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윤석열의 난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25. 2. 5. 09:17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자다가 깼습니다. 새벽 두 시. 내일을 위해선 다시 잠을 자야 하는데 머릿속 생각이 멈추질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손가락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왜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가?

 

제가 이곳에서 몇 차례 말한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이 SNS 공간을 떠날 거라고요. 제 글창고(티스토리)1천 개의 글이 채워지면 여한 없이 이곳을 떠날 거라고요. 지금 글창고에 970여 개(비공개 글 포함)의 글이 채워졌습니다. 최근 정국 상황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창고에 글이 채워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한두 달 새에 창고에 글이 다 차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그만 써야겠다고 한 것은 글창고에 글이 쌓여 지면서 이제 딱히 할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 때나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짧은 글 하나라도 긴 사색의 끝에 나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글을 쓰려고 하면,  어, 이것 언젠가 한 말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럴 때면 글창고에 가서 유사한 글이 있는지 찾아보면, 아닌 것도 아니라, 몇 년 전 쓴 글 중에 지금 쓰는 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글이 있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잦다 보니, , 내가 세상에 할 말을 거의 다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이야 비상시국이니 시국에 맞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지만, 이 시국이 평화의 국면으로 정리되면, 진짜 졸업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달리 있습니다. 방금 전 이불 속에서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저의 수다 본능이더군요. 이것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 쓰지 않아도 될 말이지만, 수다 떠는 의미로 한 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 묻고만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불문의 본능이지요.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느 곳에든 풀어놓아야 살 것 같은 데, 제 일상에서 그것을 할 수 있는 게 이 공간이지요. 한마디로 제게 이 공간은 수다 공간입니다. 이렇게 남들 다 자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것은 제 글을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친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이들에게라도 말을 해야 가슴 속 응어리가 조금 가시는 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우울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제가 무슨 특별한 우국지정에서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저 같은 남자도, 때론 누군가와 마음속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말을 들어줄 사람들을 찾기 힘듭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성장한 자식에게 정치적 이야기를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자칫 이야기를 했다간 묘한 가족 분위기를 만들어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기 일쑤지요.

 

이날까지 인연을 맺어온 소중한 동창, 동기들이 있지만 이들과도 어떤 이야기는 마음 터놓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을 삼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들과 경조사를 알리기 위해 단톡방이 몇 개 열려 있지만 정치적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불문율입니다. 따지고 보니 꿈결에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톡방에 올라온 하나의 글 때문입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단톡방에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글쓴이가 불문율을 깬 것이지요. 자기 딴엔 신문에 정성스럽게 쓴 논설이니 친구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올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혀를 찼습니다. 어떻게 전문가란 사람이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마치 윤석열의 변호인이 쓴 변론요지서 같더군요. 가관은 그 글 아래에 맞장구를 친 친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고... 이 사람이 저와 지난 40년간 절친인데....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좋은 다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백종원이 진행하는 소주 랩소디였습니다. 잘 만들었더군요. 그것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소주를 좋아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소주를 맛깔스럽게 마시는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소주 문화를 어떻게 바꿔나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선배들의 못된 폭탄주 문화까지 새로운 놀이 문화로 만들어가고 있더군요. 역시 신세대는 다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한편 서글퍼졌습니다. , 나는 소주 한번 저렇게 마시질 못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남들은 하루 일이 끝나면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꼼장어를 앞에 두고 저렇게 달게 소주 파티를 하는데, 나는 언제 저런 것을 경험해 보았던가. 그저 허구한 날 책상 앞에서 책이나 읽고 손가락 운동하는 것으로 인생 대부분을 보냈으니... 허무한 세월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 SNS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어쭙잖은 이야기라도 좋아요를 누르거나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고 댓글을 다는 친구가 그리운 나머지 하루에도 수없이 이곳을 찾는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가상의 친구인데도 말입니다. 제게 수천 명의 친구가 있고 그보다 몇 배가 많은 팔로워가 있지만 실제 만나본 사람은 극히 소수거든요. 나머진 사실 전기만 끊어지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그 미지의 존재들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지요. 제 음성이, 제 감정이 가느다란 전파를 타고 당신의 눈에 닿을 것이란 믿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적같은 일이지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지요.

 

가상의 친구지만 내 삶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와 대체로 유사한 생각을 가지며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이 글에 동감을 표하는 당신이 이 나라의 가장 떳떳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당신은 적어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에 대해 나와 같은 열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적어도 이것을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선 같이 싸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것들만은 가상의 세계를 넘어 현실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러니 이곳에 모인 우리는 동지가 아니겠습니까. 내일 현실의 세계로 나가 전쟁을 벌여야 하는 우리 모두가 잠시라도 수다를 떨며 그래 괜찮아, 그래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야’, 하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제가,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좀 잠을 자야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오늘 완전히 하루를 망치겠습니다. 이 글은 오늘 오전 중 정리를 한 후 올리겠습니다. 오늘 제 넋두리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굿바이!)