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소설

나의 영웅 나인국

박찬운 교수 2015. 9. 26. 19:15

소설 아닌 소설(1)


나의 영웅, 나인국 


[오늘 무척 더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선 연신 땀이 흘렀습니다. 이런 날씨에도 저는 긴 산책을 하면서 과거 일을 떠올렸습니다. 저녁 시간 조용히 앉아 자판을 두드립니다. 새로운 형식의 글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저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분명히 소설입니다.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아주 짧은 SNS용 소설입니다.] 



        내가 살던 추억의 거리, 사근동 거리



1. 

금요일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나는 H 대학 기숙사 뒤 S 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여름인지라 아직 사위는 훤하다. 자주 들리는 형제식당을 향하다가 길가 삼천리 약국을 지나쳤다. 

푹푹 찌는 기온 때문인지 활짝 열려진 약국 현관문으로 더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약국은 5-6평도 안 될 정도로 작다. 천정에는 선풍기 하나가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여기도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한 복판인데, 약국에 그 흔한 에어컨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 슬쩍 약국 안을 들여다보니 한 노인이 초점 없는 눈으로 밖을 내다보며 김밥 한 줄을 물고 있다. 약사 나인국, 당 70세. 나는 그를 안다. 



2. 
형제식당에 들러 비빔밥 하나를 시켰다. 평소 같으면 학생 손님이 붐빌 때인 데도 테이블은 텅 비어 있다. S 동은 서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70년대 마을이다. 청계천 변의 이 동네는 외지 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는 특이한 곳이다. 

동네에는 식당 몇 개와 최근에 생긴 커피 전문점 몇 개가 있지만 그 손님 대부분은 H 대 학생들이다. 이제 방학을 했으니 그 손님들마저 있을 턱이 없다. 

“아주머니, 삼천리 약국 나약사님, 왜 이 저녁에 김밥을 먹고 계신가요.” 
“교수님, 그것 모르시나요. 그 양반, 참 불쌍타. 노상 저렇게 저녁밥을 잡숴요. 저녁은 김밥 아니면 라면이래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궁상떠는 약사 선생님일 겁니다.” 
“아니 나약사님 사모님 안계신가요? 옛날에 보니 사모님 미인이시던데요.” 
“왜요? 그 양반, 마나님이야 계시지요. 가끔 약국에 나타납니다. 외제차 타고요. 약사님과는 완전히 딴판이에요. 화장하면 아직도 40대 젊은 여자 못지않아요. 골프도 잘 친대요.” 


3. 
1975년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 몇 년 전 우리 집은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 이곳 S 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주변 청계천에는 수천 가구 판자촌이 있었다. S 동은 그 심장부나 마찬가지였다. 

동네 사람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딱 두 집만 빼고. 삼천리약국을 경영하는 나인국과 대한약국을 경영하는 차인배, 바로 그 두 집이었다. 차인배는 S 대 약대 출신의 약사로 생김새부터 도도했다. 약값도 삼천리약국보다 항상 몇 십 원 비쌌다. 그 집 아이들은 남산의 L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초등학교는 당시 장안에서 돈깨나 있고, 힘 좀 쓰는 집안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이름이 있었다. 

나인국은 J 대 약대 출신이었는데, 원래부터 S 동 토백이었다. 어머니가 평화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면서 공부를 시켰는데, 그는 약대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이곳에 약국을 개설했다. 당시 두 약국이 이 동네에서 경쟁을 했지만 손님이 많은 곳은 항상 삼천리약국이었다. 언제 가도 거긴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털털하고 겸손한 나인국을 좋아했다. 

그 덕에 그는 젊은 나이에 돈을 벌었다. S 동 한 가운데에 2층 양옥을 지어서 아래층은 약국,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그러니 그 어머니가 얼마나 아들 자랑을 하고 다녔을까. 그녀는 동네방네 다니며 아들 자랑으로 날 샐 줄 몰랐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나인국은 결혼을 했다. 그 부인 또한 동네 아주머니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미인이었고, 남편은 돈도 잘 버니, 부러울 게 없었다. 

우리 집은 바로 삼천리약국 건너편 2층 무허가 옥탑방이었다. 방 한 칸에 6식구가 우글대며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365일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 희망아, 너도 나약사처럼 되어야 한다. 내 소원은 그 사람 엄마 같은 여자가 되는 거야. 알았냐?” 


4. 
2006년 나는 H 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20년이 넘었고, S 동을 떠난 지 30년만이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옛 생각을 더듬으며 S 동을 거닐었다. 내가 살 던 곳을 찾았다. 이 동네에서 열 번 이상 이사를 했기 때문에 살 던 곳을 다 기억할 수 없었지만 삼천리 약국 건너편 집만은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집은 옛집이 아니었다. 삼천리약국도, 대한약국도 보이지 않았다. 30년 세월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대한약국의 차인배는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나 강남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큰 아들은 S 대 의대를 나와 서울 유수의 종합병원 의사가 되었다. 둘째 아들은 명문 법대를 나와 국내 최대 로펌인 K 법률사무소의 변호사가 되었다. 더 이상 이 촌구석 같은 곳에서 있을 그가 아니었다. 40년간 이곳에서 약국을 하면서 돈도 꽤 모아 강남에 아파트 두 채를 마련했고 서울 인근에 땅도 샀다. 

나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약국이 있던 2층 양옥집을 처분했다. 하지만 그는 약국과 함께 S 동에 남았다. 5-6평도 안 되는 조그만 점포 하나를 얻어 거기로 약국을 옮긴 것이다. 왜 그가 가족이 사는 강남으로 약국을 옮기지 않았는지, 자식들 농사는 어떻게 지었는지, S 동에선 아는 사람이 없다. 이웃집 숟가락 젓가락 수도 안다는 형제식당의 아줌마도 그것은 모르는 눈치다. 


5. 
나인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꼭두새벽에 강남 집을 나와 전철을 두 번이나 바꿔 탄 다음 마을버스를 타고 이곳 약국으로 출근한다. 밤 11시까지 약국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약국을 지킨다. 의약분업 전까지는 그런대로 약국 수입이 괜찮았지만 분업 이후에는 수입이 격감했다. 병원이 없는 S 동에서 처방전을 가지고 오는 손님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동네 아줌마들이 간간이 들려 박카스 한두 병 달라는 게 고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휴일도 없이 약국을 연다. 

“나약사님은 뭐 하러 저 나이에 약국을 한답니까? 돈 많이 벌었을 텐데...” 
“돈요? 벌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모양이에요. 재산은 모두 그 부인과 자식들 명의래요. 저 양반은 돈만 벌고 그 관리는 모두 그 부인에게 맡긴 모양인데, 부인이 아파트며 땅이며 모두 자기와 애들 명의로 해 놓았대요.” 
“아 그래도 부인이나 애들이 나약사님의 공을 모를까요?” 
“돈이란 죽을 때까지 쥐고 있어야 대우받는 것 모르세요. 지금 저 양반도 후회하고 있을 거요. 평생 약사하면서 결국 마누라, 애들 머슴 노릇한 거지.” 


6. 
나인국. 그는 한 때 나의 영웅이었다. S 동의 갑부이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그를 본받으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내 등을 떠밀었다. 지난 40년 동안 내 머리 속에는 간간히 그가 도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그처럼 2층 양옥집에서 살 수 있을까? 언젠가 나도 그처럼 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을까?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이 늦은 여름 밤, 땀을 비적비적 흘리며, 김밥 한 줄을 입에 물고 초점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나의 영웅 나인국이다. 

'SNS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반의 계절에도 별은 빛난다  (4) 2015.11.02
눈카마스  (0) 2015.09.27
밤 하늘 빛나는 별이 되어  (2) 2015.09.27
야곱의 씨름  (3) 2015.09.26
디케의 눈물  (1) 201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