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일반

뒤 늦은 독후감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전 5권을 읽고-

박찬운 교수 2017. 12. 3. 22:23

뒤 늦은 독후감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5권을 읽고-



 


너무나 늦게 읽은 책

주말을 온전히 독서에 투자했다. 손정목(1928-2016)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1-5> 5. 우연히 알게 된 책인데, 읽으면서 줄곧 이런 엄청난 책을 어찌해서 이렇게 늦게 읽었는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책이 나온 지 어느새 14년. 출판사는 나와도 특별히 관계가 깊은 도서출판 한울이다(나는 한울에서 지난 20년 동안 전공서만 5권 이상을 출판했다).

 

나는 유럽 도시 어딜 가도 그 도시의 역사를 알기 원한다. 작년 런던에서 반년을 지낼 때는 시내 이곳저곳을 발로 더듬으며 그곳의 역사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작 우리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은연 중 문화적 사대주의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1970년대 초 충청도 벽촌에 상경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만 44년간 서울 사람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사는 이 서울에 대해, 외국인에게 설명한다면, 내가 아는 런던만큼 설명할 자신이 없다


매일같이 지나치는 여의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한강 한 가운데 섬인 여의도에 어떻게 해서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63빌딩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고층의 금융가가 들어섰는지 그 역사를 아는가어떻게 해서 종묘 앞에서 남산을 향해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세운상가)이 길게 늘어섰는지 그 역사를 아는가. 어떻게 해서 한강을 바라다 보는 아차산 한 자락에 워커힐이라는 낯선 이름의 호텔이 들어섰는지 그 역사를 아는가. 어떻게 해서 잠실이란 곳이 개발되어 그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지 그 역사를 아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서울에 조금만 의문을 품는다면 이런 수많은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선뜻 명료하게 답할 능력이 없다. 배운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은 말할 수 있다.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에서 언뜻 보았던 것이 기억나기도 하고 선배들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런던을 아는 만큼 되려면 한참 멀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지난 백 년간의 도시역사를 기술하는 전문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역사 장르로 보면 하나의 생활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분야의 서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읽어볼 만한 게 많지 않다. 현재의 서울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시기인 60-70년대는 깨알같이 알 수 있을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직도 당시 일했던 공무원들이 살아 있지만 그들의 기억이 역사로 재현되어 후대에게 전승되긴 쉽지 않다. 시중에서 그들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책을 한 두 권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손정목(1928-2016)


손정목은 누구인가

이런 가운데 공무원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도시계획분야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이 평생 모은 자료와 생생한 기억을 토대로 역사에 남을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5권이다. 20 여 년 전에 쓴 글을 모아 초판본이 나온 게 2003년의 일이었다.

 

손정목은 1928년 경주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중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해 관료의 길을 걷는다. 경북 예천군수를 거쳐 1960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어 실직했으나, 3년 후 다시 행정서기관으로 복직해, 1970년부터 7년간 서울시의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을 역임하였다. 복직 이후 도시문제에 심취해 잡지 <도시문제> 창간에 관여했고, 23년간 이 잡지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수많은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명실공히 한국 도시역사학의 대부가 되었다. 


그가 서울시의 고위간부를 한 7년간은 불도저 시장이었던 김현옥의 뒤를 이은 양택식과 구자춘의 시대로 서울의 지도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 시절 서울 도시계획과 그 구체화의 책임자로 일한다. 여의도 개발과 잠실 개발은 그가 이루어낸 최대 사업이었다


그는 1977년 서울시에서 서울시립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정년 퇴직할 때까지 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 기간 중 본격적으로 한국의 도시역사 연구를 하면서 수많은 저작을 내놓는다.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1977), <한국개항기 도시사회경제사연구>(1982), <한국현대도시의 발자취>(1988),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1990), <한국지방제도 자치사연구>(상하)(1992),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연구>(1996),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연구>(1996) 등이 바로 대작 <서울도시계획이야기> 5권을 펴내기 전 그가 쓴 저작물이다.

 

그가 쓴 서울도시이야기는

손정목은 그냥 단순한 행정가도, 단순한 학자도 아니다. 그가 쓴 <서울도시계획이야기>는 한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료와 직접 경험한 것을 종과 횡으로 배치한 역사서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스스로 이렇게 밝혔다.


"내가 앞으로 써내려갈 이야기들, 이른 바 '서울 이야기 시리즈'의 내용은 결코 비화나 이면사가 아니다. 단편적으론 거의가 신문 잡지 등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사사社史 구지區誌 서울특별시사市史 등에 기재되었으며 국회의 본회의 분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지적되고 논의되었던 내용들이다. 다만 그것이 종합되고 체계화된 모습으로 발표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그 일에 종사했던 서울시 간부들도 잘 모르고 지내온 그런 이야기들이다. 거기에다 약간의 숨은 이야기가 섞여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제1권 39)

 

도처에 깔려 있는 신랄한 비판

그는 이 책을 내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상처가 될 수 있는 이야기도 과감하게 들춰낸다. 서울도시 역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손정목이란 인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듣기 힘들 것이다. 아래에선 내 눈에 들어온 몇 부분만 소개함으로써 그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소개하고자 한다.

 

김수근(1931-1986)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그의 기억

김수근(1931-1986)은 20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타임지는 한 때 그를 '서울의 로렌초'(이태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수도로 만드는 데 공헌한 로렌초 데 메디치에 견준 말)라고 부르기까지 한 인물이다.그는 워커힐을 만드는데 깊이 관여했고, 여의도 개발의 청사진을 만들었으며, 서울 시내 유명 건축물 상당수를 직접 설계했다. 그는 5.16후 실세였던 김종필 등 권력자와 가까웠고, 역대 서울시장(김현옥, 구자춘 등)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가 이끈 공간 그룹은 한국 근대건축의 산실이었고, 그 문하생들은 60년 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건축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그중 한 사람이 승효상이다). 그렇지만 손정목의 눈에 비친 김수근은 이런 사람이었다.

 

나는 건축을 깊이 알지 못하지만 김수근을 예술가라고 생각해본 일은 없다. 그가 설계한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건축물이 적지 않게 있기는 하나 그를 만날 때마다 느꼈던 그 강한 속기(俗氣)가 끝내 그를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다재다능한 사업가였다고 생각하고 싶다.”(1142-143 각주).

 

공간문하생들은 아직도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내겐 그게 항상 의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서울 한 복판에 그런 흉물스런 건축물을 만들어 놓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손정목은 바로 그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세운상가에 대한 비판이다. 몇 가지 세간의 비판을 소개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정점은 다음 네 번째 비판이다.

 

네 번째의 비판은 그것이 남북방향으로 긴 건물군이라는 점이다. 난산 위에 올라가서 서울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시가지의 주된 맥이 청량리-광화문-신촌 마포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뚜렷이 알 수가 있다. 이 동서방향의 시가지 흐름의 중심부에 남북방향으로 건물군이 들어서서 흐름의 선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김 시장(김현옥)의 제안에 겁도 없이 뛰어든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1282-283)


 

김현옥 시장(1926-1997)


김현옥에 대한 평가

그가 서울시의 기회관리관으로 들어온 것은 1970년 양택식 시장 때이다. 바로 그 전 시장이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는 김현옥이다. 김시장은 4년간의 재임기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로 시작해서 공사로 끝낸 인물이다. 무모할 정도로 서울 전역을 뒤집어 놓았고 그것이 현재의 서울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손정목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김현옥이라는 시장은 우리가 흔히 대하는 그런 행정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서울시장 재임 4년간, 그는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흥미가 있는 것은 매 1년마다 미치는 대상이 달랐다는 점이다. 1년 즉, 1966년은 지하도와 보도육교, 도로의 신설 확장에 미쳤으며, 1967년은 세운상가를 비롯한 이른바 민자유치사업이라는 것에 미쳤다. 3년째 1968년에는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에 미쳤고, 1969년에는 시민아파트 건설에 미쳤다. 그리고 1969년에 미쳐서 지은 400동 시민아파트 중 와우산 허리에 지은 한 동이 197048일 새벽에 무너져서 그의 서울시장 생활은 끝을 맺고 만다.”(1256)



국회의사당(필자 촬영)

 

대한민국 최악의 건축물

손정목은 오늘날 여의도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현옥 시장은 밤섬을 폭파하여 그 돌을 사용해 윤중제를 설치하여 지금의 여의도를 만들어냈다. 그 뒤를 이어 양택식 시장은 여의도의 택지를 분양해 그곳을 아파트와 고층건물로 이루어진 신도시로 만들어 냈다. 그 건물 중엔 지금의 국회의사당도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예술성 제로에 가까운 흉물에 다름 아니었고 여의도 스카이 라인(여의도는 '동고서저'의 스카이 라인을 갖고 있음)을 망친 주범이었다. 그 책임은 당시 권력자들의 무식과 이에 편승한 영혼 없는 건축가들에게 있었다.

 

이 건물은 똑 부러지게 한 사람의 설계책임자를 거명할 수가 없다. 안영배, 김정수, 김중업, 이광로 등 네 사람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이 네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장단, 몇 몇 국회의원, 국회사무처장 등이 여러 가지로 간섭했다. ... 결과적으로 이 건물은 아주 좋지 못한 건물이 되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물 100개를 두고 가장 좋지 못한 건물 5개를 고르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운상가, 국회의사당 그리고 서초동의 법원종합청사 건물 등은 반드시 들어가리라고 생각한다. 서초동 법원건물이 지나치게 권위를 상징하는 데 반해 국회의사당 건물은 왠지 허약하고 위축된 느낌을 준다. 수평 수직의 비례도 맞지 않는 것 같고 옥상의 돔은 볼수록 빈약하다.”(288)

 

서울의 역사를 알기 위해 

서울을 서구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녹지를 무자비하게 없애 버렸고 역사성을 도외시하면서 확장일로의 대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 이면엔 어떤 탐욕과 부정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완전히 망가지지 않고 이만큼의 역동성을 갖게 된 이면엔 또 어떤 숨은 노력들이 있었을까?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들이다. 그 역사를 알기 원한다면 바로 이 책 <서울도시계획이야기> 5권을 읽어야 한다. 서울의 진정한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손정목 선생은 2016년 숙환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