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소설

야곱의 씨름

박찬운 교수 2015. 9. 26. 23:01

소설 아닌 소설(2)


야곱의 씨름


#1
나는 그 해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출발은 좋았지만 그것은 뒤이어 발생한 사건에서 내가 받을 고통을 배가시키려는 짓궂은 신의 장난이었다. 그 해를 피할 수만 있었다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 했을 텐데... 하지만 그 운명은 유유히 내 인생 한 가운데로 걸어왔고, 나는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야곱이 하느님과 벌렸던 한 여름 밤의 씨름판이었다.


#2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 밝았다. 2월 초 어느 날 사무장 권충석이 화급히 노크를 하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변호사님, 이겼습니다. 재판부가 원고 청구 대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변호사 생활 10년 만에 드디어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한 해 전에 맡았던 교통사고 손해배상 사건에서 승소한 것이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야유회를 가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아이 다섯이 사망하고 두 아이와 담당 선생님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가해자의 보험회사는 운전자가 차주의 승낙을 받지 않고 운전하던 중 일어난 사고라면서 면책을 주장했다. 환자들 가족은 한 달이면 수백만 원 이상 치료비가 나가는 상황에서 모두가 거리에 나 앉을 판이었다. 


그 사건을 내가 맡아 보란 듯이 이긴 것이다. 그것도 그해 교통사고 손해배상소송으론 기록적인 배상액이었다. 승소금액만 40억이 넘었으니 말이다. 보험회사가 면책을 주장하는 사건이었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성공보수는 승소금의 30%를 받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절반만 받았다. 그래도 그 보수는 변호사 개업 이래 최고였다. 몇 년 사건이 없어도 사무실을 운영할 정도의 거금이었다.


#3
그 해는 뭔가 되는 해였다. 대박의 조짐은 또 있었다. 3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야, 대단하다. 우리 딸, 대상을 받았다고? 부상이 뉴질랜드 한 달 연수? 경사 났구나.”


“그래, 걔가 한 성질 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다고 하면 뭐든 해요. 지 아빠를 닮은 모양이야. 그게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어. 전국에서 수 천 명이 응시했대요. 거기서 대상이라니.”


우리 집 둘째 딸 서연은 그 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평소 집안에서 자주 투정을 부리고 성질을 내 우리 부부를 애태운 놈이었다. 그런 애가 KBS 주최 전국 영어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4
그 해 4월 초순 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뭐 큰 병이겠어요?”
......

“박변호사님, 이거 말씀 드리기 참 어렵네요. 어머님 병명은 암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모르겠어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되어 6개월을 넘기긴 힘들다는 것입니다.”
“말기암이라고요? 아니 며칠 전까지 배 좀 아프시다는 게 전부였는데, 앞으로 6개월밖에는 사시질 못한다고요?”


나의 어머니 이영자 여사. 당시 70세. 한국 전쟁 시 좌익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둘을 잃었다. 외할머니와 단 둘이서만 그 지옥 굴을 벗어났다. 그 후 50년간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 빨갱이 집안이라는 멍에는 어머니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다행스럽게도 국군 장교 출신 아버지를 만나 3남 2녀를 낳아 키웠으나, 시골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서울로 올라왔지만 빠듯한 살림에 자식들 학교 보내기도 어려웠다. 


그런 중에도 집안의 희망이 있었으니 셋째 아들 박동혁, 바로 나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고시공부를 했고 천우신조로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었다. 이제 사무실도 번창하기 시작했으니 어머니의 노후는 맑음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5

그 해 5월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 나는 둘째 형의 전화를 받았다.


“동혁아, 너 빨리 병원으로 좀 와 봐라. 일 났다.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어. 장 검사를 하다가 구멍이 뚫렸단다.”
“뭐라고요? 그게 웬 말입니까? 오늘 아침 전화했는데 그냥 정기검진이라고 하시던데...”
“개복수술 들어가야 한단다. 대수술이야.”


나의 아버지 박판석 옹. 당시 72세. 아버지는 그 해 마나님이 시한부 인생이 되자 종일 그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직장암으로 수술했던 부위를 검진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미숙한 전공의가 검진 도중 무리하게 내시경 손잡이에 힘을 주다가 직장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아버지는 대수술을 마치고 어머니 병실 아래층에 입원했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어머니 병실과 아버지 병실을 부지런히 오갔다.


저절로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올해 출발은 좋았는데...”


#6
“동혁아, 누나 업어라. 빨리! 아래층 응급실로!”


나는 큰 누이를 업고 정신없이 아래층 응급실로 달렸다. 담당의사 말대로 어머니는 암 판정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그 해 9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소설 같은 일이 어머니의 임종과 함께 일어났다. 어머니 마지막 길을 보러 왔던 큰 누이가 어머니 침대 바로 옆에서 쓰러진 것이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가시는 길에 외로우셨던지 누이의 손을 꽉 잡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뭡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쓰러져 사지를 쓰지 못하는 겁니까?”
“뇌졸증입니다.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잠시 지체했더라면 누님은 영원히 팔 다리를 쓰지 못하고 반신불수가 되었을 겁니다. 빨리 처치를 했지만 장애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아직 젊은 나이인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올해 출발은 참 좋았는데...”


#7

그 해 12월 말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동생 전화인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 네 신랑 어떻게 되었니?”
“오빠... 그 사람 오늘 갔어요.”

내 동생 미경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몇 년 동안 간암에 걸린 남편 병수발을 하고 있었다. 그 남편, 내 제부가 세상을 뜬 것이다. 나이 40이 되기도 전이었다.

“오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저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살까.”
“미경아, 힘내라. 아이들 잘 키워야 한다. 꼭 좋은 날 올 거다. 오빠가 옆에 있잖니.”


상가를 나오니 정신이 혼미해 졌다. 병원 옆 성당에선 한 해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내 머릿속엔 교통사고 소송 승소, 둘째 애의 대상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누이, 제부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신이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마포대교로 갑시다.”


#8
2015년 어느 봄 날 나는 고이 모셔 둔 2001년 벽두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 고통은 무뎌질 거야. 고통의 상처는 내 마음속 진주가 되어 영롱하게 빛을 낼 거야. 아름다운 삶은 그만큼의 슬픔을 필요로 하는 것이야.”


[후기: 그 언젠가 제게 슬픔이 소나기처럼 내렸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아픈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이젠 이 글이 제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이것이 카타르시스겠지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말 못할 상처 속에 삽니다. 그분들에게 조그만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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