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반 고흐 그림이야기(선집)

반 고흐그림이야기 33화(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박찬운 교수 2015. 9. 28. 06:21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 제33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고흐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남긴 그림이다. 그는 십여 년 간 집중적으로 그림을 그려 놀랄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화 900여점, 드로잉 1,100여점! 그것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연구하려면 그것도 꽤나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또 다른 자료는 오늘 내가 설명할 고흐가 남긴 편지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인생을 쉼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60, 70세에서야 이룰 수 있는 업적을, 그는 나이 40 이전에 다 이루고 홀연히 갔다. 만일 그가 남긴 편지가 없었다면 그 고독한 천재의 불꽃같은 삶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겨지지 못한 채 이미 오래 전에 역사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 암스테르담의 고흐박물관은 고흐의 편지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데 총 편지 수는 928통에 달한다. 이 편지 컬렉션은 하나하나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고, 오래 전에 모두 수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컬렉션의 모든 편지는 현재 인터넷으로도 제공되고 있어 고흐에 관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스럽게 읽어볼 수 있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국내에 번역된 편지 선집도 보지만 번역되지 않은 편지를 읽어보기 위해 때때로 인터넷 고흐 편지 사이트에 들어간다. 고흐 그림을 해설하면서 그가 어떤 상황에서 그 그림을 그렸는지를 아는 데 이 편지만큼 좋은 자료는 없다.


고흐의 그림은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로 인해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 이해하기 쉽고, 이야기 거리가 많다. 이것은 세계 회화사에서 유일하다고 단언해도 좋다. 고흐보다 더 뛰어난 화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고흐만큼 후대의 사람들이 그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많은 글을 써 놓지는 못했다.


고흐 편지 컬렉션은 크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테오가 형 고흐에게 보낸 편지, 고흐가 여동생 빌을 비롯한 친척에게 보낸 편지, 고흐와 다른 화가들(예컨대 고갱, 라파르트, 베르나르 등) 사이에서 교환된 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편지는 고흐 자신이 쓴 것인데, 928통 중 844통이고, 그 중에서도 테오에게 보낸 것만 663통에 이른다.


1882년 7월 31일 편지. 헤이그 인근의 가지 친 버드나무가 있는 농촌 풍경


고흐 사후 고흐의 편지가 이렇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번 말한 테오의 처 요한나 봉허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술사에서 오늘의 고흐를 있게 한 수훈갑이다. 비록 남편 테오와는 2년여의 짧은 결혼생활을 하였지만 그것을 통해 맺어진 인연으로 고흐가 남긴 그림과 편지 대부분을 상속받은 주인공이 되었다.


만일 그녀가 생활고로 그 그림과 편지를 그냥 싼값에 마구 처분했다면 오늘날 고흐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녀는 그림을 싼 값으로 파는 것을 극히 절제했고—판 것이 있지만 이 여인은 그림 값을 제대로 받는 데에도 귀재였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가면 볼 수 있는 <해바라기> 작품이다. 이 그림은 1924년에 1만5천 플로린에 팔렸는데, 그 가격은 고흐 사망 당시 남긴 200여 점의 작품 전체 평가액보다 7배가 많은 금액이었다—그 많은 편지를 하나하나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1888년 아를 시절 편지. 아를의 노란 집을 스케치한 것임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독한 삶을 살았던 고흐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온갖 종류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토해냈다. 그런 이유로 이 편지는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서간문학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편지에 자기가 읽었던 책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 그는 엄청난 독서가로 에밀 졸라, 볼테르, 플로베르와 같은 자연주의자들의 책, 쥘 미쉘레와 같은 역사가의 책, 발자크, 조지 엘리엇, 샤롯 브론테, 찰스 디킨스, 키츠와 같은 문학가들의 책들을 쉼 없이 읽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만을 편지에서 모아도 한 편의 문학평론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888년 3월.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아를 근처의 랑글루와 다리 정경을 스케치한 것임


고흐는 편지에서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살았던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헤이그, 누에넨, 벨기에의 앤트워프, 프랑스의 아를, 생레미, 오베르 등지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우리는 그의 편지를 통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고흐가 쓴 편지는 고흐의 자서전이자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고흐의 편지에는 수많은 그림이 들어 있다. 편지 속에 글과 함께 연필과 펜으로 그린 소묘 작품을 남겼고, 가끔은 잉크로 그린 채색 그림까지 그렸다. 고흐는 동생이나 화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그 즈음 그리고 있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 그림을 그려 보냈던 것이다. 고흐의 드로잉 컬렉션은 대부분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1890년 6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오베르의 가셰 박사의 딸 마그리트가 피아노 치는 장면을 스케친 한 것임, 고흐는 이것을 유화로도 남긴다.


오늘 고흐의 편지 중 몇 개만 추려 여기에 올린다. 설명은 해당 사진에 간단히 했으니 그것을 찬찬히 보기 바란다. 고흐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포함하여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네덜란드어로 편지를 쓰다가도 때론 다른 언어(불어)로도 썼다.


우리나라에도 지금껏 몇 권의 고흐 서간집이 출간되었으나 편지의 양이 워낙 많아 아직 전체를 번역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번역서가 100통 내외의 범위에서 번역을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런 중에서도, 박홍규 교수(영남대)가 2009년 발간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가 단연 최고다.


박교수는 법학자로 이미 고흐 평전을 비롯한 몇 권의 고흐 관련 책을 낸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 고흐 연구를 미대교수가 아닌 법대교수가 한다는 게 여간 흥미롭지 않다. 하기야 나도 법대교수니 고흐 연구는 전공불문인가 보다!


박교수는 위 책에서 고흐의 편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가 이 편지에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겨우 4년 정도의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한 통 한 통의 편지가 짧은 작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 형식이나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고 진실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그의 그림처럼 오로지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단숨에 쓴 편지인데도, 그 문장력이나 어휘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다. 무엇보다 그의 편지가 감동적인 까닭은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30쪽)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 봉함엽서에 깨알같이 글을 썼다. 말미에는 거의 매번 차입을 요청하는 도서목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 주제를 달리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고흐의 편지를 볼 때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떠올린다.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힌다. 거기에서 그는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대중의 <옥중서신>이다.


그는 거기에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의 사상세계를 알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읽으면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편지 말미에 거의 매번 자신이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써서 차입을 부탁했다. 그가 감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독서를 했는지... 감옥은 그에게 있어 진정한 대학이었다.


나는 오래 전 이 옥중서신을 읽고 정치인 김대중을 다시 평가했다. 김대중이란 한 인간의 삶의 견고함과 투철함에 큰 감명을 받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평소 가져야 할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고흐의 편지는 서양회화사에서, 김대중의 편지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역사의 보물이 되었다.


오늘 아침도 글이 길어졌다. 페친들에게 읽는 고통을 줄 것 같아 걱정이다. 양해를 구한다.






위 이야기는 필자의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사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