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문을 넘어 모든 이의 역사가 된 가문 이야기
-<서간도 시종기>를 읽고-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가 워낙 한미한 집안출신이라 그런지, 가문, 집안, 문벌...이런 유의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한다. 나는 나대로 살고 싶지, 어떤 누구의 아들로, 어느 가문의 일원으로 살거나 평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문에 대해선 알아보고 싶고, 그 앎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 이미 그 가문은 일개 가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감동 이상을 준 전설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 가문.
<서간도 시종기>의 저자 이은숙 여사와 남편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의 북경 시절(1924), 앞 줄 맨 오른쪽 인물
우당 형제들은 조선 중기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정승과 판서가 끊이지 않았다. 이름하여 조선 최고의 명문가다. 더군다나 우당은 고종과도 특별한 사이다. 우당의 며느리(아들 규학 씨의 처)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주이자 고종의 조카다. 그러나 이 집안이 전설이 된 것은, 이 집안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정승 판서가 끊이지 않았고 왕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가 댁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 사회가 망했을 때 그 사회에서 영광을 누린 사람들이 어떤 책임을 졌는지를 무섭도록 치열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대로 우당 형제들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헐값에 처분하고 식솔을 거느린 채,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우당을 비롯한 6형제 중 해방이 되었을 때 살아 돌아 온 이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다섯째 이시영 선생뿐이다. 우당은 고문당해 죽었고(1932년), 조선 최고의 부호로 소문난 영의정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간 둘째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국권이 상실된 1910년 말 우당 형제 6형제는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언젠가 나는 안동 임청각을 소개하면서 그곳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가문도 조선조 최고 명문가 반열에 오른 집안이었다. 그런 가문의 주인이 국권이 상실되자 재산을 삽시간에 처분하고 수 십 명의 식솔을 거느린 채 망명길에 올랐다. 우리가 이제껏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알아야 될 역사다. 그 글을 쓰면서 다음엔 꼭 우당 일가를 소개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날이 오늘이다.
서간도 시종기
오늘의 이야기는 얼마 전 집으로 도착한 책 한 권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평소 존경하는 이철우 교수(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가 보내 준 것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법사회학 분야의 권위자로 왕성하게 국제적 활동을 하는 연구자다. 그가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손(증손)이다. 우당의 둘째 아들(첫째 규룡 씨는 양자를 갔으니 집안에서 이분을 첫째로 부름) 규학 씨의 3남이자 정치인으로 잘 알려진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원장은 현역 정치인 이종걸 의원과는 사촌 간이고, 이의원은 우당의 막내 아들 규동 씨의 장남임)의 장남이다. 그가 내게 자신의 집안 이야기가 담긴 책 한 권을 보낸 것이다. 평소 이 가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일견 그 의문을 풀어주는 책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꼼꼼하게 읽었다. 매장마다 밑줄을 치면서 말이다.
우당의 손자 이종찬 국정원장과 이원장의 장남 이철우 연대 법전원 교수
<서간도 시종기>는 우당의 둘째 부인(우당은 첫 부인과는 사별하고 1908년 재혼함) 이은숙 여사(1889-1979)의 회고록이다. 여사는 이 글을 통해 우당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자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기록한다. 우당은 혁명가였고 망명객이었기 때문에 어떤 메모나 일기도 남기지 않았다. 언제 잡혀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역사는 날이 가면 잊게 마련이다.
여사는 생전 그것을 초조해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당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이 가문의 역사를 후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우당을 잘 아는 이들이 필을 들지 않으니 조바심에 결국 여사가 필을 들었다. 문인이 아닌데다 옛글을 익힌 여인이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여사가 글을 완성한 것은 1966년 3월 17일, 우당이 살아 있다면 100살이 되는 날이었다.
이 책은 처음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 시종기->라는 제목으로 출간(1975년)되었고, 후일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1981년)이라는 제목으로 중판되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이 책을 보긴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은숙 여사의 문장이 한문 투의 조선조 규방규수들이 사용하는 언문체(한글)였기 때문이다.
이은숙 여사가 육필로 쓴 서간도 시종기
이 책이 2017년 7월 새롭게 단장을 하고 일조각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제를 붙이고 글 내용 전체에 주석을 붙인 새 판이다. 이 작업은 한경구(서울대)·한홍구(성공회대) 두 형제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두 교수 집안과 우당 가문과의 특별한 관계가 작용한 것 같다. 두 형제 교수의 아버지는 출판사 일조각을 세운 한만년 씨고,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언론이었던 월봉 한기악 선생이다. 월봉은 젊은 시절 우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북경 시절엔 생사고락을 같이 동지이기도 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서간도 시종기>는 일조각이 만든 월봉저작상의 제1회(1975년) 수상작이 되었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우당의 동생 이시영(1869-1953)
독립운동가 가문과 한 여인의 일생
이 책은 역사 전문가나 문필가가 쓴 게 아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한 아녀자가 자신의 경험을 육필로 쓴 글이다. 그런 이유로 내용은 거칠고 일부가 객관적 사실과 배치되기도 하지만,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여성으로서의 독특한 시각을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20세가 넘는 장년의 남성(이여사와 재혼할 때 우당의 나이 42세, 여사의 나이 20세였음, 당시 우당의 나이는 장인 장모보다 위였다.)과 결혼한 여성이 맞딱뜨린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도대체 이 시대의 여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도대체 이 시대의 가족이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도대체 이 시대엔 남편과 아내란 어떤 관계로 맺어지는 존재이었을까? 글을 읽어가면서 내가 끊임없이 질문한 내용이다. 나아가 우당 가문의 독특함도 내겐 큰 흥미거리였다. 무엇이 이 가문으로 하여금 이런 신고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했을까? 무엇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대가족으로 하여금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 것일까? 그 속에서 여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책을 넘기자 곳곳에서 그 답이 발견되었다. 몇 부분만 이곳에 옮기면서 내 생각을 적어본다.
우당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
“나는 가군(우당)을 대할 제 하늘같이 앙망하고 스승같이 모셨는지라. 가군께서 ”번창한 대소가를 혹시나 잘못할까. 전 소생 3남매에게 잘하고 친해하며 말없이 화목을 주장하라“하고 이르시던 말씀 지금도 어제 같도다.”(57)
“나의 심력은 말할 수 없이 괴롭지만 가군의 뜻을 일호나 거역하리오.”(125)
이 말에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어른과 결합한 한 젊은 여인의 심사를 읽을 수 있다. 남편에겐 재혼 전 부인과의 소생이 있었다. 그러니 그 자식들과의 화목이 이 집안에 큰 문제였을 터인데, 우당도 이것을 염려했던 모양이다. 이은숙 여사는 남편의 걱정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말없이 따랐다. 그것이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 상해 강만 비행장에 도착한 이시영과 마중 나온 가족들, 중앙에 김구 주석, 그 앞의 꼬마가 이종찬 전 국정원장, 그 옆으로 눈에 손을 대고 있는 노인이 이시영
우당의 형 석영에 대한 회고
“우리 시숙 영석장(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인데 백부 이유원 댁으로 양자가셨다. 양가 재산을 가지고 생가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방매해 가지고 경술년 12월 30일에 대소가가 압록강을 넘었다.”(65)
“세상에 우리 시숙 같으신 분은 금세에 없으신 분이지만 어느 누가 알리오.”(81)
여사의 시숙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강렬하고 애뜻하다. 무릇 시동생이나 시숙은 심정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인척인데... 그럼에도 시숙 이영석은 별다른 존재였다. 시숙은 그 많은 재산을 급히 처분하고 동생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운동가의 메카로 불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그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조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우당이 고문으로 죽은 지 2년 뒤(1934) 중국 땅에서 굶어 죽었다. 오호통재라!
독립운동가의 역경
“경신, 신유(1920-21) 1, 2년간은 그럭저럭 손님 대접과 만세 소동에 동지들이 사업비와 생활비 겸하여 혹 보내 주더니, 그나마 3, 4년 후에는 단 일 푼 보내주는 이 없었다. 왜놈들의 세력은 점점 높아 북경까지 뻗치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날로 사라지니 어느 인간이 이를 알아 알뜰히 보살펴 주리고. 내 지금도 역력히 생각나느니, 그 때는 정말 뵙기 딱하고 가엾으시지, 하루 잘 해야 일중식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로다.”(126-127)
이게 당시 독립운동가의 삶이다. 조선 최고 명문가가 중국 땅 북경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렸다. 기미 독립선언 이후엔 조국에서 얼마간의 후원금이 왔으나 그것도 시간이 가면서 끊겼다. 삼시 세 때 밥을 구경하지 못하고 한 달에 반은 굶은 날이 계속되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도 여사는 자신의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 우당을 걱정한다. 이게 양가집 여인의 숙명인가?
우당의 자식에 대한 교육
“우리 혁명가 자식은 어려서부터 모험 행동을 가르쳐야 마음이 단단해지는 게니 염려 마오. 또 이 애는 10세쯤 된 아이라도 제 마음과 도량이 30세 어른(같으니), 부모덕으로 호강으로 자란 사람보다는 나아서 잘 다녀올 것이오.”
우당은 철저한 혁명가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았다. 그로 인해 가족은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여사는 북경 망명 시절 아들 규창의 11세 때 기억을 회고하는 데, 규창이 천진에 사는 시숙 이석영의 집에 혼자 가서 예정된 날 돌아오지 않자,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그 때 우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우당이 이런 말을 하자마자 규창이 집에 당도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여인의 기개
“너희 눈으로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간 걸 보았느냐? 잘못 보는 눈 두었다가는 우리 동포 다 죽이겠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며, 말이면 다 하는가? 우리 영감의 굳세고 송죽 같은 애국지심을 망해 놓으려고 하는 놈들, 김달하와 처음부터 상종한 놈들이 저희가 마음이 졸여서 누구를 물고 들어가려고 하는가? 정말 바로 말 아니 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
이 장면은 밀정 김달하 사건과 관계 있다.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사람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신망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본색을 숨긴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졸지에 사망하고 나서 얼마 뒤, 우당은 가까운 동지 신채호와 김창숙으로부터 (우당 내외가) 김달하 문상을 다녀왔으니 절교하겠다는 편지를 받는다. 이에 격분한 이은숙 여사는 칼을 품고 신채호와 김창숙을 찾아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할 것과 김달하를 우당에게 소개한 것이 김창숙 당신이 아니냐고 따져 물으며, 남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저렇게 항의를 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개가 넘치는 여인 아닌가. 나이 30대 중반의 여인이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당대의 독립운동가들 앞에서 칼을 품고 항의를 했다니...상상할 수 있는가? 이 모습이 여필종부하는 조선 여인이었다는 말인가?
우당의 죽음과 회한
우당은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받다가 죽음을 당한다. 이은숙 여사는 그 전인 1925년 서울로 돌아와 공장에 다니고 바느질을 하면서 돈을 모아 우당에게 보냈다. 그 세월이 무려 7년. 그 사이 우당이 중국 땅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들 부부에겐 마지막 소생 규동(이종걸 의원 부친)이 있었다. 규동은 여사가 서울에 와서 출산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 우당을 끝내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사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우리 규동이는 그 때 7세라. 언어 통할 때부터 아버지에게 가자고 일구월심 바라던 것인데, 그렇다고 누가 있어 못 가게 말린 것도 아니고 다만 생활 문제로 이달 내달 한 게 6, 7년을 못가고 차일피일하며 동가숙서가식 하던 것이, 어딜것에게 일생을 두고 유한되게 하였으니, 어미된 이영구(이은숙 여사)의 골수에 맺힌 여한은 구천지하에 가서나 가군에게 사과할까? 어느 누가 우리 모자의 첩첩이 쌓인 유한을 이해하리오.”(227)
전쟁과 어머니의 마음
이은숙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조국이 해방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5년 후 전쟁. 시숙은 부통령이었지만 집안 사람들의 삶은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주 봉선사라는 곳으로 피신한 때의 일이 내겐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뭉클한 대목이다. 당시 아들 규동은 자칫하면 인민군대로 끌려갈 수 있어 한 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다가도 옆에 규동이가 있으면 안심이 되나 혹시 변소라도 갔으면 깜짝 놀라서 일어나, 그 어두운 곳을 더듬어 찾아가서 가만히 불러 보아 소리가 들리면 반가워 기다리고 있다가 모자 함께 들어와 날을 새기도 하였도다.”
이종걸 의원, 우당과 이은숙 여사 사이에서 낳은 규동 씨의 장남
이렇게 해서 한 여인의 회고록을 통해 전설이 된 가문을 잠시 살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언젠가 명동 성당 앞에 가면 주위를 한번 둘러볼 것을 권한다. 성당 건너편 현 YWCA와 은행연합회관 일대가 과거 우당 이회영 형제가 살던 집터다. 대략 1천 평 정도가 되는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집값만 해도 현 시세라면 수천억에 달한다. 거기에 살던 조선 최고 명문가 형제들이 일시에 재산을 처분하고 수십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떠나는 장면을 그려보라.
그들 가족은 죽음으로써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국가주의, 개인주의, 진보, 보수를 넘어 우리가 인정해야 할 최소한의 역사가 아닐까. 그들이 당시 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었다면, 바로 참 보수란 그들이 보여준 그 희생이 아니었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생각한다. 이런 평가가 전설이 된 한 가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본다.
마지막 한 마디. 지난 주 정부는 고 이은숙 여사에게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남자 애국자가 존재했던 이유는 그들 가족인 여성 애국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은숙 여사의 영전에 축하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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