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의 진정한 일등공신, 알렉산더 해밀턴
-베개 같은 책 <알렉산더 해밀턴>을 읽고-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
오늘(2018. 9. 29) 오전 드디어 대작을 완독했다. 이 시대 미국의 최고 전기 작가라고 불리는 론 처노(Ron Chernow)가 쓴 <알렉산더 해밀턴>(서종민·김지연 옮김). 1426쪽의 책이다. 이 책을 읽느라고 지난 2주 동안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했다. 집에 들어오면 바로 독서 모드로 전환, 취침 전까지 한 두 시간, 새벽 4시부터 아침 식사 전까지 또 한 두 시간을 할애해 읽었다. 특히 지난 추석 명절 때엔 두문불출 논문을 쓰다가도 하루 몇 시간은 이 책 읽는 데에 정성을 쏟았다. 빠른 속도로 읽었지만 족히 30시간 이상이 걸린 것 같다. 그리고 이 리뷰를 썼으니 40여 시간을 이 책과 보낸 셈이다.
2주 동안 이 책 읽는 데 정성을 쏟았다. 후련하다! ㅎㅎ
우스개 같은 소리지만 나는 오래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책을 읽을 때도, 돈을 벌거나 돈을 버린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좋은 책을 읽으면 버는 것이고 쓸모없는 책을 읽으면 버리는 것이다. 그럼 이 책은? 물론 벌었다! 얼마를 벌었을까? 40시간을 로펌 변호사의 비용으로 계산하면, 시간당 50만원(나는 시니어 변호사일 테니 이 정도는 받아야 함)*40시간=2천만 원. 만일 어느 고객이 이 책을 읽고 리뷰라는 의견서를 써달라고 하면 내가 청구할 수 있는 금액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2천만 원을 벌었다! ㅎㅎ
나는 왜 이 책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읽었을까? 두어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해밀턴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꽤 알고 있었지만 유독 이 사람만은 예외였다. 미국 건국 과정의 키 맨이라는 해밀턴을 모르다니... 다른 하나는 책의 볼륨 때문이었다. 통상의 전기보다 2-3배 분량의 책이라고 사람들이 기겁을 하니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아 책을 그리 두껍게 썼다는 말인가?
나는 가끔 두꺼운 책, 베개만한 책을 읽어 보았다. 그런 책은 읽을 때는 정말 고통스럽다. 일반적인 책이라면 3-4일 혹은 길어도 일주일 이내에 한 권을 읽어야 정상인데 1천 쪽이 넘어가면 대개는 중도에서 포기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읽는다? 무엇인가 단단한 결심이 서질 않으면 안 된다. 내 기억 속에 그런 책이 지난 7-8년 사이에서 몇 권이 있었다. 그 중 생각나는 게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 1권(남경태 역, 1240쪽)과 2권(이광일 역, 1328쪽). 한마디로 두 권은 모두 인류 지성사를 기술한 것으로 내게 엄청난 지적 자극을 준 책이었다. 나는 이 두 권을 방학 기간을 이용해 연속해서 읽었다. 총 2,500쪽이 넘는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읽는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인내를 요구했지만 끈기와 오기로 버텨내 마침내 완독했다. 이제 <알렉산더 해밀턴>도 내 독서 역사에서 그에 버금가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게 독서의 혹독함을 안겨 주었던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1, 2 권.
자, 이제부터 해밀턴이 어떤 인물인지 말해보자. 다른 북 리뷰보단 길 테니 읽는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해밀턴은 누구인가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는 일반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중 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재무장관, 연방파의 정치인, 상비군의 장군, 뉴욕의 유명 변호사 등등이 그가 생전에 세인들로부터 들었던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해밀턴을 상투적 방식으로 무미건조하게 소개하지 않는다.
론 처노에 의하면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일등공신이다. 우리로선 잘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 중에서 최고를 꼽는다면 당연히 조지 워싱턴(1대 대통령), 존 애덤스(2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4대 대통령) 정도를 말하지 어찌 일개 재무장관이었던 해밀턴을 꼽겠는가?
그럼 저자가 해밀턴의 역사적 진가를 총평하는 부분을 읽어보자.
”그는 사상가임과 동시에 행동가였고 재기 넘치는 이론가임과 동시에 수완 좋은 집행자였다. 그는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제헌의회를 소집했던 주요 인물로 손꼽히며 자신이 직접 감독한 고전적인 헌법해설문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 시리즈의 주요 저자이기도 하다. 갓 탄생한 미 정부의 초대 재무장관이자 주요 설계사로서 해밀턴은 헌법적 원칙들을 받들었고 이를 광범위한 생활에 녹여 넣으며 추상적인 관념들을 제도적인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실용적인 태도로 포괄적인 프로그램들을 여럿 계획했다. 예산제도, 장기채, 조세 제도, 중앙은행, 세관체제, 연안경비대를 포함하여 근대 국민국가라는 조직을 용케도 부드럽게 운영하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식 해설서들을 통해 그것을 정당화했던 ...제퍼슨이 미국 정치담론의 정수가 될 만한 시를 썼다면, 해밀턴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경영에 대한 산문을 쓴 인물이다.“(19)
”만일 워싱턴을 국가의 아버지라고, 또 매디슨을 헌법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알렉산더 해밀턴은 확실히 미국 정부의 아버지였다.“(882)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정치인으로서 조선조를 개국하고 그 기틀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삼봉 정도전? 아니 그 보다 미국 역사에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정치인이었다고.
미국 연방 의회 로툰다에 있는 해밀턴 상
탄생의 비밀과 평생의 콤플렉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우리가 아는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 초기의 대통령들, 독립 전후 만들어진 대륙회의의 각주 대표자와 독립선언서와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영국 식민지 당시 대부분 지체 높은 집안의 유력자들이었다. 한 세기 전에 미 동부에 상륙한 필그림 파더들의 후예들이거나 남부에서 수백 명의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해밀턴은 이들과는 완전히 배경을 달리한다. 그는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 중 하나인) 네비스 섬에서 1755년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위그노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들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을 못하는 바람에, 그는 사생아 취급을 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해밀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뉴잉글랜드의 마을에서 자라났거나 버지니아의 사유지에서 애지중지 길러진 데 반해 해밀턴은 화려한 자연미를 배경으로 방탕한 백인들과 성질 사나운 노예들이 한데 뒤섞인 열대의 지옥 구덩이에서 자라났다.“(26)
그가 십대 후반에 카리브 해의 세인트크로이라는 섬을 벗어나 미국으로 온 것은 일생일대의 대 모험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미국에 와서 미국 사회의 주류에 진입한다는 것은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신분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서 경쟁자들은 항상 그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가 건국의 아버지로서 손색없는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존 애덤스 같은 이들은 그를 외국인이라고 경멸적으로 조소했다. 해밀턴으로선 죽을 때까지 억울한 콤플렉스였다.
”스스로 아메리카를 찾아온 많은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해밀턴 또한 자신의 과거를 완전하고 확실하게 부인했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 다시금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아주 조금이라도 드러낸 적이 전혀 없으며, 그의 성장기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주제로 남았다.“(1065)
해밀턴의 모교 킹스칼리지(현 콜롬비아 대학) 해밀턴 홀 밖에 있는 해밀턴 동상
천재 그리고 그것을 넘는 노력
카리브해에서 온 이민자 소년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세가 되는 해에 뉴욕의 킹스칼리지(현 콜롬비아 대학)에 들어간다. 이곳은 당시 친영파의 본거지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영국의 정치제도나 정치 이념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그가 건국의 아버지 중에서도 친영파로 분류되어 영국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된다.
”해밀턴은 당대 식민지에서 가장 열렬한 토리파이자 킹스칼리지 총장이었던 마일스 쿠퍼 박사 밑에서 수학했다. 킹스칼리지에 입학하면서 해밀턴은 강경한 토리파 지지자들이 사는 도시이자 영국 식민권의 수호지인 뉴욕에 살게 되었다. 뉴욕에 산다는 것은 엄청난 혁명적 요소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방법임과 동시에 식민지에서 가장 뛰어난 달변가들 및 노골적인 신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독립주의자와 친영주의자 양측 모두의 견해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104)
해밀턴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천재적 지적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그는 말과 글을 자유재로 다룰 줄 알았다. 말은 막힘이 없었으며 글은 깊이 있고 유려한 문장을 대단히 빨리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천재적 재질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과 노력이 천재적 재질에 더해진 것이다. 그것은 학생시절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평생 죽기 직전까지 그는 책을 가까이 했으며 거기에서 큰 통찰력을 얻어냈다.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변호사로서 쉴 틈이 없었지만(그는 제퍼슨이나 다른 유명 정치인들처럼 평생 영국이나 프랑스를 가보지 못했다.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주에도 가보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배우고 익혔다.
”해밀턴이 대학시절에 쓴 사설들을 보면, 그는 도서관을 뒤져가며 존 로크, 샤를 루이 몽테시키왜, 토머스 홉스, 데이비드 흄 등의 책들은 물론 윌리엄 블랙스톤, 휘호 그로티우스,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 등 법학자들의 글까지도 찾아 읽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바텔에 푹 빠져 있었던 그는 바텔을 가리켜 ’국제법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정평된 저자‘라고 칭송했다. ... 킹스칼리지 시절 이후 그는 고전을 줄줄이 인용할 만큼 상당한 박식가임을 자랑했을 뿐 아니라 훗날 건국의 아버지들이 엄청난 지적 능력을 한데 모아 활용할 때에도 한몫을 거들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를 상세히 꿰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미국 공화 정부의 앞날을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 해밀턴은 허드슨 강의 강둑을 산책하면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읊조리거나, 혹은 바투가의 나무 그늘 아래를 따라 걸었다. ... 해밀턴은 학생들끼리 골탕을 먹이거나 장난을 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110)
”해밀턴은 스스로 발전하는 독학자의 표본이었고, 자투리 시간을 모아 자기 자신을 개선하는 데 모조리 사용했다. 18세기 당시에는 모든 분야에 대한 지식을 두루두루 잘 알고 있는 팔방미인이 가장 품위 있는 인간상으로 받들어졌는데 해밀턴 역시 이를 갈망했다. ... 그는 베이컨, 홉스, 몽테뉴, 키케로 등을 포함한 다양한 철학서들을 물론 그리스, 프로이센, 프랑스의 역사들까지도 숙독했다.“(216)
”해밀턴은 말할수록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그는 보스턴 차 사건을 옹호했고, 보스턴의 폐쇄를 개탄했으며, 불공정한 과세에 대항하는 식민지 통합을 지지했고, 뒤로 갈수록 점점 솔직해져서 결국에는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 해밀턴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왔고, 마침내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성공적으로 포착했다. 서인도제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이때도, 또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의 말이 가진 힘과 열정을 통해 주목받았다.“(116-117)
위대한 법률가이자 당대 최고의 정치사상가
해밀턴은 미국 건국 초기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법률가였다. 그는 원하기만 하면 당시 대법원장을 했을 것이며 또 원하기만 하면 변호사로서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대는 해밀턴의 그 능력을 어느 한 곳으로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출중한 변호사였는지 관련 부분을 직접 보자.
”해밀턴은 초기 공화국의 최고 변호사들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특히 뉴욕 내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냈다. 법정에서 위대한 법조계 인사들과 수도 없이 마주했던 앰브로즈 스펜서 판사 또한 해밀턴을 가리켜 ’이 나라가 낳은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논리력에 있어 해밀턴은 대니얼 웹스터와 견줄 만하고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다. 창의력에 있어서 그는 웹스터보다 무한히 앞서 있다‘ 훗날 대법원 판사가 되는 조지프 스토리 또한 이에 버금가는 찬사를 보냈다. 존 마샬 그리고 로버트 R 리빙스턴 챈슬러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들은 해밀턴의 생각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먼 곳까지 미친다고 여겼으며 해밀턴의 옆에 있으면 자신들 또한 어린 학생이나 다름없고, 정오의 태양 앞에 선 촛불과도 같다고 했다.“(359)
”해밀턴은 글뿐 아니라 말에서도 종종 과도한 지경에 이르곤 했다. 아마 뉴욕 법정에서 가장 폐활량 좋은 사람이었을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도 몇 시간이고 완벽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360)
해밀턴이 주도한 <연방주의자 논설집>
해밀턴은 당대 최고의 정치 사상가이기도 했다. 연방주의 정치철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연방주의자 논설집>은 사실상 그와 매디슨이 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85편 중 그가 쓴 게 51편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이 논설을 쓸 때 그는 거의 초치기로 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단 두 달 만에 21편의 논설을 줄줄이 써내는가하면, 어떨 때는 한 주에만 5편의 논설을 게재했다. 조세에 관해 논할 때는 한 주 동안 무려 6편이나 써낸 적도 있다. 해밀턴의 머리는 언제나 기이할 만큼 재빨리 돌아갔다. 평생 그는 충격적일 만큼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분량은 단 한 사람이 채 50여 년도 되지 않은 생애 동안 남긴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 이 부분을 보자.
“...그는 달성해야 할 진지한 목표가 있을 때면 그것을 미리 고안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난 다음 그는 밤이 찾아오는 시간과 관계없이 잠을 청했고, 예닐곱 시간을 자고 일어나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테이블 앞에 앉아 여섯, 일곱, 여덟 시간을 그 자리에서 보냈다. 빠르게 써 내려간 그의 글은 교정도 거의 필요 없이 바로 출판할 수 있을 정도였다.”(467)
조지 워싱턴(1732-1799)
조지 워싱턴 없는 해밀턴, 해밀턴 없는 조지 워싱턴
론 처노는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 해밀턴을 추적하지만 그 결과로 명백해진 것은 그와 조지 워싱턴 간의 뗄 수 없는 인간관계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중 대륙 최고사령관으로 영국군과 전투를 치른다. 해밀턴은 이 전쟁 중 워싱턴의 부관으로 일한다. 그런데 그냥 부관이 아니다. 그의 역할은 워싱턴의 비서실장이었으며 사실상 참모장의 역할을 했다. 20대 새파란 청년이 자기보다 23세나 많은 중년의 최고사령관을 철저하게 보좌하면서 최고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사실 워싱턴은 해밀턴과는 성격이나 배경이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지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사업수완도 좋고 기민하게 돈을 투자해 누가 봐도 내놓으라 하는 부호가 되었다. 독립혁명 전에 그는 이미 100명의 노예를 소유했고 혁신적인 농업으로 1000만평이나 되는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15년 동안 버지니아 하원의원을 지냈고 1, 2차 대륙회의에 모두 참여한 명망가였다. 더군다나 그는 독립혁명 내내 자신이 받게 될 급료를 모두 거절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해밀턴을 애지중지했고, 해밀턴도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워싱턴이 최고사령관으로서,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 직무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옆에 해밀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밀턴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사령관이자 대통령인 워싱턴이 그를 발탁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과 해밀턴 간의 관계는 초기 미국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제퍼슨과 매디슨 간의 끈끈한 동료애만이 이에 견줄 수 있을 뿐이다-그들의 커리어는 각기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이 두 남자는 상호 보완적인 재능과 가치, 의견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22년 동안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특출한 판단력, 훌륭한 성격,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워싱턴은 그것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다루기 힘든 후배를 이끌었다.... 반대로 해밀턴은 철학적 깊이, 행정적 전문성, 정책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 점에서는 워싱턴 수하의 어느 누구든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대강의 생각들을 상세한 계획으로 바꿀 수 있었고, 혁명의 꿈을 오래도록 지속되는 현실들로 만들 줄 알았다 이 두 사람의 조합은 그야말로 견줄 데가 없었으며, 각각 따로 있을 때보다 함께일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었다.”(174-175)
“해밀턴은 기질 상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 힘든 이였고, 이는 심지어 상관인 조지 워싱턴이라는 어마어마한 존재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그는 워싱턴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위대한 지도자이자 초기 아메리카의 역사를 써나가는 데 있어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176)
“워싱턴은 글 잘 쓰는 사람이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었고, 부관들 중 해밀턴만큼 펜과 친한 사람은 없었다. ... 해밀턴은 워싱턴의 마음속에 자신을 투영할 줄 알았고, 장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알아챘으며 그것을 본능적인 요령과 능수능란한 외교적 기술들로 써냈다. 워싱턴이 일반적인 귀띔 몇 가지를 주면 해밀턴은 기록적인 시간 내에 그것을 편지로 써내는 식이었으니 그야말로 복화술이 따로 없었다.”(177-178)
토머스 제퍼슨(1743-1826)
존 애덤스(1735-1826)
정치적 라이벌 제퍼슨과 애덤스
워싱턴 사후 미국 정가에서 해밀턴의 경쟁자로 가장 선두에 섰던 인물로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한 사람은 워싱턴 행정부에서 함께 장관(국무장관)을 했던 공화파의 토머스 제퍼슨, 또 한 사람은 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였다. 세 사람의 정치적 대결은 당대 정당 출현으로 나타난다. 먼저 해밀턴은 연방당의 영수로, 제퍼슨은 그것을 정면으로 반격하는 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현재의 공화당이 아님)의 영수로 나누어 져 피 튀기는 경쟁을 한다. 나아가 해밀턴은 같은 당의 애덤스와도 정치적으로 갈라짐으로써 애덤스의 대통령 재선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반대당인 제퍼슨을 도와 그를 3대 대통령으로 만든다. 이 책에서 이들 간의 관계를 볼 수 있는 몇 부분을 보자. 대충 그들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해밀턴의 걸출한 재능을 단 한 번도 과소평가한 적이 없었다. 연방주의자를 읽은 제퍼슨은 그것이 정부의 원칙들에 대한 사상 가장 훌륭한 해설이라고 선언했다. ... 제퍼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해밀턴은 예민한 이해력을 가진 실로 훌륭한 인물로, 객관적으로 정직하며 모든 사적 관계에서 명예를 지켰고,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냈으며 사생활에서의 미덕을 가치 있게 여길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식 선례에 너무나 홀려 있고 도착되어 있어서, 부패가 한 국가의 정부에 있어서는 본질적이라는 완전한 신념에 사로잡힌 듯했다.”(590-591)
“무엇보다 제퍼슨은 연방이 침해하지 못하는 주의 권리를 지켜내고자 했다.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입법부가 다소 약해진다 해도, 행정부처를 공고히 하며, 주들을 종속시키고자 했던 해밀턴의 의제들에는 제퍼슨이 혐오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591)
“흠잡을 데 없는 매너의 신사였던 제퍼슨은 반대하기를 꺼렸다. 논쟁을 즐겼던 불나방 해밀턴과 달리 제퍼슨은 논란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데도 해밀턴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상황에 알맞은 단어들을 골랐으며 청중들의 편견에 말을 맞춰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줌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비밀리에 부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도록 독려했다. 반면 독선적으로 거의 무모할 만큼 솔직했던 해밀턴은 그러한 종류의 용의주도함은 절대 갖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퍼슨은 불가해한 침묵이 가지는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제퍼슨과 함께 대륙회의 몸담았던 존 애덤스는 그가 한 번에 세 문장 이상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 자신의 혀나 펜, 그리고 자기노출적인 습관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했던 해밀턴은 스스로를 철두철미하게 제어했던 제퍼슨 앞에서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592-593)
“존 애덤스에게는 수많은 형용사들이 따라붙을 수가 있고-그는 짜증을 잘 내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정다우며, 신경질적이고, 솔직하고, 박식하며, 직설적이고, 너그럽고, 별난 구석이 있으며, 가만히 쉬지 못하고, 쩨쩨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며, 철학적이고, 당돌하고, 변덕스러우며, 호전적이고, 공상적이고, 완고하며, 엉뚱했다-하려고만 들면 끝없이 이어갈 수도 있다.”(952)
해밀턴은 이런 정객들과 상대하면서 5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제퍼슨과 애덤스는 해밀턴 사후 20년을 더 살면서 해밀턴을 저격했고 기나긴 편지 글과 기타 집필 활동으로 자신들의 업적에 광을 내는 기회도 마음껏 누렸다. 그것이 해밀턴 사후 그가 미국 역사에서 저평가를 받은 이유일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니 말이다.
10달러 지폐의 주인공 해밀턴
왜 해밀턴은 대통령이 못 되었는가
워싱턴 사후 해밀턴 주변의 경쟁자들은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 제퍼슨, 매디슨, 먼로.... 그러나 해밀턴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왜일까? 사가들도 그에 대해 답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론 처노가 분석하는 답은 한마디로 그는 똑똑했지만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중의 심리를 이용할 줄 모르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논쟁적이고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논쟁은 격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자기 추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적들은 그를 허영과 자만에 차서 거들먹거리는 사람으로 여겼다.... 해밀턴은 위대한 행정가의 마인드를 타고 났으며 능숙한 정책입안자이긴 했지만, 절대로 성숙한 정치인으로서의 부드러운 자제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가 품고 있던 리더십은 고귀하지만 제한적인 것이었다. 진정한 정치인이라는 필요한 경우라면 국민들의 소망에 저항하기도 하고 희망찬 생각들을 품고 안주하려는 그들을 뒤흔들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적 원칙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었던 해밀턴은 타협이나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제퍼슨은 일반 국민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해밀턴은 대중이 선호하는 바를 공감하는 일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932-933)
옥에 티, 섹스 스캔들 그럼에도 그를 사랑한 아내 엘리자
해밀턴은 서인도 출신으로 혈혈단신 미국에 와서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성공엔 처가의 영향도 적지 않다. 처가인 스카일러 가문은 뉴욕에서 첫째 둘째가는 명문가였다. 그는 그 가문의 규수인 엘리자베스 스카일러와 결혼해 다복한 가정을 이룬다. 25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8명의 자녀를 가졌고 후일 자식들은 대부분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런 가정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적 욕망은 평균인을 능가했다. 누구보다 도덕적 정치인이었지만 분출하는 욕망은 제어하기 힘들었다. 재무장관 시절 한 여인을 만나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상대방은 유부녀 마리아 레이놀즈라는 여인이다. 20대 초반의 이 매력적인 여인은 어느 날 해밀턴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를 돕는다고 돈을 준 게 계기가 되어 한 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 여인과 해밀턴의 관계를 낭만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해밀턴을 괴롭히며 돈을 뜯었으니 요즘 말로 하면 부부 공갈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널즈 사건은 해밀턴에게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슬픈 실수였다. 높은 직위의 공직자이면서 도덕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진 그였기에 실망도 컸다. 더군다나 당시 그의 아내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그 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정치적 위기 때마다 라이벌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충직했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해밀턴이 미국 역사에서 재평가를 받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역사적 저평가를 참을 수 없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50년을 더 살면서 남편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은다. 그리고 (넷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전기를 쓰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녀에겐 남편 해밀턴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정의‘였다. (참고로 이들 부부는 모두 맨하탄의 월스트리트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참고로 해밀턴 부부는 뉴욕의 맨하탄의 월스트리트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함께 묻혀 있다.
“1757년 8월 9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스카일러는 대부분의 알렉산더 해밀턴의 전기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건국의 어머니들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인물이었고 자신이 아닌 오롯이 남편에게만 모두가 주목할 수 있도록 애썼다. ... 그녀의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겉모습 뒤에는 충실하고 너그러운 성정과 넉넉한 연민, 강한 의지, 유머와 용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그마하고 예쁜 그녀는 자만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고, 해밀턴의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그의 격동적인 인생에 가정이라는 강력한 기반을 만들어주었다.”(251)
엘리자와 말년을 함께 보낸 딸 해밀턴 홀리는 어머니 사후 이런 말을 남겼다.
"슬픔에 잠긴 요즘, 축복받으신 우리 어머니께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모든 것들을 회고해보자면(중략) 내게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보다 더 자주, 진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달리 없다. 의무를 쫓는다는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단 하나의 열망 속에서 어머니의 인자한 표정과 지치지 않는 정신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내 안에서도 같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중략), '나의 해밀턴, 그를 기억하는 일에도 정의가 찾아오리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리라는 명령과도 같이 느껴진다"(16-17)
해밀턴과 버의 결투(1804)
이해할 수 없는 죽음, 결투의 희생물이 되다
이제 이 책의 리뷰 마지막이다. 그의 죽음이다. 해밀턴은 49세의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세상과 영원히 하직한다. 결투! 1804년 7월 11일 당시 부통령인 에런 버와 뉴저지 허드슨 강변에서 결투를 벌이다 치명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한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에런 버와 해밀턴은 오래 동안 견원지간으로 지내왔다. 같은 뉴욕의 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또 정치인으로서도 둘은 각광을 받고 있었지만 한쪽은 연방주의자요 또 한쪽은 공화파였다. 둘은 서로 인간적으로 싫어했다. 버는 해밀턴과는 달리 ’웬만한 도덕적 기준을 갖춘 나라에 살고 있다면 친구들조차 부끄러워하며 완전한 망각 속에 묻고 싶을 만큼 방탕한 삶을 산 인물'(1316)이다. 그런 둘이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살았겠지만 그들은 숙명적으로 정치인이자 군인 그리고 변호사로 같은 길을 걸었다. 해밀턴은 1801년 대선에서 제퍼슨을 지지함으로써 버의 대통령 당선을 방해했고 그 이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도 그를 가로막음으로써 버의 정치인생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았다. 해밀턴은 버에게 있어 저주이자 위선자였으며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다.
해밀턴은 에런 버로부터 1804년 7월 결투를 신청 받는다. 당시 그는 2년 전 결투로 큰 아들을 잃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코 이런 결투를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못해 이것을 수락했다. 명예 때문이었다. 이것은 18-19세기 서구의 엘리트 남자들의 명예의식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 뉴욕주 법은 결투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밀턴과 버는 허드슨 강을 건너서 결투가 허가된 지역인 뉴저지 주의 위호켄 외곽 바위절벽 아래로 이동한 뒤, 그 곳에서 결투를 벌였다. 결과는 애런 버가 승리, 패배한 해밀턴은 다음 날 사망했다.
명예 심리가 아무리 중요했다고 해도 그의 심리를 이해하긴 어렵다. 두 해 전에 아들이 결투로 죽었는데(큰 아들 필립은 해밀턴을 빼 닮아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 아버지가 그 명예 때문에 죽음의 결투를 받아들이다니... 저자는 이런 설명을 붙인다.
“군인들이 항상 두려워했던 것은 결투를 회피하면 겁쟁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나중에 군대를 지휘할 때에도 악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해밀턴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에서 내전, 무정부상태, 연방 탈퇴를 위한 반란 등 유혈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군대를 지휘해야 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버의 결투신청을 수락하거나 거절할 경우 자신의 용감함이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까지도 곰곰이 생각했다.”(1250)
뉴저지 위호켄에 있는 해밀턴 파크의 해밀턴 흉상, 이곳에서 해밀턴과 버는 결투를 벌였다. 허드슨 강 건너 맨하탄이 보인다.
뉴욕에 사는 한 페친(Hyunjung Choi)이 이 글을 읽고 역사의 현장에 달려가 사진을 찍어 페북에 올렸다. 허락을 받아 여기에 올린다.
과연 그랬을까? 해밀턴이 장군이란 정체성으로 언제 또 다시 자기가 군대를 지휘할지 모르니 결투신청을 회피했다는 불명예를 당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승낙의 원인이었다? 나로선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상 해밀턴이 이 결투로 죽는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 않은 것 같다. 각종 자료에 의하면 그는 첫발을 무조건 공포를 쏘려고 했고 상대도 만일 실수를 하면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협상에서 강하고 민첩하게 나가면 총격전 없이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드물지만 실제 결투가 벌어지더라도 보통은 서로 상대에게 부상만 입힐 목적으로 팔이나 다리를 쏘곤 했다. 만약 첫 번째 라운드 뒤에도 쌍방 모두가 살아 있다면 그들은 두 번째 라운드 전에 결투를 중단하고 협상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요점은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되 결투에는 응함으로써 용기를 증명하는 것이었다.”(1251)
리뷰를 마치며
이렇게 해서 나는 이 베개만한 책을 읽고 저자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1400쪽이 넘는 방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부분만을 말한 것이니 독자들이 이 리뷰를 읽고 책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정도라도 이 책의 핵심을 정리해 놓았으니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해밀턴이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1400쪽이나 되는 분량을 책 한 권에 담는 것은 무모한 편집이다. 아마 출판사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짐작컨대 3-4권의 책으로 이 전기를 냈다면 책 판매는 더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권만 읽고 2권부터는 팔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그러니 모 아니면 도다. 첫 권을 읽을 사람이라면 혹시 이렇게 무식하게 편집해 만든 책(6만원)이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출판전략이 성공하길 바란다. 번역자도, 출판사도 살아남아야 이런 책을 앞으로도 우리가 읽을 수 있으니까. 출판문화를 발전시켜 우리 사회가 좀 더 지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선 독자들의 몫이 분명 있다. 부디 이 한 권을 사시라. 책을 다 읽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서가에 꽂아 두고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것을 꺼내 읽어보자. 그러다가 졸리면 베개로 사용하자. 불면의 밤이 숙면의 밤이 될지 모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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