 보복을 경고해 왔고, 급기야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베는 자신의 지지층을 규합하기 위해 이 문제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우리 국민에게 상당한 희생이 초래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는 대응책을 만드는 데 꽤나 고민을 하고 있지만,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자,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그 전에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냄에 있어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종판결을 정부가 무시하면 국가의 기본이 깨집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해결책이 결코 한일 간의 역사적 진실을 가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분쟁해결이 곧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면책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결코 돈 몇 푼을 받고 역사를 팔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셋째, 피해자들이 앞으로 일본국이나 일본기업에 제기할 법적 책임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더 이상 희망도 없는 소송에 피해자들이 목을 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위 세 가지 전제를 존중하는 해결책은, 이제 우리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국제중재 카드를 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 협정은 협정의 해석과 관련해 분쟁이 있을 때 우선 양국이 외교적 노력을 하고 그것으로도 안 될 때는 국제중재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규정에 따라 하자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규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당히 일본의 요구에 응하자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미 1990년 대 중반부터 한일 양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된 것입니다. 저도 그런 논의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가 배상을 거부하자 전문가들은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이 문제를 회부해 중재판정을 받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한일협정 제3조는 이런 제안과 똑 같은 절차는 아니지만 기본적 취지는 같다고 봅니다.

저는 지난 20년 간 중재에 의한 해결책은 큰 실익이 없다고 보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가든, 한일협정의 중재로 가든,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분명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제중재절차가 우리를 지지하지 못하면, 안하느니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법적 해결을 도모하지 말고, 역사적 주장을 견지해 나감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급변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 일본 정부의 반응이 예상을 뛰어 넘는 수준으로 가고 있어, 우리로서도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이 원하는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중재의 방법으로 가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재의 방법으로 갔을 때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만일 중재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결정이 나오면 일본은 더 이상 경제 제재의 칼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물론 아베의 태도로 보면 딴 소리 할 수 있지만 우리로선 훨씬 유리한 국면에서 일본의 주장에 대응할 수 있을 것임)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결과일 것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중재에서 우리가 졌을 경우입니다. 강제징용 배상권이 한일청구권협정에 포함된 것이라는 중재결정이 내려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는 정부가 책임지고 피해자들에게 배상에 상응하는 금원을 지급해야 합니다. 즉, 강제징용 판결의 경우엔, 정부가 원고에게 판결금 상당액을 지급하고, 원고의 권리를 양도받아 일본기업에 행사하지 않는 것(권리포기)입니다.(이 방법은 연세대 로스쿨의 이철우 교수님이 이미 제안한 바 있음)

중재로 갔을 때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확률은 제가 보기엔 반반이라고 봅니다. 서로의 논리가 워낙 팽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발전한 국제인권법의 흐름을 볼 때는 이길 가능성도 꽤 큽니다.

우리는 일본이 독일이 되길 바라 왔습니다. 독일이 해온 전후배상의 경험을 일본이 따라 주길 전 세계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70년이 지난 오늘 일본은 독일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피해 개인들이 일본정부나 일본기업에 법적 배상을 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기회에 법적인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그 대신 우리는 일본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되는 역사적 진실을 꾸준히 캐 나갑시다. 법적 책임이 아닌 역사적 책임을 지라고 당당히 주장합시다. 우리가 이제 돈이 없어서 일본정부나 일본기업에 소송을 할 처지는 아닙니다. 이제는 법적 책임은 국제적 절차에 맡기고, 그에 따라 당당하게 일본을 상대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2019.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