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검찰개혁

격변기의 지식인이 짊어지는 비애와 사회적 과제

박찬운 교수 2025. 7. 5. 08:02

격변기의 지식인이 짊어지는 비애와 사회적 과제


AI에게 내 모습을 그려 달라고 했더니 이런 그림이 나왔다.



(새벽에 일어나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가 왜 이 글을 썼는지는 특별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알만한 분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주말은 온전히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다음 주 뵙겠습니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에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과 태도를 검증받는다. 특히 사회 참여형 지식인의 고충은 더 깊고 고독하다. 그의 앎이란 필연적으로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의 분석과 제안은 언제나 정치적 해석의 그물에 걸린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오늘날 지식인은 중세의 마녀처럼 화형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대신, 그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TV 토론과 SNS의 여론재판이라는 화려한 공개광장에서—끊임없이 순수성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어떤 사안에 관해 지식인이 연구와 숙고 끝에 최선의 방안을 내놓더라도, 그것이 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곧바로 정략적 의도를 의심받는다. 당사자가 그 어떤 정치세력과도 무관하다고 항변해도, 의혹과 불신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성을 해명하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더 깊은 정치적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지식인의 말이 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분류되고 오염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더 나은 방안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의 판단은 편향과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불편부당하고 완전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순진한 신화를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발언이 동일하게 정략적이며 모든 논의가 허구라는 냉소로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어떤 이들은 시대의 요구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며, 편견보다는 이성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들을 알아보고 경청하는 것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가 성숙해가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사회적 논의의 수준을 높이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진정성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니라, 의견의 논리적 일관성과 근거의 충실함을 평가하는 집단적 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정치적 격변기에 지식인이 느끼는 비애는 곧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혁이 필요한 시기일수록 더 치열한 의혹과 더 가혹한 검증이 따르지만, 그것이 곧바로 모든 대안을 폄훼하는 면허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어떤 주장이 누군가의 이익과 일시적으로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그 주장 자체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데 머무른다면, 사회는 더 나은 길을 찾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이 격변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누가 말하는가에 앞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듣는 태도, 그것을 검증하되 함부로 매도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더 나은 방안을 더 넓은 합의로 만들어내려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지식인의 비애란 바로 이런 노력이 언제나 부족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비애를 곱씹으며 사유하고, 설득하고, 경청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전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력일 것이다. (2025. 7. 5.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