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일본여행기

일본방문기 17-5 One of Founding Fathers -내 인생의 두 장면-

박찬운 교수 2017. 7. 2. 05:54

일본방문기 17-5

One of Founding Fathers

-내 인생의 두 장면-

 

이번 일본 방문기를 마무리하면서 빠트려서는 안 될 일이 있다. 622일 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아카사카의 한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슴은 뛰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날이다. 한일 한센변호단 변호사들이 이날 도쿄에서 행사를 치르고 저녁 식사를 하는데 합류한 것이다. 수상 관저 건너편 고층건물 27층에 자리 잡은 식당은 어느새 도쿄의 야경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한일 한센변호단 모임이 열린 아카사카의 식당에 본 도쿄의 야경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박영립, 조영선 변호사를 비롯한 한국 변호단, 도쿠다, 쿠니무네 변호사를 비롯한 일본 변호단, 거의 30여 명의 한일변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모임은 한국과 일본에서 양국의 변호사들이 벌려온 한센인 관련 소송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자리다.


두 나라의 변호사들은 2004년 이후 13년 동안 상호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양국에서 진행되어 온 한센인 소송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2004년 소록도 한센인들이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에선 비록 패소했지만 양국 변호사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일본 국내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식민지 시대 소록도에 강제격리되었던 한국 한센인들 500명 이상이 보상을 받았다.

 

한일 변호단을 이끈 두 변호사의 스피치, (위) 한국 변호단의 김성기 고문(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아래) 일본 변호단의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전 오이타 변호사회 회장)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 변호단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 의해 인권침해를 받은 한센인들을 위해 국내에서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에 대해 수십 년 간 자행된 단종수술에 대해 국가적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 소송에서 우리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판결을 선고했다.


13년간 이 일에 몰두해 온 한일 변호단 소속 변호사들은 이 시대의 영웅들이다. 이런 변호단 모임에 내가 왜 초대되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두 변호단과 내가 특별한 인연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하여 한국 한센변호단의 one of founding fathers 이며 한일 변호단을 연결시킨 장본인이다. 그 시작은 20045월이었다. 나는 이들과 만나면서 내내 13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도쿄의 야경을 보니 그날 소록도의 달밤이 아련하게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일본 변호단 도쿠다 변호사와 미나구치 변호사와 함께


일본 변호단 단장 쿠니무네 변호사와 함께


한국 변호단 단장 박영립 변호사와 도쿠다 변호사와 함께


작년 한국 한센 변호단은 그동안의 활동을 기록한 백서를 발간했다. 나는 그 백서에서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좀 길지만 관련 부분을 옮겨 보자.


이렇게 하여 나는 200454일 생애 최초로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12일의 소록도 방문은 내게 크나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자치회 분들, 병력자이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병원 관계자를 만난 그날 밤 금산(거문도)이 보이는 화이트 하우스(소록도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서 오츠카 변호사와 모토무라씨와 환담을 나누었다. 단 몇 시간이지만 나는 변해 있었고 무엇인가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 하자, 이들과 함께 소록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 이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날 천상병 시인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해보자.

 

56일 나는 서울로 오는 열차 안에서 가지고 간 노트북을 켜고 부지런히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한변협 인권위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나는 일본변호단의 요청사항을 정리하고 소록도 상황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소록도소송변호단을 만들어 이를 변협차원에서 지원하고 나아가 변협에서 한센인의 인권보호에 앞장설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 변협 인권위에 한센병인권소위원회를 만들 것도 제안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이런 말을 넣었다.

 

우리는 과연 소외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는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소록도의 환자와 같이 내 몸속에 한센균이 침범하였다 하자, 다행히도 빨리 치료하였더니 아무런 증상도 없이 완쾌되었다. 그런데 사회는 나병환자, 문둥병 환자라 하면서 나를 절해고도로 가라한다. 나의 인생,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의 가족,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며칠 뒤 변협인권위는 이러한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아마도 이는 당시 변협인권위원장이었던 박영립 변호사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박변호사는 나의 보고서를 그대로 수락하면서 새롭게 생기는 한센병인권소위원회를 맡아 볼 것을 제안하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2004년 5월 4일 내 생애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한 그 역사적 순간, 소록도를 들어가는 녹동항에서


누구나 살다보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장면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20045월의 이 장면을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장면을 보탠다면 13년 후인 20176월 도쿄의 밤이 될 것이다. 소록도의 고요한 달밤이 눈부신 도쿄의 야경으로 바뀌긴 했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대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