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소설

디케의 눈물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40

소설 아닌 소설(3)


디케의 눈물


대법원 중앙홀에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 우리의 여신은 어쩐 일인지 칼대신 법전을 들고 있고 감아야 할 눈은 뜨고 있다. 칼이 없으니 정의를 실천할 방법이 없고, 눈을 뜨고 있으니 공평하지도 않다. 


1.
3년 전 이맘 때였을 거다.


“변호사님, 아니 교수님, 저 강명식입니다. 오늘 소장 넣었습니다. 청구금액이 40억입니다.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기다립시오. 제가 교수님께 한 턱 낼 때가 곧 올 겁니다.”
“그래요? 근데 왜 이리 늦었습니까? 좀 빨리 하시지.”
“아, 그게 생각보다 꽤 걸리더군요. 변호사 선임하는 데 시간 좀 걸렸죠.”


전화통에서 들리는 그의 말소리는 예전과 달리 나이를 잊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변호사님, 제 나이가 올해 80입니다. 제겐 지금부터가 청춘입니다. 남들보다는 20년, 30년은 더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2. 
“강명식, 자백해, 네가 죽였지! 네가 그 애를 강간하고 목을 졸랐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했지, 네가 했지.”
“예, 제가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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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였지, 죽였다고 자백해, 그러면 선처해줄 테니.”
“제가 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죽이지 않았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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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죽였습니까”
“제가요?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경찰, 검찰에서의 자백은 모두 허위자백입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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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3.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일이다. 부산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을숙도의 어느 한적한 뚝 방에서 목 졸려 살해되었다. 부검해 본 결과 그 학생은 성폭행을 당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강명식이 잡혔다. 그는 당시 35세의 미술학원 교사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다. 그는 경찰수사에서 처음엔 부인했지만 수일간 자행된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자백하고 말았다. 그의 자백이 번복된 것은 검찰 수사 중이었다. 기소가 된 이후에도 공판 내내 부인했지만 부산지방법원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부산고등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대법원까지 상고했지만 결국 무기징역은 확정되고 말았다.


강명식은 감옥에서 30대와 40대를 보냈고 마침내 감형되어 20년 형기를 마치고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세상으로 나왔다. 그 사이 처는 온갖 고생으로 병을 얻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갓 40에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그 자식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4. 
“박변호사님, 이 사건 꼭 맡아주셔야 합니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무고함을 밝혀주십시오.”
“30년이 지난 사건입니다. 무슨 수로 진실을 밝힙니까? 재심을 신청해도 선생님의 사건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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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피하려고 했지만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사건을 맡은 지 10년이란 세월이 부지불식간에 흘렀다. 나와 강명식은, 나이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연대감으로 뭉쳤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진실을 향한 몸부림에 세상의 반응은 느렸지만 결국 결실을 맺고 말았다. 그 과정을 다 설명하려면 3박4일도 부족할지 모른다. 강명식이 유죄를 선고 받은 지 꼭 40년 만의 일이었다.


2010년 2월 초 서울 서초동 대법원 형사법정

“피고인은 무죄!”


5. 
“변호사님, 이것 좀 가져 왔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사슴피입니다. 어제 밤에 사슴뿔을 자른 다음 피를 받은 겁니다. 냉장해서 오늘 아침 첫 새벽차로 올라왔어요. 남자는 자고로 정력이 있어야 합니다. 변호사님처럼 머리 쓰는 사람은 특히 이런 것으로 몸을 보해야 합니다.”


강명식은 지리산에서 사슴 농장을 하면서 일 년이면 한두 번 이렇게 내 방을 불쑥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손에는 내가 생전 먹어보지 못한 것이 들려있었다. 자라탕, 가물치탕, 사슴탕, 사슴피... 딱히 먹고 싶은 것들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정성을 생각해 두 눈 꼭 감고 들이켰다. 생각하니, 지난 10년간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유지하면서 일해 왔다. 그게 그 보약 덕은 아니었을까...


6. 
2010년 가을 나는 교수로 부임했다. 이십 년이 넘는 긴 변호사 생활을 정리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시간이 날 때마다 문명유적지를 밟고 싶었다. 그 원을 드디어 나이 50이 넘어 이루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정리할 때 제일 신경이 쓰인 것은 강명식 사건이었다. 아직도 그의 사건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해서 20년간 징역살이시키고 가정을 파탄 냈으니 그 대가는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선생님, 제가 마무리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젠 크게 어렵지 않을 테니 적당한 변호사를 찾으세요.”
“변호사님, 아니 교수님, 정말 아쉽네요. 제 손에 돈이 들어오면 크게 한 번 후사하겠습니다. 꼭 요.”


7.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학교생활에 바쁘다보니 서초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제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강명식에게서 오던 연락도 점점 뜸해졌고 언젠가부터는 그것마저 끊어졌다. 그러다가 작년 어느 날이었다.

“변호사님, 1심이 끝났습니다. 오늘 선고가 있었어요. 이겼습니다. 30억 승소입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거의 종점에 왔군요.”


8.
“박교수, 이런 판결이 나왔네. 이거 알아? 소멸시효에 관한 대법원 판례가 바뀌었어.”
“남교수, 무슨 판결? 
“야, 이렇게 되면 과거사 관련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도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은 소장도 내지 못할 사건 생기겠는데. 역사의 아이러니야. 이 판결이 12월 12일에 선고되었네. 박교수, 12. 12.사태 기억하나?”

옆방 민법교수인 남기찬 교수가 점심시간에 알려준 2013년 12월 12일 대법원 판결이란 이런 것이었다.


『(수사기관의 고문 등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후일 재심에서 무죄가 된 경우라도 일반적인 불법행위 소멸시효 기간이 지난 사건에서는) 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해야 하고, 그 기간 내에 형사보상법에 따른 형사보상청구를 한 경우에는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해야 한다.』


9. 
지난봄이었다. 학교에는 영산홍, 산철쭉이 지천에 피었다. 나는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40년 전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강간살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를 받았다가 재심에서 무죄가 된 사건,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원고 30억 원 승소판결”
“원고 항소심에서 패소, 소송을 제기한 것이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2주가 지난 시점이라 국가가 대법원 판례에 따라 소멸시효 주장”


순간, 강명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울고 있었다.


[후기: 오늘 이야기는 제가 경험한 사건 중 하나를 각색한 것입니다. 국가에 의해 파탄난 한 인간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 파탄에 대해 국가, 우리 대법원이 그 피해자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법원은 도대체 뭐야? 정의는 과연 살아있는 것이야?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판례 해설: 불법행위에 기해 손해배상소송을 하는 경우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소멸시효 기한 내에서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 법에선 이 기간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혹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입니다. 그런데 과거사 사건, 즉 70년대 혹은 80년대에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인권이 유린된 사건은 이런 기준으로 하면 이미 소멸시효기간이 다 지나 소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법원은 이런 경우 예외를 인정해 왔습니다. 즉,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된 날 혹은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이후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위에서 본 2013년 12월 1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런 판결관행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피해자는 재심판결을 받은 날로부터 6개월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형사보상결정을 받은 경우에는 그 보상결정이 확정된 이후 6개월 이내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기간을 놓친 피해자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단 며칠 사이로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손해배상을 면한 것이지요. 과연 이게 정의라고 생각합니까?


● 12. 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일파가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을 제거한 군부 내 하극상 사건, 이 사건 이후 전두환 일파는 정권을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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