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6)-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박찬운 교수 2024. 1. 31. 06:37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6)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현재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영웅은 축구선수 메시다. 이곳 대통령은 누군지 몰라도 메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14년 1월 5 우수아이아를 뒤로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시간 3시간 반. 육로로 가면 3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오는 도중 하늘에서 보니 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정오 무렵 비행기 착륙등이 켜져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황토색 물감을 탄 듯 뿌연 거대한 물줄기가 바다로 들어간다. 라 플라타강이다. 드디어 생전 처음 상 파울로와 더불어 남미 최대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보는 라 플라타 강. 강의 상류 오른쪽 육지 부분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사진 위키피디아)
착륙하기 직전에 찍은 라 플라타 강

 
착륙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본 것이 팜파스라 플라타강이다. 이 둘이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리적 팩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두 가지를 간단하게라도 말하는 게 좋겠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사실을 머리에 담아두고 아르헨티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라 플라타강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라 플라타(La Plata. 이라는 뜻임, 따라서 Rio de la Plata은의 강이라는 뜻임)는 과연 강인가. 라 플라타는 우루가이강 파라나강합쳐져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큰 물줄기다. 그 길이290여 킬로미터, 대서양 쪽 입구는 폭이 무려 220여 킬로미터나 된다. 언뜻 보면 길이가 짧은 강같이 보이기는 하나 강으로서는 그 폭이 너무 넓고, 어찌 보면 (bay) 같이 보이긴 하지만 민물이 뒤섞여 있으니 바닷물이 들어와서 만드는 일반적인 만은 아니다.

이 라 플라타만의 면적이 자그만치 경기도 3개를 합친 크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데비데오(우루과이의 수도)는 모두 이 라 플라타의 연안에 있는 도시이고, 두 강에서 밀려온 퇴적물로 강 주변은 거대한 삼각주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라 플라타의 유역면적(라 플라타로 들어오는 강을 포함한 유역)이 300만 평방 킬로미터가 넘는다는 사실. 한반도의 15배 규모다.  

이것은 아마존 이남 대부분의 땅들이 라 플라타의 수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라 플라타는 아르헨티나의 젖줄이나 마찬가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을 이륙하면 바로 이런 땅들이 나타나고 이런 땅은 안데스 산맥까지 계속된다.

 
다음으로 팜파스. 이것도 라 플라타와 관계있는 데, 팜파스는 라 플라타 유역의 비옥한 농토지역을 말한다. 그 크기가 대략 120만 평방 킬로미터. 한 반도의 6에 가깝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안데스 방향으로 몇 시간을 가도 지표면엔 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완전 평지, 초록색 목초지만 보이는데 이것이 팜파스다. 바로 여기가 아르헨티나 농업과 축산업의 중심으로서 아르헨티나 인구 4천 만의 몇 배나 되는 수의 소와 양이 방목되고, 을 비롯한 여러 곡물이 재배되는 곳이다.

아르헨티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연환경을 알아야 한다. 아르헨티나는 세계를 위한 목장이자 곡창이다. 

인구 천만이 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해도 이틀 동안 도대체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몇 군데 가보지도 못하고 다리만 아플 뿐이다. 
 

플로랄리스 헤네리카. 레콜레타 바리오의 유엔 광장에 있는 금속 조각작품. 전기장치로 꽃잎이 열리고 닫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최근 폭풍으로 고장이 나 있었다.

 

이럴 때 내가 도시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해왔지만 자연 기행은 별로 하지 않고 주로 문명기행과 도시여행을 해 왔다. 도시여행의 핵심스토리 텔링이다. 도시의 건물과 도로를 보면서 그것을 일군 그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시여행이다.

역사적 건물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여행자는 그것을 들으면서 그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한다. 때로는 그 이야기에서 인간의 위대함에 감동하면서 우리 문제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 그렇다면 이런 도시여행은 어떻게 가능할까.
 

부에노스 아이레스 법대. 아르헨티나를 이끈 정치인들 중엔 이곳 출신이 많다.

 
짧은 시간이라도 이런 여행을 하기 위해선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그 여행의 사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를 아는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무엇을 보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눈으로 볼 뿐이다.

단순히 보는 것(to see)보이는 것(to catch)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무릇 여행에서 감동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이 현장에서 작동할 때이다. 아, 저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할 때 즐거움이 있고 감동이 오는 법이다. 도시 여행은 특별히 그렇다. 도시 여행은 준비한 만큼 즐겁고 감동을 받는다. 
 

5월 광장(Plaza de Mayo)

 
이곳에 오기 전에 틈나는 대로 아르헨티나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공부를 했다. 여행기도 읽었고 때론 남미 현대사에 대한 학술서적도 읽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여행의 핵심이다. 1000만 명이 넘는 남미 거대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보면서 나는 머릿속에서 무엇을 꺼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컸다.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이틀은 가급적 자유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사가 추천한 가이드 투어가 있었지만 그것도 반일만 참여하기로 내심 결정했다. 그룹투어를 하면서 이렇게 행동하긴 쉽지 않은 일이나 인솔자도 나를 말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그룹투어는 그런 개인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모집한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인솔자 입장에선 혹시나 손님 중 누가 혼자 다니다가 사고라도 만나면 큰 일이라고 생각할 터이니, 안전 문제를 누차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나도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솔자에게 절대로 사람 없는데 안 다니고, 절대로 핸드폰 잃거나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핑크색 건물이 대통령궁 Casa Rosada이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나자 나는 총알같이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일행 중 나의 도보여행에 동참하겠다는 분이 있어 나도 마음이 좀 놓였다. 우선 갈 곳은 5월 광장(Plaza de Mayo)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니 아르헨티나 역사의 출발점이다.
 

Casa Rosada 앞에 마뉴엘 벨그라노 장군 동상이 있다. 동상 주변에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 놓은 돌들이 많이 보인다.

 
이 광장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1811년 5월 혁명을 기리는 곳이다. 과거 이곳에 있었던 아르마스 광장과 마요르 광장을 통합해 1884년 5월 광장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오늘날까지 이곳은 역사적 분수령이 되는 사건일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현대사에서 내가 잊힐 수 없는 것이 더러운 전쟁(dirty war) 인데, 당시 피해자 가족의 시위가 유명하다. 1974년부터 1983 사이 아르헨티나는 군사 구데타에 이은 군부정권 하에서 극심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약 3만 여 명의 사람들이 비밀경찰 등에 의해 잡혀가 고문 받고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가족들 특히 피해자들의 어머니들은 이 광장에 매일 같이 나와 시위를 하면서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5월 어머니회의 활동은 한국에서도 알려져 199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요구가 한참 활발할 때 이들 어머니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도 그들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기에 그 투쟁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
대성당 안에 있는 아르헨티나와 남미 독립의 영웅 산 마르틴의 묘실

 
광장은 관광객으로 넘쳐 났다. 이곳 광장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이 된 후 지금과 같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시절의 분위기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남미의 큰 도시 어딜 가도 있는 아르마스 광장은 일단 대성당이 중심에 있고 대통령 궁 등이 옆에 포진해 있는데, 이곳은 대성당은 광장 한켠에 조용히 자리잡고 오히려 독립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핑크 빛의 대통령 궁(Casa Rosada)이 광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 궁 앞에 있는 독립전쟁의 영웅 마뉴엘 벨그라노의 동상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쓴 돌(?)을 놓아 두었는데, 이채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성당 내의 고난의 예수님 발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대성당에 들어가 보니 이곳에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전 남미의 최고 독립영웅 산 마르틴이 잠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곳 출신으로 독립전쟁 시절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남미를 종횡무진 진격하여 남미 해방을 주도했다.

북쪽은 시몬 볼리바르, 남쪽은 산 마르틴, 이 두 사람이 남미 역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인물인데, 그 중 한 사람의 무덤을 직접 친견하다니!  그의 묘당에는 남미 각국에서 보내온 존경과 애도의 표시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물 카페 토로토니, 그 앞에 긴줄이 서 있다. 나는 차 한잔 마시는 것은 포기하고 잠간 들어가 내부 분위기만 보고 나왔다. 파리의 카페를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꿩대신 닭이라 할까, 토르토니에 못 들어간 대신 그 옆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주스를 마셨다. 주스 1인분은 둘이서도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분량이었다.

 
5월 광장을 본 다음 발걸음은 광장에서 가까운 마요거리(Avenida de Mayo)로 발길을 옮겼다. 누구 말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심 거리는 유럽의 귀티가 나는 거리를 옮겨다 놓은 듯 하다. 블록 단위의 도심은 이곳을 파리라고 말해도 될 듯 싶다.

1858년 개업했다고 하는 프랑스식 카페 토르토니는 외양과 내부 분위기가 완전 파리의 오래된 카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유명세에 걸맞게 카페 밖에서 수십 미터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차 마시는 것은 포기했다. 
 

 
그 거리에서 만난 또 다른 건축물은 바를로 궁전(Palacio Barolo). 외양이 아주 기이한 데 한 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한 때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단테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천국(15층-22층), 연옥((1층-14층), 지옥(지하-1층)을 한 건물에서 재현했다는 건물이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이 건물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2023년 100주년이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마요 거리를 걸으면서 어떻게 이런 건물들이 이곳에 만들어졌을까 잠시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는 식민지 초기엔 후미진 곳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의 중심은 옛날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주변, 소위 리오 데 라 플라타인데, 이곳은 멕시코나 페루와 달리 인디오들이 한곳에 정착해 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팜파스)이 무한대에 가깝게 있었지만 그것을 경작할 능력이 없었다.

18세기 후반까지 페루 부왕령에 속해 있으면서 면화와 쌀, 밀, 가죽제품을 북쪽으로 보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밀수항으로 재미를 보는 것이 경제의 중심이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리오 라플라타가 부왕령이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유럽으로 보내는 수출기지가 되자 남미 스페인 식민지의 중심권이 리마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넘어 왔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이후 몇 번에 걸쳐 정치적 위기를 겪지만 19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산업화에 들어가고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거듭한다. 그 결과 20세기 초반에는 세계 10대 부국의 위치까지 올라간다.

지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그 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바를로 궁전도 그 하나인 것이다.
 

마요거리. 파리의 중심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나는 이것이 현대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백인계 인종 비율이 다른 남미국가와 달리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전 인구의 90% 이상이 유럽계 백인종이다. 원주민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왜 이런 인종 비율이 되었을까? 그것은 식민지 초기부터 리오 라 플라타 지역은 비옥한 토지는 끝없이 펼쳐지는데 이것을 경작할 사람은 없었다. 이 문제에 답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페인계 백인들이 자신들의 식솔과 하인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땅을 경작하는 것이었고, 그것으론 일손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자 노예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
는 아르헨티나가 본격적으로 산업사회가 될 때 이민정책으로 대규모의 외국인들을 유입시켰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략 600만명이 넘는 유럽인들이 들어왔다. 유럽 각지에서 많이 들어 왔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들어 온 그룹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출신이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 나치 잔당들의 유입이다. 당시 대통령이 된 페론은 나치들의 보호처로 자신의 나라를 제공했다. 전범 재판을 피해 나치의 주요인물들이 대거 아르헨티나로 잠입했는데, 그중에는 유태인의 도살자 아이히만도 있었다. 후일 모사드에 의해 그는 예루살렘으로 잡혀가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이것 때문에 이스라엘과 아르헨티나의 외교관계가 위태롭기도 했음) 아르헨티나의 무분별한 이민정책이 준 불행한 결과였다.
 

시내 중심가의 평범한 뒷골목이다. 유럽의 일반적인 골목 풍경과 다르지 않다.

 
여하튼 아르헨티나 이민사는 현대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어느 유럽보다 더 유럽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식으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식으로, 독일인들은 독일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바꾸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바꾸었다.

그렇게 때문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럽 건축양식은 한 가지로 설명하기 힘들다. 유럽식이긴 하지만 여러 갈래의 유럽양식이 섞여져 있다. 한 건축물도 하나의 양식만 고집한 게 아니고 다양한 유럽건축 양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공중에서 본  Avenida 9 de Julio(위키피디아)

 
바를로 궁전을 보고 국회의사당 쪽으로 나아가니 큰 길이 보였다. 일견 이 도로가 보통 도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도로명은 Avenida 9 de Julio. 7월 9일 도로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816년 7월 9일을 기념하는 도로다. 20차선에 노폭이 무려 100미터가 넘는다. 이것도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심도로였다고 한다.

이 도로가 완성된 것은 1960년대지만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이고 계획은 19세기 말이었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특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생활 수준은 유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막 자동차 시대가 개막된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이미 백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굴러다녔다. 이 도로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사당, 그 주변은 매우 자유스럽다. 그저 사람을 만나면 흥겹게 춤을 춘다. 말이 안 통해도 좋다. 몸짓으로 통한다.

 
국회의사당도 가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의사당의 돔과 앞의 화려한 조형물은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과 매우 흡사하다.

의사당 앞의 광장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조각품이 서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버전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 개가 있지만, 로댕 생전에 만든 오리지널 3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여기 '생각하는 사람'은 그 중 하나로 로댕의 사인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부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발걸음은 ‘7월 9일 도로‘ 상에 있는 테아트로 콜론 오페라 하우스로 이어졌다. 세계 10대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이고 음향으론 밀라노의 라 스칼라 다음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하우스인데, 건축 연대를 보니 1908이다.

그 이전엔 이곳에 다른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는데, 그것을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이다. 이것도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부의 증거다.
 

테아트로 콜론

 
20세기 아르헨티나의 부의 정점은 테아트로 콜론 근처 ’7월 9일 도로‘ 상의 공화국 광장에 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벨리스크(Obelisco de Buenos Aires)이다. 높이 71미터의 높은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1936년 완공된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벨리스크

 
다음 날 참여한 그룹투어에서도 몇 군데를 갔는데 기억에 남는 곳이 몇 군데 있다. 하나는 레콜레타. 레콜레타나는 유명인사가 묻힌 공동묘지다.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아르헨티나를 움직인 유명 정치인들이 다수 묻혀 있는데, 그 중에는 현대사의 신데릴라 에바 페론도 여기에 잠들어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에바 페론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모여든다, 마침 비가 와서 레콜레타의 분위기도 우중충했다. 어디선가 마돈나가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들리는 듯 했다.
 

레콜레타 정문

 

레콜레타 내에 있는 에바 페론의 무덤, 그녀는 두아르테 가문의 가족묘에 묻혔다

 
엘 아테네오(El Ateneo)도 가볼만한 곳이다. 과거 오페라 하우스를 대형서점으로 바꾸어 놓은 곳인데 혹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찾아보니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아름다운 서점이었다. 이것을 보니 엘 아테네오는 두번째로 소개되어 있다)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고 하는 찬사는 다분이 마켓팅의 흔적이 농후하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유명세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들고 계산대로 가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서점이 관광명소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꼭 매출이 세계적 수준일 것 같지는 않았다.
 

엘 아테네오 서점

 
사실 이번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에서 꼭 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결국 보는데 실패했다. 메르세데스 소사 기념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미 노래 중 하나가 아르헨티나의 민중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다. 그녀의 Gracias a la vida는 수업 시간에도 매 학기 학생들과 같이 듣는 노래다. 특히 그가 더러운 전쟁 중에 망명을 하고 군부독재가 끝나 고국으로 돌아온 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열창했던 Gracias a la vida는 감동에 감동을 준다.


백인의 세상인 아르헨티나아에서 원주민으로 살았던 소사, 그의 굵고 짙은 음색은 듣는 이의 혼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2009년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시신을 며칠 동안 국회의사당에 안치하고 조문을 했다.

나는 그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마침 사후에 그녀를 기념하는 재단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그 주소를 찾아 찾아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재단 건물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는 1월 7일 아침에도 다시 그 건물에 갔지만 문은 역시 닫혀 있었다. 벌써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녀를 잊었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메르세데스 소사 기념관이 있는 재단건물, 산텔모 시장 근처에 있다.

 
이번에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잠시 있는 동안 이 도시의 번성했던 과거의 흔적을 잠시 찾아 보았다. 수많은 볼 거리가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그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언젠가 이 도시를 다시 온다고 해도 극히 일부만 보게 될 것이지만 이 도시가 갖고 있는 그 매력은 라 플라타와 팜파스가 만드는 것만큼이나 크고 비옥하다.

분명한 것은 아르헨티나를 단순히 화려한 과거를 가진 국가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 나라가 지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분명 다시 일어서리라 믿는다.

라 플라타와 팜파스가 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1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