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그 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찬운 교수 2016. 5. 3. 14:08

그 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맡은 첫 사건--



30대 초반의 나.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꿈은 크고 푸르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비록 빛은 바랬지만 푸르른 꿈만은 마음 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다.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일이다. 그는 무명의 변호사인 내가 맡은 첫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날 중년의 여인이 내 사무실을 들어왔다. 행색이 초라했다. 그 여인은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전전하다 내 사무실을 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 여인은 아들 일로 변호사를 구하고 있었다. 아들은 형사사건에 연루되어--사건 내용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아무래도 자세히 말하면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에 반하는 것 같으니--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구금되어 있었다. 돈이 없어 1심에선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했는데, 어머니로서는 그게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던 모양이다. 항소심에서만큼은 여한 없이 사선변호인을 선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에겐 돈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집에 있는 돈 다 긁어모았고, 주변에서 좀 얻기까지 한 돈입니다. 저에겐 남편도 없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오늘 아침부터 여러 사무실을 들러 보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네요.”


“(한순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알겠습니다. 제가 맡아 보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미리 알려드립니다. 어머니는 아드님이 집행유예로 나오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만 저는 그것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항소기각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맡기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돈이 없어 변호사 구경도 못할 줄 알았는데, 이 돈이라도 받으시고, 맡아주시겠다니 변호사님만 믿겠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괜찮으니 맡아만 주세요.”


그렇게 해서 나는 그 사건을 맡게 되었다. 그 여인이 사무실을 나설 때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뺐다.

 
“어머님, 저한테 돈 다 줘서 어떻게 합니까? 가실 때 차비는 있으신가요? 이거 제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아무 말 하지 마시고 그냥 받으십시오.”


나는 손사래를 치는 그 여인의 호주머니에 억지로 돈을 밀어 넣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안양교도소에 가서 그 아들을 만났다. 인상 좋은 청년이었다. 


“아, 세상에는 이런 청년도 죄를 지어 이렇게 감옥에 있구나.”


ㅡㅡㅡㅡㅡ


항소심 재판 날, 나는 아침부터 괜히 긴장되었다. 어떻게 될까?

12시 무렵 그 여인과 딸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긴장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늘 재판 잘 될 겁니다. 벌써 몇 번이나 교도소에 가서 아드님 만났고, 준비도 철저히 했습니다. 재판정에서 울음이 나오시면 그냥 우세요. 괜찮습니다. 재판장님도 이해할 겁니다.”


이 사건 피고인은 사건발생 후 고향을 떠나 외지에 가서 신분을 속이고 공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피고인이 체포된 것은 성탄절 때 집에 왔다가 거리에서 경찰관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다가 수상히 여긴 경찰관에 의해 체포된 것이었다. 그런 생활을 3년이나 했다. 가끔 집에 오면 어머니는 바깥문부터 시작해 집의 문이란 문은 모두 자물쇠로 채웠다. 잠 못 드는 아들을 위해서였다.


“피고인, 몸을 피하면서 3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요?”


“3년 내내 경찰관을 보기만 하면, 파출소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밥을 먹어도 항상 속이 얹혔습니다. 죽고만 싶었습니다.”


“피고인에겐 아버지도 없지요? 홀어머니인 어머니가 피고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사시는 전셋집 보증금까지 뺀 것 아는가요?”


이러는 사이 재판정 한켠에서는 그 여인과 딸이 울고 있었다. 그 흐느낌이 얼마나 큰지 변호인으로서도 자못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기야 나도 울고 있었으니... 다행스런 것은 재판장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ㅡㅡㅡㅡㅡ


며칠 뒤 나는 고등법원 판사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이런 일은 생전처음이었다. 재판을 마치고 변호사가 판사실을 들어가려고 온 것이다. 이런 변론을 변호사들은 소정외 변론이라고 하는 데,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전관예우 받는 변호사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같이 초자 변호사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용기인지... 에라! 나는 판사실 문을 열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부 부장판사실!


“부장님, 복도에서 이 방을 들어올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정말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실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 피고인,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박변호사, 표정을 보니 정말 들어오기 어려웠던 모양이네요. 허허허. 조금 지나면 잘 할 겁니다. 법정에서 보니 변론이 열정적입디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말고 그렇게 해 나가십시오.”


판사실을 나가는 내 발걸음이 어쩐지 가벼워졌다.


ㅡㅡㅡㅡㅡ


선고일. 가슴은 콩당콩당... 두근두근.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결과? (말을 하려니 좀 쑥스럽다) 그렇다, 집행유예였다. 그날 저녁 무렵 나는 그 여인과 통화를 했다.


“아드님 오늘 밤 나올 겁니다. 집에 돌아오면 이젠 문 걸지 말고 편히 자게 하십시오. 아드님 이젠 잘 할 겁니다. 아드님을 믿으세요.”


그 여인이 말했다.

“변호사님, 변호사님은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아, 그것이 벌써 꼬박 25년 전 일이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 여인이 내 사무실을 들어올 때 그 모습부터 그 마지막 전화 음성까지 말이다. 내가 만일 다시 변호사로 돌아간다면 다시금 이런 맘으로 변호사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친구?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을 텐 데...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변호사라면 누구나 첫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첫 사건에서 당사자로부터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변호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 이 말은 오래 동안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2015.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