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반 고흐 그림이야기(선집)

반 고흐그림이야기 30화(고흐와 에로티시즘)

박찬운 교수 2015. 9. 28. 06:28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 제30화(특집)

<고흐와 에로티시즘>


오늘로 고흐 그림 이야기 30화를 맞는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열심히 써 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생각하여 특별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로티시즘! 고흐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주제일 것이다. 나도 어디서 들어 보지도 읽어 보지도 못했다.


에로티시즘? 이게 과연 무엇일까. 내 나름대로 정의하면 그것은 성적 감정(sexual feeling)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적 본능을 예술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여 아름다움(美)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그럼 포르노그래피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는 이를 오로지 성적으로 흥분시킬 목적으로 인체의 특정부위나 성적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도 때론 예술로 둔갑하지만 그 실체는 인간의 성적 욕구만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예술적 요소인 심미안이나 감동이 없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속성상 주관적이라, 문명사에서 예술로서의 에로티시즘과 외설로서의 포르노그래피의 구별은 매우 힘들었고, 때론 자의적이었다.


옛날 우스갯소리 잘하는 변호사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이 술자리에서 이른바 와이당을 곧잘 했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 도대체 예술(에로티시즘)과 외설(포르노그래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법률적으로 정의는 내릴 수 있지만 실제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좌중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법률가이었지만 그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드디어 그 분이 입을 열었다. “제가 답을 가르쳐주지요. 예술은 보는 그것을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외설요? 그것은 아래가 뜨거워지지요.” 농담이라지만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그래피는 그렇게 구별하는 게 오히려 정확할지 모른다.


고흐의 그림을 공부하면서 나는 가끔 그의 에로티시즘이 궁금했다. 그는 37세라는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정말 한창 피가 뜨거울 나이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며칠 전 말했다시피 그에겐 사랑이 중요했다. 자기는 여자가 없으면 얼음이 되든지, 돌이 되겠다고 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당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만의 에로티시즘을 생각하지 안했을 리가 없다.


인간의 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본능 이상의 메타적인 욕망이다. 그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에겐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란 밥을 먹는 것과 함께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것은 과격하게 표현되면 범죄가 되기도 하지만 일정한 틀 속에서 부드럽게 표현되면 온갖 찬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성적 본능이나 그 욕망을 작품을 통해 표현해 보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고흐는 사람을 그리되 과장된 모습, 분칠한 얼굴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 실존의 모습을 그리려 노력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참다운 모습을 그리는 게 그림 그리는 자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인간의 성적 욕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이제껏 고흐의 에로티시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작품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900여점의 유화 중에는 파리 시절 그린 몇 점의 나체 석고 흉상과 누드화가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나체 석고 흉상은 데생 연습을 하는 중에 그린 것으로 보이므로 본격적인 에로티시즘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드 작품이 오늘의 주제에 맞는 그림인데 이것이 현재 딱 3점 알려져 있다. 모두 1887년 파리 시절에 그린 것이다.


고흐의 1887년 작 <뒷 모습의 여인 누드화>
이 모델은 고흐가 파리 시절 자주 들렀던 카페 탐부린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는 설이 있다


고흐는 왜 이렇게 적은 수의 누드화를 그렸을까. 추측컨대 돈이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한 게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차례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데 돈이 없어 마땅한 모델을 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만일 그가 마음대로 모델을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분명히 좀 더 많은 누드화를 그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고흐식 에로티시즘이 탄생했을 지도 모른다.


고흐가 존경했던 선배 화가 중에서 누드 그림을 잘 그린 화가로 구스타브 쿠르베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근대 프랑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영웅 중의 한 사람이다. 의식적으로도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어 1871년 파리코뮌 당시 예술가 부문의 좌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코뮌이 실패로 끝난 뒤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불귀의 몸이 되었다.


쿠르베는 당시 화단에서 생각하기 힘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매우 리얼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었지만 의외로 누드화도 많이 그렸다. 오늘 그 중에서 잘 알려진 작품 <파도 타는 여인>(1868년)(네 번째 그림)을 보자.


구스타브 쿠르베의 1868년 작 <파도 타는 여인>


이 그림은 한 젊은 여성이 파도가 치는 물속에서 알몸의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어떤 것을 느끼는가? 나는 이 여인의 아름다음을 정확히 묘사할 능력이 없다. 그저 ...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을 놓고 구구하게 어떤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누군가가 굳이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해보라고 하면 나는 성경 몇 구절로 대신하겠다. 솔로몬 왕이 아가서에서 아름다운 신부를 보고 노래한 그 대목이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너울 속 그대의 눈동자는 비둘기 같고 그대의 머래 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 떼 같구나. 그대의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이 희구나. 저마다 짝이 맞아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대의 입술은 붉은 실 같고, 그대의 입은 사랑스럽구나. 너울 속 그대의 볼은 반으로 쪼개 놓은 석류 같구나. 그대의 목은 무기를 두려고 만든 다윗의 망대, 천 개나 되는 용사들의 방패를 모두 걸어 놓은 망대와 같구나. 그대의 가슴은 나리꽃 밭에서 풀을 뜯는 한 쌍 사슴 같고 쌍둥이 노루 같구나.”(아가서 4장 1-5절)


쿠르베의 또 다른 누드 작품 중에는 <세상의 기원>(1866년)이라는 그림이 있다. (오늘 이 그림마저 보여주면 이야기가 완전히 쿠르베로 넘어갈 것 같아 포스팅은 생략한다. 하지만 그림에 관심 있는 페친들은 꼭 찾아보기 바란다.) 그것은 쿠르베를 아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으로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제일 많은 관객을 모으는 그림 중 하나다.


그 그림을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외설작품이라고 판단하기 십상이다. 직접적으로 여성의 국부만을 확대해 그린 것이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 그림은 오래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한 때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그 작품을 소장했다고 하는데 그도 그것을 커튼 뒤에 숨겨 놓고 필요할 때만 공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그림의 제목 <세상의 근원>을 상기하라! 그렇다, 인류의 근원은 바로 여자의 자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쿠르베는 그것을 아주 리얼하게, 도전적으로 그린 것이다. 인류의 근원에 대하여 제 아무리 박식함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그것만큼 생생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흐는 바로 이런 쿠르베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 또한 그 이상의 사실주의적 누드화에 도전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쿠르베와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 쿠르베는 이미 사회적 명사로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모델을 구해 자신이 가진 예술적 지향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고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고흐의 1887년 작 <앞으로 누운 누드화>


게시된 고흐의 누드화 3점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아직 이들 누드화에 대한 설명을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다. 여기에 나오는 모델들은 고흐의 당시 상태로 보아 특별히 돈을 들여 자신이 직접 구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마 다른 화가들이 누드모델을 구해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염치 불구하고 함께 그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고흐가 단골로 가는 유곽의 매춘부들에게 약간의 돈을 집어주고 그린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 모델들은 아무리 보아도 일류가 아니다. (이 그림의 모델이 고흐가 파리 시절 자주 드나든 이태리 카페 탐부린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는 설이 있다. 그녀는 한 때 고흐가 좋아한 연인이었다). 전문 모델이라 할지라도 한 물 간 모델들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첫 번째 작품은 그런대로 여인의 관능미가 엿보인다. 뒷모습이지만 앞모습의 여인들보다 나이가 젊고, 몸은 풍만하면서도 탄력이 있어 보인다.


두 번째 그림은 어찌 보면 그리다가 그만 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완성도가 떨어진다. 희미한 얼굴로 인해 관능미가 사라지니 그저 나른한 오후에 만사 제키고 잠에 빠진 여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흐의 1887년 작 <앞으로 누운 누드화>


세 번째 그림은 더욱 볼품이 없다. 아마도 모델 나이가 40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가슴은 쳐지고 얼굴도 쪼글쪼글하다. 성적 매력은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중년 여인의 고단한 삶을 누드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한 것인가? 냉정하게 말해서 그렇게 봐주기도 어렵다.


이들 세 그림 모두 완성도에서 떨어지지만 한 가지는 공통적이다. 고흐가 이들 누드화에서 여인의 풍만한 엉덩이를 매우 중시해 그렸다는 것이다. 고흐가 포착한 여성의 성적 매력은 바로 이 엉덩이였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 남성이 여성의 신체에서 중시한다는 가슴과 엉덩이!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다.


쿠르베와 고흐의 에로티시즘은 더 이상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에로티시즘에 있어서는 고흐가 쿠르베를 따라갈 수가 없다. 고흐도 이것은 인정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직접적으로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것은 포기했다. 에로티시즘이 아닌 삶의 리얼리즘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모델료도 필요 없는 모델들...동네에서 만난 우체부, 들판에서 힘겹게 일하는 농부, 집안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여인을 그렸다. 고흐의 인물화는 이렇게 탄생하였고, 그것은 쿠르베의 에로티시즘에서 볼 수 없는 서양회화사의 또 다른 업적이 되었다.


오늘 고흐에게 조금 가혹했다. 분량도 길어졌다. 특집인 점을 감안해 양해해 주기 바란다.



.

위 이야기는 필자의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사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