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 13 ‘그림 읽는 법’에 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11. 13. 16:09


인문명화산책 13

그림 읽는 법에 대하여-건우가 묻고 박교수가 답하다-




명색이 법률가라는 사람이 법률이야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이냐고요. 그래서 오늘은 제 본업과 관련된 글을 하나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야기입니다. 무슨 법이냐고요?  ‘그림 읽는 법’입니다. ...허허! 좀 썰렁했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좀 색다르게 하고 싶네요. 법 이야기란 게 대개 재미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그림 볼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림독법에 대해 제 제자와 이야기하듯 써보겠습니다. 제 사랑하는 제자 건우를 소개하지요. 건우는 학부생으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친구입니다. 이제부터 건우가 묻고 박교수가 답하겠습니다.


그림감상은 화가와 대화하는 것

건우: 선생님께 먼저 그림감상의 의미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감상은 미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박교수: 만일 어떤 화가가 누군가가 관람할 것을 전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관람이 없다면, 아직 그 그림은 완성된 게 아니라고 보아야 할 거야. 어떤 작품도 화가가 붓을 놓는 것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거든. 관객과  그림이 상호소통할 때 비로소 그림에 생명력이 들어가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네. 그림은 화가가 홀로 만드는 게 아니고 관객과 함께 만드는 것이지.

그림을 보기 전에 이것 하나는 꼭 염두에 두면 좋을 거야. 화가가 어떤 대상을 단순히 똑 같이 그려낸 것이 아니라면, 그의 그림엔 반드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가 있을 거야.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화가와 공감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감상은 관객이 그림을 사이에 두고 화가와 대화하는 것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메시지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답이 있는 확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비록 작가가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해도 그림을 보는 관객에겐 독자적인 감상 영역이 있는 것이야. 관객은 작가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면에서 감상은 상상력을 통한 또 다른 재창조라고 할 수 있어. 그것이 없다면 그림감상은 마치 정답을 맞히는 퀴즈 같은 게 될 거고, 재미있는 일이 아닐 거야.


현대회화는 보는 것보다는 읽는 것

건우: 아, 그렇군요. "화가의 창작은 관객의 감상과 합쳐져야 하나의 예술품으로 완성되고, 관객은 그림을 사이에 두고 화가와 대화한다. 그리고 감상은 새로운 재창조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미술 관련 책을 보니 그림은 단순히 감상하는 게 아니라 매우 분석적으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림은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읽는 것입니까?

박교수: 좋은 질문이네. 물론 그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고 감동할 수 있네. 그런 면에선 그림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래 나타난 현대화, 특히 추상화 계열의 그림은 그냥 보아서는 감동하기 어렵네

그게 무슨 그림인지, 무엇을 표현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게 많거든.  그래서 20세기 이후엔 많은 그림이 분석의 대상이 되었네. 관객은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게 아니고 읽는 것이지모름지기 그림 감상에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감동하는 것이거든. 여기서 도상학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네. 그것을 통해 그림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거든.

건우: 도상학, 그게 무엇이지요.

박교수: 도상학(圖像學)은 그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미술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네. 우리는 역사적 시각과 문화적 맥락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면서, 그 작품 속의 여러 상징이 어떤 의미인지를 풀어낼 수 있지.이런 도상학은 물론 르네상스기 이후 계속 존재해 왔지만 특별히 학문 영역으로 발전된 것은 19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

다만 현대화 중에선 아예 처음부터 대상 재현을 포기한 그림(이를 비구상화라 함)이 있는 데, 이런 그림은 도상학으로도 해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네. 그런 그림은 다른 차원의 감상법을 익혀야 하지. 솔직히 말해 나도 잘 몰라. 오늘 내 이야기는 그런 그림까지 감상하는 것을 목표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네.


라스코 벽화, 지금으로부터 1만7천 년 전의 채색 벽화다.


중국 길림성 집안의 무묭총, 조성연대는 5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현대미술에서 도상학이 중요한 이유

건우: 19세기 이후 도상학을 알아야 미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박교수: 아주 좋은 질문이야. 현대 서양회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미술의 역사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네. 20세기 최고의 미술사학자 중 곰브리치(1909-2001,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미술사학자로 주저 '서양미술사'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임)라는 사람이 있는 데, 그의 말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의 핵심을 설명하겠네. 그에 의하면 서양미술은 크게 3단계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네

1단계는 2차원의 평면 위에 단조로운 색을 사용하여 2차원의 그림을 그린 것이네. 자네 기원전 15천 년 전에 만들어진 알타미라나 라스코 벽화에 나오는 소를 본 적이 있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군. 고구려 무용총벽화를 기억하지? 거기 보면 수렵도니 인물도니 하는 것에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잖아? 이런 것들은 모두 색이 아주 단순하고 입체감이 없네. 원근감? 그런 것은 더욱 찾을 수가 없지. 서양을 기준으로 말하면 르네상스 전까지 바로 그런 그림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지.


마사초, '성 삼위일체', 1427. 바로 이 제단화가 서양화에선 원근법이 시도된 최초의 그림으로 소개되고 있다.


2단계는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그림을 그린 시기네. 이를 위해선 기술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원근법과 색의 혼합기술이네. 서양에선 르네상스 이후에나 이게 가능해졌지. 서양 미술관에 가서 15세기 이전 성화를 보게나. 회화의 수준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들 그림에서 원근법을 발견할 순 없네. 그리고 색은 여전히 단순하지.

르네상스 이후 원근법이 개발되고 색의 혼합이 발달하면서 그림엔 일대 혁신이 일어나네. 이제는 자연현상을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고 그것에 의해 자연에 근접한 그림이 탄생한 것이지. 이런 상황에선 화가의 능력이란 바로 있는 것을 그대로(혹은 그 이상으로) 그릴 수 있는 재주였. 우리가 다 잘 아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도 다 이런 축에 속하는 거지.

3단계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미술경향이네. 이제 화가는 더 이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릴 필요가 없게 되었네. 사진이 발명되었거든. 이제 어떤 화가도 사진만큼 자연을 묘사할 수 없게 된 것이지. 화가들이 자칫하면 밥줄 끊어지게 된 상황이 온것이야. 이 상황에서 화가들에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을 거야. 화가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는 말이야.

화가들은 그동안 그려왔던 형태와 감정의 자연주의적 묘사를 해체하기 시작했지. 새로운 형식의 형태와 감정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야. 아마도 그 시작은 인상파 화가들이 감행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그들에 의해 자연적 묘사는 왜곡된 묘사로서의 예술성으로 나타나지. 이 왜곡은 인상파보단 그 후에 나타난 상징주의 혹은 표현주의로 가면 더 심해지지. 이때부터는 그림을 그냥 보아서는 알 수 없고 도상학적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지.



에곤 실레(1890-1918)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아이콘, 에곤 실레

건우: 선생님 그럼 지금부터는 그림을 직접 보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늘 준비하신 것이 에곤 실레의 작품이라고 하는 데, 작품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실레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시지요.

박교수: 며칠 전 표현주의 탄생과 관련해 클림트 이야기를 했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미술경향(상징주의 혹은 표현주)을 대표했네. 그는 인간을 생물학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지

여기에 또 한 인물이 추가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에곤 실레(1890-1918)라는 사람이네. 실레는 클림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천재화가인데 불행히도 나이 28세에 요절하네. 만일 그가 천수를 누렸다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는 클림트가 아닌 그가 되었을지도 모르네. 묘하게도 클림트가 죽는 해(1918)에 함께 죽고 말았지. 두 명의 별이 한꺼번에 세상을 등진 거야.


도상학으로 읽는 에곤 실레의 여인

건우: 오늘 선생님이 준비하신 그림은 실레가 그린 여인이란 작품인데요. 우리는 이 그림을 어떻게 감상하면 되겠습니까? 왜 사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다른 감상을 하는 걸까요?

에곤 실레, '여인, 1917년


박교수: 그래, 그럼 본격적으로 이 그림을 보도록 하세.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오늘 곰브리치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사가 파노프스키(1892-1968, 독일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20세기 도상해석학을 제창하고 그 방법론을 확립함)의 도상학 이론을 기초로 설명하겠네. 그 양반은 그림을 보는 관객은 세 가지 수준에서 그것을 읽는다고 했거든

그게 바로 전()도상학적 해석, 도상학적(iconography) 해석(도상의 주제를 판명하는 것), 도상해석학적(iconology) 해석(도상의 심층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란 것인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상학적 해석 외에 도상해석학적 해석이란 개념까지 인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일반적으로 도상학에 그것까지 넣어서 해석이 가능하니까.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전()도상학적 해석과 도상학적 해석으로 나누어 실레의 여인을 읽어보려고 하네.

첫째, ()도상학적 해석이란 그림의 색이나 선 등에서 직관적인 해석을 말하네. 누구나 그림을 보면 할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이것도 사람마다 직관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나온다네. ‘여인을 보면서 말할까? 자네는 이 그림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나?

건우: 저는 우선 인물을 그리면서 분명한 선을 쓴 게 조금 색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선에서 무엇이랄까, 강한 의지 같은 게 느껴져요. 그런데 근육질 여자란 게 저에겐 그리 매력적이진 않아요. 제가 이런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조금 부드러운 여자를 좋아해요. 그게 여성스러움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관능적인 것을 느끼기 어려워요. 그것 보다는 오히려 섬뜩함을 느낀다고 할까요. 자칫 이 여자에게서 무슨 일을 당할 것만 같아요. 하하. 선생님 제가 좀 심한 말을 했나요?

박교수: 아 그래, 나는 좀 다른데... 나는 이 여인의 풍만한 가슴과 근육질 몸매에서 성적 에너지를 느낀다네. 아슬아슬하게 국부를 가렸지?저걸 보면 내 마음마저 아슬아슬하네그리고 저 헝클어진 이불에선... 자네에게 이런 야한 이야기하기 어렵다만, 이 여인은 분명 어떤 남자와 격렬한 섹스를 한 다음 일시적으로 자기 몸을 떠난 남자를 다시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 같아. 

건우: 하하하. 역시 교수님과 저는 세대차가 있는 것 같아요.

박교수: 두 번째로 이 그림을 도상학적으로 해석하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더 느낄 수 있게 될거야. 도상학적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문화적 맥락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네. 자 여기에 12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 그림이 있다고 하세. 이 그림을 서양인들이 보면 무어라 생각할까? 아마 수 초 이내에 이 그림을 예수의 최후의 만찬과 연결시킬 것이네.

빈센트 반 고흐, '아버지의 성경' 1885년


겸사겸사해서 그림 하나를 더 볼까. ,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에 그린 아버지의 성경이란 그림이네. 고흐는 이 그림에서 성경과 소설책 한 권 그리고 꺼진 촛불을 그렸네. 도대체 이게 무얼까? 만일 고흐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그림을 그렸다면 이 작품은 그림대접을 받지 못할 걸세. 그렇다면 이 그림이 의미 있는 작품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뭐겠나. 이 그림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게 아니라는 것이지.

이 그림은 매우 상징적인 그림으로 성경은 아버지를, 소설(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은 고흐를 상징하네. 꺼진 촛불은 무엇일까? 해석하는 이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여기서 보네. 그리고 성경과 소설을 이렇게 배치해 놓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할 수 없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이 그림에 대해서 좀 더 알고자 하면 2015년 여름 출간된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를 참고 하게나.) 

바로 이게 고흐 그림을 간단히 도상학적으로 이해한 것이네. 내가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고흐가계의 내력, 고흐와 아버지의 관계, 고흐가 읽어왔던 책,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 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나.

따라서 이런 식으로 실레의 그림도 해석이 가능하네. 그런 관점에서 한 번 이 그림을 읽어볼까. 우선 레가 황토색 배경 하의 근육질의 여성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걸까? 나는 실레가 남성이 독점한 성의 자유를 여자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보네. 근육은 남성의 상징이고, 검은 모발은 권위나 지배를 나타내지(참고로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여인의 모발은 흑발이 아니고 금발이네). 황토색의 배경도 어떤 성적 에너지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전체적으로 마초적 분위기가 물신 풍기지 않나? 

남자는 조물주가 언제든지 원할 때 섹스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보는 게 남성주의적 성윤리지. 실레는 그것을 뒤엎은 것이네. 여자도 인간이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섹스의 욕망이 있다고 본 것이지. 그래서 남성같은 근육질의 흑발 여자를 표현한 것이지. 이것은 실레가 젊은 시절 비엔나의 의학, 생물학 등에서 배운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네. 당시 비엔나의 지성계를 지배한 프로이트의 영향이지. 실레는 여인의 겉모습을 그린 게 아니야, 여인의 속모습을 그리려고 한 거야.

둘째, 왼손을 보게나. 여성의 손이라고 보기엔 너무 남성스럽지? 누워있는 사람 손으로선 자연스럽지 못해. 마치 누구를 쥐어뜯을 태도네. 저 모습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거야. 육체 중에서 성을 표현할 때 보통 손을 사용하네. 그러니까 저런 손의 표현은 성적 열망을 의미하는 것이. 앞에 있는 남자에게 '빨리 내게 와'라고 하는 것 같아. 안 오면 저 손으로 남자를 쥐어 뜯을 것 같지 않나. 하하. 성적 열망이 강하면 그건 폭력성으로 연결되지. 저 모습이 그 폭력성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밀로의 비너스, BC 130-10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비너스는 소위 팔등신 미인을 조형화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미의 이디아를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상체는 알몸이지만 매우 형이상학적 미를 표현하였고, 하체는 옷으로 가렸지만 관능적이다. 혹자는 상체를 플라토닉하고, 하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 번째, 이불 끝으로 국부를 살짝 가린 것을 보게. 실레는 왜 저렇게 그렸을까? 이불 끝을 조금 위로 올려 국부를 완전히들춰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보여줄 건 다 보여주었는데...  인간의 성적 호기심은 완전한 나체에서 보다는 살짝 가린 것에서 더 강렬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저 면에선, 실레가 고대 그리스 이래 서구사회가 가져 온 가림의 미학을 존중한 거라고 봐야 할 거야.

여기 밀로의 비너스를 보게. 만일 비너스의 저 옷이 조금 더 내려왔다면 관객은 어떤 느낌을 가질까? 아마 관능을 자극하는 여인의 몸에 대한 상상력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네. 성적 자극은 자고로 약간의 가림에서 오는 상상력으로 증폭되는 법이지. 그게 없다면 삽시간에 식상해지지 않겠나. 아마존 밀림에서 사는 여인은 대부분 나체로 사네. 그 여인을 볼 때 성적 호기심이 생기던가. 생겨도 금방 식겠지. 실레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짝 이불 끝으로 저 국부를 가린 것이지.

실레의 그림을 도상학적으로 풀어 한마디로 말하면 여성의 성적 욕구를 과감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오늘 '그림 읽는 법'은 이 정도에서 마치세.

건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강의가 앞으로 그림을 보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림 읽는 법 오래 동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 11. 20.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