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37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현장, 런던 뉴몰동

박찬운 교수 2016. 12. 24. 16:07

영국이야기 37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현장, 런던 뉴몰동(New Maldong)

 

런던의 작은 한국 뉴몰동

런던에서 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니 죄다 뉴몰동이란 곳을 다녀왔단다. 거기 가면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음식점, 미장원, 수퍼마켓이 있어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에는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런 곳을 런던에 온지 4달이 넘도록 가보질 못하다가 성탄절을 코앞에 두고 며칠 전 드디어 다녀왔다. 마침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교민 한 분과 점심 약속을 했던지라 겸사겸사 가게 된 것이다.

 

뉴몰든 역, 런던 워털루 역에서 기차를 타면 20분 만에 이곳 역에 도착한다.

 

뉴 몰동(New Mal)이란 곳은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즈 강 남서쪽에 있는 뉴 몰든(New Malden)을 말한다. 런던 워털루 역에서 기차를 타면 20여 분 후 도착하는 곳으로 이곳도 런던 광역시(Greater London 내의 Kingston upon Thames Borough) 내에 속한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니 교민들 사이에서 장난삼아 뉴몰든을 뉴몰동이란 부르는 것이다

현재 영국 전역에 사는 한국인 수가 4- 5만여 명이라는데, 그 중 2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뉴몰든과 인근지역에서 살고 있다(이 수치는 정확한 것이 아님, 교민 수에 대한 여러 신문자료가 있지만 다 제 각기임). 유럽 내에서 이런 수의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는 곳은 이곳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현지 언론에서도 이곳을 '작은 한국'(Little Korea)이라고 부른다.

 

뉴몰든 중앙 도로 및 구 시청사

 

디아스포라의 역사

왜 한국 사람들은 이 먼데까지 와서 이렇게 모여 살까? 왜 한국 사람들은 여기까지 와서 김치를 먹고, 비빔밥에 김치찌게를 끓여 먹고 사는 것일까. 왜 한국 사람들은 이국 땅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경기를 할 때면 한 곳에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짝짝짝 짝짝' 응원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상식적 의문이기도 하지만, 조금 파고들면 한국인 디아스포라(diaspora)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 이 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나왔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온 것으로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의미한다.

기원전 6세기 말 이스라엘은 신바빌로니아(구약 성경에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을 기억하라)의 침략을 받아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소위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인 바, 그곳으로 간 유대인들은 집단으로 모여 유대 공동체를 만든다. 기원 후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또 한 번의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서기 70년 로마군단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거점 예루살렘을 함락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중근동 지방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면서 유대 공동체를 만든다. 그들은 고향 이스라엘을 떠났음에도 언어와 종교를 고수했고 그 정체성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념을 대대손손 교육했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 디아스포라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디아스포라는 현재에 와서는 좀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 현대의 디아스포라는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homeland)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공동체를 만드는 현상 일반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라면 20세기 이후 세계는 디아스포라의 시대. 그 이전의 시대는 어떤 특정의 인종 집단이 고향을 떠나 집단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 전쟁과 수많은 내전, 교통의 발달, 경제의 통합 등으로 난민과 이민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더 안전하고, 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이동해 뿌리를 내렸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동하지만, 첫 정주자들은 곧 가족과 친척, 이웃을 불러들여 집단화한다. 물론 이동의 동기와 양태 그리고 시기는 특정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역사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이미 여러 논문과 책이 나와 있을 것이다. 전공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곳 런던에서 별 자료도 없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큰 줄거리에 관한 것이다. 뉴몰든의 한국인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 간단히 그것을 정리해 보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2013. 9. 13.자 중앙일보 )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일제 강점기와 연관이 깊다. 그 기간 수 십만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들어가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갔고, 해방 이후 2세, 3세의 시대를 열었다. 중국러시아 쪽으로의 이동은 구한말 시작되어 식민치하에서 만주, 연해주로 나아갔다가, 해방 이후에도 그곳에 남아 중국에선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러시아에선 고려인(카레이스키)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연해주의 경우는 1930년 대 말 스탈린 치하에서 20여 만에 가까운 고려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중앙아시아 한국인 디아스포라라 역사를 만든다.

미국과 남미에서의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몇 단계를 거쳤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부 노동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가 그곳에 눌러 앉아 최초의 한인 이민사회를 만들기 시작했고, 또 일단의 배고픈 민중이 태평양 넘어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해 중남미 한인사회(애니깽)를 만들었다. 하와이를 통해 미국을 안 한국인들은 그 뒤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진출했고, 일제 강점기 기간 소수의 한국인들이 미국 본토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 수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해방 이후미국으로 유학을 간 사람들이 그곳에 하나 둘 정착함으로써 한인 사회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 한인사회가 급격하게 불어난 것은 역시 70-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 독재에서 탈출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났고 아메리카 드림을 찾아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가족 전체를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현재 미국 사회의 한인 주류는 이 시절 한국을 떠난 사람들과 그 2세들이다. 1990년대 이후는 여행자유화, 급격한 유학생 수 증가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미륵(1899-1950)은 황해도 출신으로 3.1운동 후 상해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그곳 대학에서 의학, 철학 등을 배운 다음 뮌헨대학에서 동양학을 가르쳤다. 1946년 출판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역작으로 독일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사진 이미륵사업회)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이민사는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아주 소수의 한국인들이 일제 강점기부터 유럽에 정착하기도 했지만(예컨대, 1920년대 독일로 유학을 가서 압록강은 흐른다를 쓴 이미륵) 한국인 공동체를 만들 단계는 아니었다. 유럽에서 한국인들이 들어와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은 대부분 1970년대 이후. 그리고 이들의 특징은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을 떠나 만주나 연해주 혹은 하와이로 떠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을 지닌다. 대부분이 유학생이거나 상사주재원으로 이곳에 왔다가 눌러 앉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다른 지역보단 학력 수준이 높은 편이다.

유럽의 한인 역사는 한국의 경제부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한국이 급속하게 경제발전을 함에 따라 그 산업역군들이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독일의 한인 이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광부와 간호사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매우 독특한 해외이주사업이었음). 그러다가 지난 20년 동안은 세계화의 영향으로 무역, 여행 및 유학이 자유롭게 됨으로써 유럽 이민사회도 급속히 팽창되었다.

영국의 한인사회는 유럽사회에서 만들어진 한국 이민사회의 가장 전형적이고도 선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970년대 이후 들어온 상사주재원, 유학생 들이 한인사회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특정 지역으로 몰려들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런던 차이나타운, 런던 시내 한 가운데에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식료품 가게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실 런던은 세계 어느 대도시보다 국제화된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거칠게 이야기하면 반은 영국 출생 시민권자이고 나머지 반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중국인, 인도인, 방글라데시인, 터키인, 아랍인 등등이 특정 외국인 집단거주지역을 만들고 있다. 런던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차이나타운이나 히드로 공항 가까이 있는 인도인 밀집지역에 가면 영국이 아닌 중국이나 인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뉴몰든에 한국인들이 몰려든 이유

이제 뉴몰든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뉴몰든에 지금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대사관의 위치. 지금은 한국대사관이 런던 시내 관청가라고 할 수 있는 버킹검 궁전 근처에 있지만, 1970년대엔 뉴몰든 근처 윔블든에 있었다. 그런 연유로 한국인들이 대사관에 가깝고 런던에서도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뉴몰든으로 몰려들었다.

두 번째 원인은 영국에 진출한 한국의 유명 기업의 본부가 대부분 런던 남쪽 웸블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삼성의 유럽 본부인데, 그것이 뉴몰든에 있었다(삼성 헤드쿼터는 2005년 이곳에서 런던 처트시로 옮김). 그렇다보니 주재원을 포함해 관련 한국인들이 자연스레 이곳 주변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뉴몰든 중앙도로 변의 한국 가게. 우리 말을 영어 알파벳으로 표기해 놓아 언뜻 보면 한국 가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주변 현지 상가에 비해 별로 튀지 않는다. 

 

탈북자들도 이곳에

최근엔 이곳이 영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들의 집단주거지역이 되었다. 현재 영국에 들어와 난민인정을 받은 탈북자들이 7백여 명에 이르는데, 그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산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한국 동포들과 같이 살아야 경제활동이 수월하다는 이유에서인 것 같다. 그렇다보니 기존 한국 사람들과 이들 탈북자들 사이에선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이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있었는지 탈북자들의 이곳에서의 삶이 몇 차례 주요 현지 언론에 의해 보도되기도 했다.

 

튀지 않는 한국인들

내가 본 뉴몰든은 2만 명이나 산다는 한국인 집단거주지역이라고 보기엔 조용한 분위기였다. 일정구역 전체를 차지해 영업을 하는 중국인들의 차이나타운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뉴몰든 중앙도로 여기저기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미장원, 여행사, 부동산중개소, 유학원, 한의원 등이 있지만, 현지인을 의식했는지 특별히 티가 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한국 가게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갈 정도다. 가끔 한글도 보이긴 하지만 많은 가게가 영어 알파벳으로만 상호를 써 놓은 경우가 많다. AGASSI, KIMCHI VILLAGE, HAMJIBAK... 이런 식이다.

교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이곳 한국 이민자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은 튀지 않는 방법으로 영국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이 점은 한국 이민자들이 선택한 매우 중요한 생존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영국인은 의외로 조용하고 소극적이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스타일이 많다.그러니 여간해서는 동네 사람들과도 그리 가깝지 않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한국 사람들 티를 내면서 장사를 하면 아마 영국인들로부터 배척당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사람들 상당수가 영어소통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묵하게 사는 것도 한 이유이긴 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민 역사가 길고 한 구역을 거의 통째로 장악한 중국인들에겐 중국식으로 생활하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어쩜 당연했을지 모른다.

 

뉴몰든 주택가

 

뉴몰든의 집값을 올려놓은 한국인

조용히 살 것 같은 한국인들이지만 어딜 가나 과도하게 열성적인 게 있다. 자식교육이다. 한국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 교육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뉴몰든이란 좁은 지역에 2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다보니 자연스레 근처 학교 분위기는 영국의 어느 곳보다 경쟁적이다. 좋은 말로 바꾸면 교육 수준을 한국인들이 올려놓았다는 말이다

원래 이곳은 런던에서 낙후된 지역이었음에도 최근 상당히 좋은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집값이 올라가고, 학군이 좋아지고... 이것들이 모두 한국인들이 해 놓은 것이다. 영국인들이 이런 현상을 가져온 한국인들에게 특별하게 흥미롭게 보는 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경쟁과 분열은 어디에서나

뉴몰든 중앙도로를 거닐다 보니 낮 익은 한글신문이 어느 상점 앞에 쌓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국어로 된 현지신문이 아닌가. 그런데, 신문이 하나가 아니다. 무려 4. 코리아 위클리, 유로저널, Korea Post, 한일 헤럴드. 참 대단한 한국사람들이다. 인구 2만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커뮤니티에 신문이 4개라니

 

뉴몰든 지역 한인신문

 

들어보니 이들 신문은 모두 2-3명이 만든다고 한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 씩 적잖은 분량의 신문을 어떻게 만들까? 그 제작과정도 궁금했지만 독자층이 뻔한 이곳에서 치열한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이곳 한인회가 지금 두 개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이다. 재영한인회와 영국한인회. 2007년에 한인회장 선거와 관련해 불복사태가 일어나 법정분쟁으로 비화된 게 계기가 되어 이렇게 분열되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한인회가 조용한 곳이 별로 없는데 신사의 나라 영국에 와서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니 잠간 온 사람이지만 답답하기 그지없다. 영국을 포함해 세계 많은 나라에 한인회가 조직되어 있고, 곧 대선국면에 접어들면, 재외동포 표를 의식한 선거운동이 있을텐데, 얼마나 이전투구가 있을까....빠른 시간 내에 한인회가 화합의 길로 들어서길 바랄뿐이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

나는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나그네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 영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것이다. 이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길일까. 정도야 없겠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국 현지인과 똑 같은 삶을 살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커가는 것이 후일 방황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몇 몇 교민들과 그런 대화도 나누어보았더니 그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말과 글이다. 그 두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영국에서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 모두가 이 문제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양질의 한국어 교육이 가능하도록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될 이유다. 한국 정치인들이 700만이 넘는 재외동포들의 삶에 좀 더 관심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