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22 사진으로 보는 삶과 죽음

박찬운 교수 2016. 10. 3. 01:39

영국이야기 22


사진으로 보는 삶과 죽음

 

룬드 공원묘지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고 백남기 선생님을 생각하니 애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주말을 맞이해 잠간 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스웨덴 룬드에 와 있습니다. 이곳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3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한 열흘 전 저가 항공사인 라이언 에어 항공요금을 검색해 보니 왕복 요금 27파운드짜리 표를 발견하고 당장 사버리고 말았지요(이 가격이 임박해서는 열 배 이상이 됩니다). 그래도 명색이 외국을 가는 데 왕복 4만원! KTX 서울-부산 편도요금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룬드는 제가 몇 년 전 1년간 살았던 곳입니다. 북구에서 가장 큰 대학인 룬드대학이 있는 교육도시입니다. 중세 시절엔 북구에서 가장 큰 종교도시였지요. 시내 한 가운데에는 북구를 대표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룬드성당이 있습니다. 룬드 이야기는 올 연초에 이 페북을 통해 9회에 걸쳐 한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 재탕하진 않겠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제 글을 보관해 놓은 티스토리 블로그를 한 번 들러주십시오.

 

룬드를 대표하는 900년 역사의 룬드 대성당


제가 룬드에 다시 온 것은 이곳이 제 삶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룬드에서 스웨덴 사람들의 삶을 이해했습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의 실체를 이해했습니다. 스웨덴의 복지제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이해했습니다. 룬드 생활 이후 저는 복지제도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에서 물질적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룬드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겁니다.

 

룬드대학 중앙도서관 앞에서


오늘 저는 룬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제 추억을 떠올렸습니다만, 저를 가장 편하게 해 준 곳은 룬드대학 부속병원 근처의 공원묘지였습니다. 이 묘지는 저의 룬드시절 매일 들렀을 정도로 자주 갔던 곳입니다. 산책을 할 때마다 이곳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지요.

 

이 묘지는 산업혁명 후 룬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매장공간이 부족해 시 외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과거 룬드가 성곽으로 둘러 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성곽 바로 바깥에 위치하지요. 19세기 중엽 룬드성곽이 철거되자 이 묘지는 자연스레 룬드 시내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벤치에 잠시라도 앉아 있으면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이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실로 연결되어 산 자든 죽은 자든 그 실을 잡아당기면 끌려올 것 같습. 또한 죽음은 내게서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야하는 이웃입니다.

 

오늘 저는 많은 설명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면서 감상해 보시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제가 느낀 것을 한 번 같이 느껴보시지요. 그럼 이제부터 사진을 보겠습니다.


묘지 내의 두 길, 하나는 삶, 또 하나는 죽음


묘지 내의 벤치, 나의 룬드 시절, 나는 저 벤치에 매일 앉았다. 저기에 앉으면 내 머리속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불러내 이야기했다. 사랑의 실이 나와 그들 사이를 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벤치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뒤에 백 년이 넘게 잠든 이들이 있다. 산 자도 언젠가 저 벤치 뒤 어딘가로 가서 안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있을 때는 없었던 묘지다. 하늘에서 젊은 이의 영혼을 빨리 부른 모양이다. 산 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평소 그가 좋아했던 장난감을 올려 놓았다.


공원묘지에는 이곳저곳에 묘비 앞에 저런 벤치가 놓여있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먼저 갔을 때 남은 배우자는 저곳을 매일같이 찾아와 저 벤치에 앉아 죽은 자를 회상한다. 오늘도 바로 그 사람이 왔던 모양이다. 지금 저 묘비 앞의 조그만 등 속에선 촛불이 타고 있다.


어느 할머니가 묘지 앞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다. 내가 다가가 저 묘비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자기 아버지란다. 이 할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자주 이곳에 와서 낙엽을 치우고 묘지를 단장한단다.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그 긴 세월 동안 저런 정성을 들이고 있을까.


3평밖에 안 되는 묘지에 심은 나무가 어느새 그늘을 만들 정도로 커버렸다. 그 아래에 하얀 벤치 하나가 놓여있다.


이곳 공원묘지에는 이렇게 묘지 앞을 갈퀴로 가지런히 긁어 놓은 곳이 많다. 묘지 청소를 한 다음 그 마무리로 하는 모양인데... 오늘 이 묘비 주인공의 가족이 와서 저렇게 묘지를 단장하고 갔다.

 

이 묘비의 가족들은 수시로 와서 촛불을 킨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아마 여러 가족이 틈만 있으면 이곳에 초를 들고 와 켜고 가는 모양이다.


다른 묘지에 비해 큰 치장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내게 강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특히 벤치가 아닌 일인용 의자! 저기에 누가 앉을까? 묘비를 자세히 보니 아직 살아 있는 배우자가 앉는 게 틀림없다. 그 배우자는 저기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할까?


공원묘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묘지다. 한 꼬마가 천사들에 둘러싸여 닌텐도 게임을 하고 있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불의에 삶을 마감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이 소년을 위해 그가 평소 좋아했던 닌텐도 놀이를 하는 소년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벤치도 하나 갖다 놓았다. 매일같이 소년의 할머니는 이곳에 와서 촛불에 불을 붙인다. 나는 이 이야기를 룬드시절 들었다. 오늘 이 소년의 묘지에서 그 소년과 그 할머니를 생각했다. 소년이여, 천국에서 닌텐도 놀이 많이 하거라!


(2016.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