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빈 둥지의 오후

박찬운 교수 2025. 5. 26. 04:27

빈 둥지의 오후

 
 

나의 둘째 딸이 5월의 신부가 되었다.

 
두 딸이 떠났다. 오늘 아침 작은 아이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오후가 되자 동생 결혼식 참석 차 왔던 큰 아이는 사위와 함께 일터인 미국으로 떠났다. 며칠 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집안은 딸과 엄마의 수다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가끔 번짓수를 잘못 찾은 나의 썰렁한 말 한마디가 분위기를 깨긴 했어도 그것은 그냥 내 평범한 일상이었다.
 
갑자기 집안이 휑한 게 기분이 묘하다. 묵은 체증이 뚫린 듯 시원하기도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아려온다. 어제 식장에서 어떤 친구는 이제 아이들에게서 졸업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덕담을 했다. 웃으면서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고독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37년이 지나니 내게도 이런 날이 왔다. 좋은 아빠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평범한 아빠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은 아빠였다. 머릿속에는 늘 이상적인 아빠상을 갖고 살았지만 그것과 실제는 간극이 컸다.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항상 내 일이 먼저였고, 항상 내 공부가 더 중요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무슨 대단한 공부라고...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아빠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안하다... 딸들아...
 
그럼에도 아이들은 잘 자랐다. 평균 이상의 공부를 했고 좋은 배필을 스스로 찾아냈다. 딸들을 사랑으로 키워 온 아내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이런 말을 해왔다. 아빠 한테는 서운하게 해도 좋지만 엄마에게는 서운하게 하지 말라. 그리하면 그것은 불효다. 이 말이 딸들에겐 아빠에게도 당연히 서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이제 내 인생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느낌이다. 적막강산의 집안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들과 아옹다옹하는 시간은 끝났다. 아이들이 늦게 들어온다고 잠을 못자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과거보다 더 자유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허전함 속에서 항상적으로 겪을 고독감이 문제다. 고독은 이제 낯선 손님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따사로운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 나는 천천히 골목길을 걷는다. 가정을 이룬 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배워 어른이 되어, 드디어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부족한 아빠지만 그 정도면 많은 것을 거둔 성공한 아빠다. 이제 나는 그 훈장을 달고 내 삶을 살고자 한다. 아이들의 보호자 지위에서 후원자 지위로 바꾸어 살 것이다. 조금 외롭겠지만 고독을 새로운 친구로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내 삶을 이어갈 것이다. 딸들아, 잘 살아라!
(2025. 5. 25.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