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착오적 통치행위론을 규탄한다
통치행위론이란 게 있습니다. 과거 유신 독재 시절이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대통령의 무소불위 권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곧잘 사용된 어용 이론입니다. 그 핵심은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을 가장 잘 발전시킨 게 나치 독일이었습니다. 나치 법학자들은 총통과 국가 지도부의 행위는 법 위에 있으며, 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개발하였는데, 이는 독일 전통 법학에서 논의된 통치행위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치의 통치행위론 하에서 히틀러의 명령과 결정은 기존의 법률과 충돌되더라도 법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습니다. 총통은 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이 당연시 되었던 것이지요.
이 통치행위 이론은 국가 비상사태 시에 특별히 애용되었는데, 나치 법학자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는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도 국민과 국가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비상사태인지 아닌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는 지도자(총통)인 것이고 결코 사법기관에서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러한 주장을 이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학자가 칼 슈미트, 칼 라렌츠 같은 이들인데, 우리나라 헌법학이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제가 헌법학 교과서를 처음 대한 게 1981년 봄입니다. 바로 전두환 헌법, 곧 5공화국 헌법이 막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을 때이었지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맞춰 교과서엔 통치행위 이론이 꽤 비중 높게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 이런 이론은 교과서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이란 헌법학적 입장에서 보면 통치행위론과의 결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87년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고, 헌법의 수호기관으로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진 이후엔, 이 통치행위 이론은 헌 책방의 고서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흐른 후 오늘 이 이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2. 3 내란 사태 이후 몇 몇 학자들은 이 빛바랜 이론을 다시 꺼내 윤석열을 옹호하고 있으며, 윤과 그의 변호인들은 그것을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비상계엄의 요건인 국가비상 사태를 판단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며, 그것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헤린더 파우어-스투더가 쓴 <히틀러의 법률가들>(박경선 옮김)입니다. 도대체 독일 법률가들은 나치 시대를 어떻게 정당화시켰는가, 이 의문을 갖고 보기 시작한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문단이 있군요. 나치 법학의 최고 이론가 중 한 명인 칼 라렌츠가 총통의 지위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총통)가 정의를 유지한다는 보장을 할 필요가 없다. 총통이 됨으로써 그는 '헌법의 수호자'가 된 것이며, 이는 자기 민족의 성문화되지 않은, 구체적인 법 이념의 수호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통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법률이나 법규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100쪽)
12. 3. 내란 사태를 옹호하는 법률가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이런 지위를 주자는 겁니까, 이것을 금과옥조로 삼자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 저 시대로 후퇴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켜내야겠습니까?
헌법재판소의 정당한 절차를 부정하고 국민을 기만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절단내려고 하는 일부 학자들과 법률가들의 시대 착오적 행위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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