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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에 대한 기억

박찬운 교수 2016. 3. 4. 06:16

 

용기에 대한 기억

-딱 한 번 미친척하고 소리를 질러봐-



광장공포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

학교에 있다 보니 수줍은 학생들을 많이 본다. 이들은 매우 수동적이다. 교수 방은 언제나 열려 있음에도 교수가 일부러 찾기 전엔 졸업할 때까지 절대로 교수 방을 노크하지 않는다. 강의실에선 언제나 맨 뒷자리에 앉는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수업을 듣다가 시간이 끝나면 바로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이들에겐 발표수업이나 토론시간은 고역 중의 고역이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좋은 학점을 받으려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강의 중에 내 눈을 피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수업 중 의문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교수 연구실로 찾아와 추가적인 질문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내 요구와 제안에 따라오는 학생들은 극히 드물다

 

내가 보기엔 학생들 대부분이 광장공포증(agoraphobia)에 걸려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싼 광장에 나오는 순간 오금이 저리고 입이 닫히는 증상에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상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나서도 평생 고치지 못한다.

 

나는 적극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성숙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저 식물인간 상태의 국회, 토론 없이 받아쓰기만 하는 국무회의는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 가지 내세울 게 있다면, 나는 어딜 가도 내 목소리를 내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어떤 면전에서도 할 말은 한다. 침묵이 흐르는 그 엄중한 순간,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권위로 누를 때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나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광장공포증에서 일찍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광장공포증에서 해방된 데에는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 이것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과거다. 오늘 나는 그걸 소개하고 싶다.

 

! 너희들 부끄럽지도 않아!

첫 번째 일화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중학교 3학년 때 교실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울의 S 중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 반장이 되었다. 요즘처럼 선거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를 좀 한 덕에 선생님이 지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이었다. 자습시간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도 친구들이 떠들었다

 

반에 불량한 친구들 몇 명 있었는데, 누구도 그들의 도 넘치는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다. 반장도 별수 없었다. 그런데... 부반장이었던 Y가 일어서 교단으로 나가면서 괴성을 질렀다. “!” 아이들은 깜작 놀라 Y를 바라보았다.

 

, 너희들은 아침에 어머니한테 도시락 싸달라고 해서 와가지고 고작 이렇게 떠들거야? 도대체 이게 뭐냐? 부끄럽지도 않니?”

 

저 말은 중학교 3학년 아이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내 친구 Y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이다. 이 날 친구들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일시에 사태가 진정되었다. 뒤에서 노는 친구들마저 뭔가 부끄러운 듯이 꼬리를 내렸다.

 

그 순간 내 심정은 어땠을까?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반장이 했어야 할 일을 부반장이 했으니 내 존심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Y를 미워할 수도 없고....이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때 나는 이런 결심을 했다. 앞으로 어딜 가도 필요할 때 이렇게 행동하자.(사실 나는 고교시절 한 두 번 Y를 흉내낸 연설을 교실에서 해본 적이 있다. 중학교 때와 똑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효과? 백프로였다!)

 

! 너희들 아침에 어머니가 도시락 싸주시면서 보낼 때 이렇게 떠들려고 학교 온 거야!”

 

! 1류 학교 별게 아니야!

두 번째 일화는 고교시절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서울의 H고였는데, 2학년이 되던 해 우리 학교 축구팀이 서울시 축구대회 4강에 올랐다. 준결승을 앞두고 1-2학년 학생들이 모여 응원연습을 하였다. 응원단장은 배재중학교 출신의 내 단짝 L이었다. 1200여명이 운동장에 모여 손발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방방송. 응원단장의 지시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아 응원연습은 시간만 가고 진척이 없었다. 나는 점점 열이 올랐다. 가슴이 뛰었다. 임계점을 넘자 나는 운동장 한 가운데로 달려갔다. L이 가지고 있는 마이크를 낚아챘다. 큰 소리로,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톤으로!”를 외쳤다. 순간 운동장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2학년 박찬운이다. 한 마디만 묻자. 너희들이 보기엔 우리 학교가 1류 학교인가, 2류 학교인가? 아마 스스로 2류 학교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금 봐도 그렇다. 우리 학교는 2류 학교다. 우리 계속 2류 학교에서 공부할래? 아니면 1류 학교에서 공부할래? 내가 1류 학교 되는 방법 알려줄까? 그것 간단하다. 오늘 같은 날 응원단장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연습하고, 빨리 교실로 들어가 공부할 수 있으면 그게 1류 학교다. 그거 별거 아니다.”

 

내 친구들과 후배들이 그날 내게서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응원연습? 물론 쌈박하게 끝났다. 내 말이 있고나서 우리들은 변했다. 내 말에서 자존심이 발동했는지,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는지, 지방방송은 꺼졌고 L의 지휘통솔은 일사천리로 먹혔다.

 

단 한번만 외쳐보자, “!”

이 두 개의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 두 개의 에피소드 이후 광장 공포증을 극복했다. 내 머릿속엔 이 두 개의 사건이 언제나 잠재해 있어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런 행동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항공기 내에서의 일장 연설도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항공사의 말도 안 되는 서비스(아무 설명 없이 4시간 지연 이륙)에 많은 승객들이 분노했지만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고교시절 운동장에서의 그 일이, 아니 중학교 시절 그 수치스러웠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일어나 승객들에게 이런 일에 대해 참지 말고 항공사에 사과를 받아내자고 기내 연설을 한 것이다.(결국 항공사는 며칠 후 공식적으로 승객들에게 서면사과를 했다) 나이는 먹어 머리는 이미 반백이 되었지만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강의실에서 곧잘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인생에서 한번쯤은 미친척하고 소리를 질러볼 것을 권유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바라 볼 거야. 바로 그 때가 기회야. 그 때 딱 한번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발휘해 !’라고 소리를 쳐봐.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봐. 그렇게 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세상은 바로 네 것이 될 거야. 누구도 무섭지 않을 거야. 제발 그 딱 한 번의 기회를 가져봐! '야ㅡ' ”

 

(2016.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