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넘치고 행동은 과소한 시대
-'서준식의 생각'을 넘기면서-
갑자기 서준식이 생각난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분명 이 땅의 어느 곳에서 변화무쌍한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깊은 시름을 하고 있을 텐데, 소식을 모르고 산지 십 수 년이 넘었다. 서준식? 이젠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인권운동가. 그러나 내 기억 속엔 언제나 진실하고 신념에 가득 찬 사람으로, 입이 아닌 근육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절히 보여준 사람으로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를 끌어내기 위해 이젠 그보다 더 유명해진 두 형제를 먼저 소개하자. 서준식의 형 서승. 한국에서 오랜 세월 동생 준식과 함께 비전향 장기수로 감옥 생활을 했다. 1990년 출옥해 일본으로 돌아가, 교토의 명문 릿츠메이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코리아연구센터를 맡아왔다. 그가 쓴 책이 바로 ’옥중19년‘. 서준식의 동생 서경식. 한일 양국에서 알아주는 문필가다. 도쿄경제대학의 교수로 양국의 독자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왔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등의 저자다.
서준식(맨 위), 서승(중간), 서경식(아래)
서준식은 1948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 왔다. 서울법대 3학년 재학 중 형 서승과 북한을 방문하였다가 1971년 이른바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치고도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다시 10년 동안 보안감호처분을 받았다. 1988년 비전향 좌익수로선 처음으로 석방되어 세상에 나와, 운명적으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만나면서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93년 인권단체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들어 10여 년간 정력적으로 인권운동 펼쳐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
일요일 밤 서가를 뒤지다가 2003년 그가 쓴 ‘서준식의 생각’이란 책을 발견했다. 그가 책을 출간한 다음 내게 보낸 것이다. 나도 한 때 인권운동사랑방의 후원자로서 그의 인권운동을 도왔다. 책을 읽으면서 그와의 인연을 조용히 회상했다. 서문의 이 부분에서 잠시 먹먹해진다. 서준식이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하다.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글이 과잉하고 행동이 과소한 시대이다. 범람하는 가지각색의 매체들을 꽉 메우는 글, 글, 글...... 우리 사회의 글에 대한, 혹은 글 쓰는 자에 대한 동경은 말 그대로 비정상적이다. 상업적인 이유로 계속 부추겨지는 이런 세태 속에서 글쟁이들은 당연히 오만하다. 그들의 글에서 행동하지 않는 자의 부끄러움, 고난 받지 않는 자의 죄책감, 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자의 슬픔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의 글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십중팔구 ’근육‘을 경멸하고 ’입‘을 숭상하게 되어 있다. ... 온갖 레토릭과 해박한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글의 알맹이는 의외로 단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그들이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대충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글로써 주장하는 바를 몰라서가 아니라 행동이 과소하기 때문인 것이다.”(서준식, <서준식의 생각>)
그렇다. 우리는 지금 글은 넘치고 행동은 부족한 시대에 산다. 생각해 보니, 나도 지난 30년 ’인권‘이란 글자를 늘 옆에 두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그저 재주랄 것도 없는 능력을 사용해, ’그렇고 그런 글‘을 써온 게 전부다. 행동은 남에게 맡기고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내 소임으로 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근육‘을 경멸하고 ’입‘을 숭상해 온 역사가 아닌가.
깊어가는 밤 책을 덮으며 ’서준식‘을 생각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입진보‘로 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었다. 언젠가 좀 덜 부끄러운 사람으로 그를 만나고 싶다. 그의 건강과 행운을 빈다.
(2018.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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