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그 때 그 여름에 대한 기억

박찬운 교수 2016. 8. 7. 06:26

그 때 그 여름에 대한 기억

 

어제 밤 잘들 주무셨습니까. 참 더웠지요? 저요?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어부친 채 선풍기를 밤새도록 틀어댔지만 베갯닛을 축축이 적시고 말았습니다. 두어 번 깨서 땀을 닦고 또 잠을 청했습니다. 이럴 때는 빨리 돈 벌어 집을 옮기고 싶은 생각마저 드는군요. 밤에도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방에서 한 번 시원하게 자볼 수 없을까. ㅎ ㅎ 너무 호사스런 꿈입니까?


그래도 버틸 만은 합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생각나십니까? 그 때 그 더위 말입니다. 1994년의 여름, 이 나라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폭염이 기록된 그 해 그 더위.


저는 그 여름 이후 더운 여름을 만나면 항상 그 때와 비교합니다. “올해 덥네. 하지만 1994년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야. 이 정도는 참아야지.” 뭐 이런 말을 내뱉는 거죠.


그 해 여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당시 변호사로서 5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잘 나가는 시절이었습니다. 돈 잘 버는 동료 변호사와 비교하면 근근이 사무실 유지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월급쟁이들보다는 훨씬 나은 경제조건이었지요. 변호사 몇 년 만에 드디어 내 집을 마련해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저희 집안으로서는 하나의 사건이었지요. 저희 부모님, 형제 들 모두를 합해서, 제가 유일하게, 시골에서 올라온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으니 말입니다.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뒤에는 산이 있어 언제든지 산책을 할 수 있는 입지였거든요. 그런데 단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좋은 아파트 생활도 거의 생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6월이 되니 날씨가 심상치 않더군요. 그런데 이게 7, 8월로 가니, 말 그대로 푹푹 찌는 여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의 기온이 낮엔 35도 이상, 어떤 날은 38도를 기록했습니다. 밤에도 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열대야가 장장 한 달 이상 지속되었으니...


당시만 해도 대부분 가정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만일 있었다면 그 집 대단한 집이었을 겁니다. 저희 집도 물론이고요. 서민들 입장에선 은행이나 가야 에어컨 바람을 경험할 수 있었지요. 당시 저의 집 아이들이 7, 3살 이었습니다. 큰 놈은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작은 애는 우는 것으로 의사표시를 하던 시절이었지요. 이 작은 놈이 밤이면 울어대는데 쉬질 않는 겁니다. 아마 더위 때문에 지도 잠을 못 이루니 스트레스가 쌓여 우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나 집사람도 더워서 미치겠는데, 거기에다 애 달래랴, 어이구...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밤 12, 새벽 한 두 시에 찬물로 샤워를 해댔지요. 그러나 그뿐 단 몇 분만 지나면 땀은 줄줄 흘렀지요.


지금 이맘때쯤 되었을 겁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피난을 가기로 했습니다. 멀리 갈 형편은 안 되었기에 서울에서 더위를 피할 데를 찾은 것이 평창동에 있는 어느 호텔이었지요. 호텔이니 에어컨이 빵빵하게 터질 것이라 예상하고, 더욱 수영장까지 갖춘 곳이니, 그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이 호텔 지금은 없어졌을 겁니다)


드디어 네 식구가 호텔에 들어섰는데, 아뿔사, 인산인해! 저희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겁니다. 뙤약볕 아래의 수영장은 수영장이 아니라 만원의 대중목욕탕이 되었고... 네 식구가 들어가 자기엔 좁디좁은 방엔 에어컨은 나오고 있었지만 힘이 딸리는 지 찬바람 대신 시원한 선풍기 바람 정도의 바람이 나오고 있더군요. 객실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단 한순간도 창문을 열 수가 없고 ... 호텔 전체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지요.


그래도 집보다는 열배, 백배 좋았지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생지옥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지요.


저는 이제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전자상가에 연락을 했습니다. 당장 에어컨 달 수 없느냐고 했더니 돌아 온 답, ㅎㅎ 1년 기다리랍니다. 예약이 밀려 도저히 감당이 안가는 상황이었지요.지금 생각하면 그 해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릅니다. 정말 진절 멀미가 나는 여름이었는데...


, 그해 또 하나 생각이 나는군요. 그 지긋지긋한 여름이 다 가고 이제 좀 찬바람이 부는가 싶던 10월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뉴스특보가 나왔습니다. 성수대교 상판이 주저앉았다고요. 세상에! 성수대교는 제가 그 몇 달 전까지 매일 출근하던 그 다리였습니다. 매일 아침 30, 1시간을 그 다리 위에서 꼬박 갇혀 있을 정도로 교통체증이 심했는데, 그 다리가 붕괴된 것이지요. 몇 달만 일찍 강남으로 이사하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 이 땅에서 살기는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 생각만 하면 식은땀이 나는군요.


이래저래 1994년 여름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그 여름을 생각하니, 이쯤 더위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견딜만합니다!

(2017.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